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선물로 받은 턴테이블저렴한 보급형 턴테이블이지만 입문용으로는 적당하며 나같은 초보에게는 그저 황송할 따름이다.
이정혁
LP를 듣기 위한 시스템을 갖추는 데 든 비용은 총 30만 원. 20만 원짜리 턴테이블은 생일선물로 받았고, 앰프가 내장된 중고 스피커를 10만 원에 구입했다. 이런 싸구려 음향장비로 뭘 듣겠다는 거냐고 볼멘소리 하는 이도 분명 있을 법하다. 하지만, 턴테이블 위를 도는 LP를 바라보며, 바늘의 치직거리는 소리를 듣는 황홀감만으로도 남부러울 것이 없다.
LP의 음악을 듣는 것도 충분한 재미와 감동을 주지만, 주문한 LP를 기다리는 맛도 쏠쏠하다. 배송된 새 LP의 비닐 옆면을 칼로 조심스럽게 잘라낼 때의 기대감, 중고 LP의 포장을 풀며 보존 상태를 가늠해 볼 때의 긴장감, 그리고 LP에 손자국을 묻히지 않기 위해 도넛구멍에 중지 끝을 맞추고 조심스레 꺼낼 때의 신중함까지, 30년 전의 그 촉감과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돼 온다.
불편해도 좋아, 기다려도 좋아LP는 나의 유년 시절과 사춘기를 회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소품이다. 외갓집에는 사촌형과 누나들이 모은 레코드판이 많았다.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을 사촌들은 아르바이트 월급과 용돈을 박박 긁어 병적으로 레코드판을 사 들였다. 먹고 입을 것을 고민하던 시절에 몰래 가방에 숨겨 들여오던 레코드판은 외할머니에겐 눈엣가시였다. 보물 같은 레코드판들이 마당에서 화염에 휩싸일 뻔한 적도 여러 번이다.
주말만 되면 새로 사들인 레코드판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 외갓집으로 달려갔다. 또래 아이들은 동요를 부르고 있을 때, 나는 레코드판을 통해 가요와 올드 팝을 접했다. 특히, 부모 세대들이나 들을법한 올드팝을 들으며 뭔가 우쭐한 기분도 느꼈던 것 같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The boxer'나, 라이오넬 리치의 'Hello', 캔사스의 'Dust in the wind'등 그때 처음 들었던 노래들은 요즘 들어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요즘 말하는 '중2병'이나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사춘기도 나는 LP의 음악들과 함께 무탈하게 넘어갔다. 그 당시에는 카세트테이프라는 것이 있어서 LP나 라디오의 음악을 녹음해서 선물로 주곤 했다. 학원에서 수줍어하는 여학생에게 가녀린 글씨로 노래 제목이 적힌 테이프라도 선물 받는 날이면, 그날 수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도 창고 어딘가에는 그 시절 추억을 담은 카세트테이프가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며 전성기를 회상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