▲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조각가 막스 클링거의 작품 <카산드라>청동상.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엔도 명예본부장은 기가 막혔다. 미심쩍은 동북수용소에 대한 정보 공개 요청이 거부됐다. 관계 당국 측으로부터 국가안전보장 관련 사항에 대해, 그것도 적법한 절차를 거친 사안에 대해 자꾸 의문을 갖게 되면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 아닌 경고까지 받았다. 마치 수십 년 전 학창시절 경찰 정보과 형사가 은밀하게 찾아와 예상 형량을 언급하며 겁줬던 일을 떠올리게 만든다. 시간이 그렇게나 지났지만, 일본 정부기관의 하는 짓은 옛 시간에 묶여 있다. 인권이나 국민의 알 권리는 안중에 없다. 오로지 자신들 편의만이 기준점이다.
"김원택, 민주당 쪽 사람들과 연락은 잘 주고 받고 있지?"
"네, 일이 있을 때마다 긴밀하게 연락하고 있습니다."
학생운동-시민운동 주체인 전일본공동체본부 도쿄지부장을 맡고 있는 김원택은 요즘 민주당과 협의를 통해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만들고, 그 세력 확산에 애쓰고 있다. 기존 운동권에다가 공식적인 당 조직을 참여시켜 활동력을 높이는 동시에 이런 활동의 홍보를 함께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참여인원이 적더라도 시민들이 직접 움직임을 보여준다는 게 가장 큰 목표다.
"각 지부별로 최근 실종자들에 대해 전국적으로 살펴봤습니다. 그 결과가 심상치 않습니다. 3개월간 무려 1천500명이 넘는데요. 고등학생 이하 청소년들을 제외하고 성인 실종자 수가 지역별로 예년에 비해 적게는 두 배에서 많게는 5배 이상이나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여성에 비해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고요. 그들 중 80% 넘는 인원이 한국계입니다. 아직 귀화하지 않고 한국 이름을 쓰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고요. 민주당이 당 차원에서 그 가족들과 개별적으로 접촉하고 있고, 곧 백서를 내놓을 계획이랍니다."
말하는 김원택의 설명은 매우 중립적이었다. 하지만 듣는 엔도 본부장의 심경은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그 설명 속에 들어있는 일본이라는 이름을 가진 괴물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서가 공개되는 시점이 적기라고 판단되는군. 그때를 기화로 일본 곳곳에서 정부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일시에 터져 나와야 해. 그래야만 전체 일본 사회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고, 시민들 힘으로 점점 강해지고 있는 국수주의 광풍을 막을 수 있게 돼."
엔도 본부장은 자못 비장하다. 나름대로 확신이 있어 당위와 가능성을 말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일본에서 시민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시민들이 주체가 된 변혁이나 하다못해 '운동'마저도 딱히 찾아보기 힘들다.
"이번에는 다릅니다. 전에 볼 수 없는 동향이 파악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과 SNS 힘이 만만치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내기를 꺼리는 사람들 심리가 온라인에서는 거침없습니다. 흥분을 보일 뿐 아니라 일본의 위태로운 움직임에 대해 멈춰야 한다는, 그래서 더 이상 미친 일본이 돼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화산 폭발하듯 터져 나오고 있다는 얘깁니다.
특히 몇 년 전 안보법안에 대해 반대했던 '실즈(SEALD's, Students Emergency Action for Liberal Democracy-s,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를 중심으로 오프라인에서 실체를 갖는 전국적인 단체를 결성하자는 네티즌도 상당수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이들을 매개로 민주당과 공산당 등 정당을 개입시킨다면 그야말로 시민운동의 불을 댕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게 우리 시민운동 전문가들의 기대 섞인 분석입니다."
김원택은 엔도에게 확신에 찬 듯 얘기한다. 진중한 그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그만큼 변화의 조짐을 온전히 감지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 했던 일들이 인터넷을 비롯한 온라인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그 파장은 너울너울 너울을 일으켜 사람과 사람사이로 퍼진다. 그냥 퍼지는 게 아니다. 낱낱이 하나하나 모여 그것을 산술적으로 합친 것보다 훨씬 큰 해일이 된다. 해일을 넘어 쓰나미로 커진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삼키려든다. 보이지 않는, 그러나 무자비한 대중의 힘으로.
온라인에서도 강자와 약자, 창안자와 추종자, 대표와 구성원이라는 구분이 엄연히 존재한다. 김원택은 그들 중 강자이면서 창안자이자 대표성을 갖는 사람을 찾아낸다. '반정부 블로거'로서 이름이 높아진 인물이다. 그의 ID는 '태풍의 눈'이다. 바로 블로그 댓글과 SNS를 통해 김원택은 그의 '숭배자'를 자처한다. 그는 쾌히 만날 것을 약속한다.
단순한 만남이 아니었다. '태풍의 눈'을 따르는 무리들이 일제히 출동하자 뻑적지근한 집회가 된다. 재밌는 것은 오프라인에 나타난 '태풍의 눈'은 겨우 스무살이 갓 넘은 전문대 학생이라는 점이다. 글로써 강인하게 느껴진 것과는 달리 유약해 보이기까지 한다. 마치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주인공 도로시가 에메럴드시에서 마주친 마법사 오즈와 마찬가지로, 온라인에서 본 '마법사'와 오프라인의 떠돌이 점쟁이 '마블 교수'처럼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