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속 미세한 반전, 이것이 인생

[한국 소설이 건네는 이야기 ②] 황정은의 <계속해보겠습니다>

등록 2016.01.22 10:35수정 2016.02.23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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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잘 풀리지 않아 마음이 답답해 질 때면, 며칠 잠을 못 이룰 만큼 고민에 빠져 있을 때면, 세상의 끔찍한 모습에 숨이 턱턱 막힐 때면 저는 '삶은 고통이다'라는 말을 기억하곤 합니다. 그러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이 원래 이런 것이라면 세상과 나의 고통에 대해 너무 마음 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삶은 고통이고 또 삶은 원래 무의미한 것이라고도 생각하곤 합니다. 삶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으니 삶에 대해 막연히 분홍빛 기대 같은 것을 품을 필요도 없다고요. 꽤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생각 같지만, 저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면 더 마음이 단단해집니다. 삶은 무의미하지만, 인간은 그 무의미에서 행동을 통해 의미를 찾아낼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고로, 저는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삶을 유의미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 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고통이 무언지 알고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고통을 경험해 본 적이 있기는 있는 걸까. 그저 조금 힘들었던 것뿐이면서 고통 운운한 것은 아닐까. 무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과연 무의미를 경험해 본 적 있을까.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완벽히 무의미해졌던 상황에 놓여진 적이 있던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아직 한번도 고통이나 무의미의 끝에 다가가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황정은의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읽고나서 든 생각입니다.

애쓸 일도 발버둥 칠 일도 없는 인생

 책 표지
책 표지 창비
소설에는 애자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애자는 소라와 나나의 엄마입니다. 엄마이지만 애자로 불립니다. 애자는 엄마가 되지 못하고 애자로 남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애자가 엄마가 되지 못하고 애자로 남은 건 남편 금주가 공장에서 일을 하다 죽어버린 후부터입니다. 이후, 애자는 사랑을 잃은 여자에서 인생을 멈춥니다.

애자에게 인생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득바득 살아 봤자 소용없습니다. 인생의 본질이란 허망일 뿐이니까요. 애자의 세계엔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애자는 어린 소라와 나나에게 말합니다. 그러니 애쓰며 살 필요 없다고요.


'애자의 이야기는 부드럽고 달다. 부드럽고 달게, 그녀는 세계란 원한으로 가득하며 그런 세계에 사는 일이란 고통스러울 뿐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자초해서 그런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필멸, 필멸, 필멸뿐인 세계에서 의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애쓸 일도 없고 발버둥을 쳐봤자 고통을 늘릴 뿐인데. 난리 법석을 떨며 살다가도 어느 순간 영문을 모르고 비참하게 죽기나 하면서. 그밖에 즐거움도 의미도 없이 즐겁다거나 의미있다고 착각하며 서서히 죽어갈 뿐인데. 어느쪽이든 죽고 나면 그뿐일 뿐인데.' - <계속해보겠습니다> 중에서

위의 말은 소라가 한 말입니다. 소설은 세 명의 화자가 마치 일기를 쓰듯 독자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구성으로 돼 있습니다. 소라, 나나, 나기가 돌아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나기는 아빠가 죽은 후 이사를 온 집에서 두 자매의 옆집에 살고 있던 아이입니다. 남자 아이인 나기 또한 아빠 없이 엄마 순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세 아이는 함께 어른이 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세 아이의 성장기는 아닙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그 무엇인가를 뛰어넘어 본 적이 없습니다. 대신 아이들은 겪어왔을 뿐입니다. 삶이 주는 몇몇 형태의 고통을 약자의 위치에서 겪어왔을 뿐입니다. 삶을 겪다 보니 어른이 된 소라, 나나, 나기. 이 슬프고도 처연한 세상에서 세 사람은 느슨하게 서로의 주위를 지켜줍니다. 이 느슨한 안락 속에서나마 그들은 애자를 잊고 세상을 잊을 수 있습니다.

저는 소라와 나나가 엄마를 애자로 부르는 모습에서 아찔함을 느꼈습니다. 그간 얼마나 큰 고통이 아이들과 함께 했을까 싶어서요. 아이들은 고통 받았지만, 그 고통의 원인은 엄마였지만, 엄마를 원망하려 들지 않습니다.

엄마를 원망하지 않기 위해 아이들은 엄마를 엄마로 부르지 않기로 한 겁니다. 엄마라면 엄마의 고통에 관해서만 생각하면 안 되니까. 자식의 고통도 헤아려야 하니까. 하지만 애자는 자신의 고통에만 침잠해 있으니까. 그러니 애자는 아이들에게 엄마가 아닌 애자일 뿐입니다.

애자를 사랑하지만 애자에게 받은 고통이 아이들을 지배합니다. 나나가 말하듯 애자는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소라를 망가뜨리고 나나를 망가뜨"렸습니다. 그래서 소라와 나나의 목표는 자연스레 애자처럼 되지 않는 것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소라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엄마가 된다는 것이고 엄마가 된다는 것은 애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나 또한 애자같은 사랑은 하지 않기로 합니다. 나나에겐 딱 이만큼의 사랑이 적당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 - <계속해보겠습니다> 중에서

이렇게 살아오던 이들의 삶에 작은 균열이 생기고 맙니다. 나나가 임신을 했습니다. 나나의 배는 불러오고 소라, 나기는 그 모습을 지켜봅니다. 그들이 겪었던 세계를 새로 태어날 아기도 겪어야 한다는 것.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나는 어쩌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애자의 세계는 이제 더는 압도적이진 않습니다. 애자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찮기에 사랑스러운 우리 일생

애자는 요양원으로 보내졌고, 이제 과거의 세계는 더는 이들 주위에 없습니다. 이제는 이들이 다음 세계를 만들어 가면 됩니다. 나나는 과거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을 얻으려 합니다. 그것이 아이를 위해 나나가 해야 할 일 같습니다. 나나가 얻은 인식은, 나나를 계속 살 수 있게 합니다. 나나는 말합니다.

목숨이란 하찮게 중단되게 마련이고 죽고나면 사람의 일생이란 그뿐, 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나나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 <계속해보겠습니다> 중에서

그래서 나나는 우리에게, 또 새로 태어날 아이에게 이렇게 다짐합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하찮더라도, 무의미하더라도, 그렇더라도 이 인생을 사랑하며 살아보겠다고요. 저는 나나의 이 다짐을 듣고 비로소 조금 마음이 놓였습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던 슬픈 전주곡이 비로소 끝난 기분이었거든요.

저는 위에서도 말했듯 애자의 말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사는 일이란 고통일 뿐이고 삶이란 무의미할 뿐이라고요. 하지만 삶이란 여기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통과 무의미 속에서 어떻게든 다시 미세한 반전을 꾀하는 것. 그리고 계속 살아나가는 것. 이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덧붙이는 글 <계속해보겠습니다>(황정은/창비/2014년 10월 31일/1만2천원)

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창비, 2014


#황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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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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