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기대하게 만든 에로 봉, 허망했다

[빅풋 부부의 좌충우돌 산티아고 순례기 3-2] 론세스바예스~수비리 ②

등록 2016.01.20 10:35수정 2016.01.20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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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 순례자들이 힘겹게 산길을 오르고 있다.
자전거 순례자들이 힘겹게 산길을 오르고 있다.박성경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길은 모두 아홉 개이며, 어느 길을 걸어도 순례 인정을 해준다. 그리고 그 길은 걸어서 가도 되고, 말을 타고 가도 되고, 자전거를 타고 가도 된다.

그런데 또 인력거를 '끌며', '타며' 가도 된다는 걸 이날 알게 됐다. 아래 사진 속 노부부는 오스트리아에서 오신 분들인데, 걷기가 불편한 아내를 인력거에 태우고 백발의 남편이 그걸 끌며 순례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부인에게 무슨 잘못을 얼마나 많이 저질렀기에 이런 고행을 하고 있나 싶기도 했는데, 만약 그랬다 하더라도 죽기 전에 이런 특별한 순례를 함께 하게 됐으니 아내도 다 용서하지 싶다. 사실 웃고 이야기하는 이 노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봤을 때, 이런 고행의 순례가 가능했던 건 '잘못'이 아니라 '사랑' 때문이란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순례를 하면서 직접 만나지는 못했는데, 몸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순례를 하는 이들도 다수 있다고 한다. 두 발로 배낭 짊어지고 순례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휠체어를 타며 또 인력거를 끌며 순례길에 오른 이들에겐 경의를 표한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부부 순례자 몸이 불편한 아내를 인력거에 태우고 백발의 남편이 인력거를 끌며 순례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부부 순례자몸이 불편한 아내를 인력거에 태우고 백발의 남편이 인력거를 끌며 순례하고 있다.박성경

인력거 끌고, 휠체어 타고 순례길 걷는 사람들

메스키리츠 봉을 넘고 12.5km를 걸어서야 점심을 먹을 마을, 헤레디아인(Guerediain)에 도착했다. 바스크어로는 마을 이름이 비스카렛(Biscarret)이다.

마을이 워낙 작다 보니,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 겸 바(Bar)가 마을에 딱 하나 있다. 점심을 먹기엔 늦은 시간이었지만,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순례자들로 조그만 식당이 화장실 앞까지 북적댄다. 남편과 나는 햄이 들어간 바게트 샌드위치 하나를 나눠먹고 커피 두 잔을 마셨다. 가격은 모두 6.70유로. 정말 저렴하게 한 끼를 해결했다.


헤레디아인 마을 마을에 있는 유일한 식당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점심식사를 해결했다.
헤레디아인 마을마을에 있는 유일한 식당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점심식사를 해결했다.박성경

헤레디아인에서 2km를 걸어 또 하나의 작고 예쁜 산골마을인 린소아인(Linzoain)을 지나고, 또 다시 4.5km의 산길을 힘겹게 올라 오늘의 두 번째 깔딱 고개인 해발 810m의 에로 봉(Alto de Erro)에 도착했다.

이름이 살짝 웃겼지만, 그 풍경이 왠지 기대됐었는데 막상 도착한 에로 봉은 좀 허망했다. 큰 도로가 바로 옆을 지나는 것도 그렇고, 송전탑 아래 빨간 의자를 놓고 콜라를 파는 트럭도 그렇고. 발 아래로 스페인의 산자락이 멋지게 펼쳐진 산 정상일 거라는 기대가 확 무너졌다.


에로 봉(Alto de Erro) 해발 810m의 봉우리인데, 풍경이 그리 아름답진 않다.
에로 봉(Alto de Erro)해발 810m의 봉우리인데, 풍경이 그리 아름답진 않다.박성경

 에로 봉을 지나 걷는 순례길 표지석이 소박하지만 예쁘게 장식돼 있다.
에로 봉을 지나 걷는 순례길 표지석이 소박하지만 예쁘게 장식돼 있다.박성경

에로 봉은 허망했지만, 에로 봉을 지나 걷게 된 숲길은 참 아름답고 상쾌했다.

5월 첫날, 갓 잎을 틔우기 시작한 스페인 산자락의 연두 빛깔 이파리들이 마음을 야들야들 부드럽게 만들었다. 12.5kg의 무거운 배낭 때문에 걸을 때마다 머리가 쿵쿵 울리고 어깨가 쪼개지는 것 같았지만, 거친 호흡을 따라 들어온 숲속 공기는 그 모든 힘겨움을 누그러뜨릴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다.

중세시대엔 이 에로 숲이 순례자를 위협하는 도둑들의 보금자리였다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니 겁먹지 말고 맘 편히 숲을 즐기면 된다.

에로 봉에서 산길 4km를 내려오면, 오늘의 목적지 수비리(Zubiri)가 나타난다.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딕 양식의 중세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미치광이 병에 걸린 동물들이 이 다리의 중앙 기둥을 세 바퀴 돌면 병이 낫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다리 이름도 스페인어로 '공수병'이란 뜻의 '라 라비아(La Rabia)'다.

순례자 위협하는 도둑들의 보금자리였던 에로 숲

수비리 마을 입구에 있는 라 라비아(La Rabia) 다리 '공수병'이란 뜻의 이 다리 기둥을 동물들이 세 번 돌면 미치광이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다.
수비리 마을 입구에 있는 라 라비아(La Rabia) 다리'공수병'이란 뜻의 이 다리 기둥을 동물들이 세 번 돌면 미치광이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다.박성경

낭창낭창~ 그렇게 걸으며 이 다리를 건널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책에서는 론세스바예스에서 이곳 수비리까지 23km를 걷는 데 7시간이 걸린다고 했지만 우린 9시간이 걸렸다. 마을이 보이면 구경도 하고 성당이 있으면 요리조리 살펴도 보고, 이 지방 운동인 펠로타 경기장도 구경하고, 산길 어디서라도 힘들면 철퍼덕 앉아서 물도 마시고, 자연도 보고, 공기도 흠뻑 마시다 보니, 책에 적어 놓은 예상 시간보다 훨씬 많이 걸렸다. 그게 뭐 잘못인가?

잘못은 아닌데, 잘 몰랐던 건 맞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워낙 매스컴을 많이 타다 보니, 엄청 유명해졌고 그만큼 순례자가 많아졌다는 걸 뼈저리게는 몰랐다. 수비리는 그 많은 순례자들을 수용하기에 방이 부족한, 아주 작은 마을이라는 것도 몰랐다. 그래서 순례자들 중에 거의 꼴등으로 마을에 도착한 우리에게 잘 곳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수비리 입구에서부터 공립 알베르게(순례자 숙소)에 도착하기까지 호스텔, 호텔, 사립 알베르게, 심지어 펜션까지... 모든 숙박업소에서 우린 이 말을 들었다.

스페인 말로는 "콤플레또(completo)", 영어로는 "풀(full)", 우리말로 "방 없어"였다.

그래도 공립 알베르게엔 누울 자리가 남아 있었다. 딱 베드 3개가 남았단다. 20여 명이 함께 자는 큰 방에 베드 1개가 남았고, 4명이 한 방에서 자는 작은 방에 베드 2개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4인실에 남은 두 베드는 같은 방에 있는 게 아니라 각기 다른 방에 하나씩 있다고 했다. 이래저래 이산가족이 될 판, 우리는 4인실 각각 다른 방에 겨우 잠자리를 정했다.

 수비리 마을의 공립 알베르게 4인실 모습이다.
수비리 마을의 공립 알베르게 4인실 모습이다.박성경

 알베르게 앞 순례자들의 신발과 지팡이가 고된 하루를 보여준다.
알베르게 앞 순례자들의 신발과 지팡이가 고된 하루를 보여준다.박성경

수비리의 공립 알베르게 4인실 베드는 하나에 8유로였다.

4인실 보다 더 저렴한 다인실에 남아 있던 베드 하나도 금세 찼다. 그리고 이날 수비리의 모든 방은 "full"이 됐다. 더 늦게 도착한 순례자들은 이전 마을이나 다음 마을로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일찍 도착한 순례자들이 따뜻한 물을 다 써버려 찬 물에 겨우 씻은 것도 괜찮았다. 남편은 다른 방에 있고, 말 한 마디 통하지 않는 스페인 부부와 같은 방을 쓰는데 그 스페인 남편이 반 벗은 몸으로 같은 방에 있는 것도 뭐 괜찮았다. 거대한 덩치의 불가리아 아가씨가 내 아래 베드에서 밤새 뒤척여 부실한 2층 베드에 있던 내가 정말 한숨도 잠을 못잔 것도 괜찮았다.

하지만 한 가지.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되면 어떡하지?'

두려움이 찾아왔다.

#산티아고 순례 #카미노 #수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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