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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끝인가요? 쓸 돈이 590만원이 되었는데 가진 돈이 520만원 밖에 없으니, 월급이 오르거나 돈을 더 빌려와야 합니다. 월급이 안 올랐다면 빌린 돈이 50만원에서 120만원으로 늘어나야 합니다.
이 상황을 두고 누군가 말합니다. "쓸 돈이 70만원 늘었으니 부자 된 거네".
쓸 돈은 늘어났는데 벌이가 늘지 않아서 빚이 70만원 늘어난 사람에게 말입니다. 현재 교육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누리과정을 포함한 지출이 계속 늘어났는데 중앙정부에서 주는 교부금이 늘지 않아서 지방교육청의 빚이 엄청 늘어났습니다.
수입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지출만 늘어난 상황인데, 교육부에서 너무 급하다 보니 수입과 지출을 헷갈리셨나 봅니다. 친구들끼리 술자리에서 할 수는 있는 농담이겠죠. 그런데, 중앙정부가 공식 보도자료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는 겁니다.
내 맘이 바뀌었으니 내 용돈 먼저 줘같은 보도자료 2페이지는 아래와 같은 내용도 나옵니다.
□ 교육부는 지난 2015년 10월 23일에 누리과정 소요 예산 약 4조원(유치원 1.9조원, 어린이집 2.1조원)을 정확히 산정하여 보통교부금에 담아 시‧도교육청별로 이미 전액 예정 교부하였는 바,ㅇ 일부 시‧도교육감들이 교육부가 누리과정 소요 예산을 주지 않고, 예산편성만을 강요하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임(자료 출처 : 누리과정 예산, 재정 논리로 풀어야(2016.1.27), 교육부) '정확히', '산정', '전액' 등의 표현에서 비장함이 느껴집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에서는 남편과 와이프의 가상의 대화를 보겠습니다.
와이프 : 이번 달 생활비 500만 원 필요해. 남편 : 왜?와이프 : 관리비 100만 원, 식비 200만 원, 학원비 100만 원, 대출이자 100만 원 들어가야 해남편 : 이번 달에 400만 원 밖에 못 벌었는데와이프 : 그거라도 줘봐. 아껴서 잘 써 볼게.몇 달 후 남편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골프를 새로 배웠는데 매월 라운딩을 하려면 40만 원씩 용돈이 필요합니다. 나름,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남편 : (슬쩍 밀어넣기 시도합니다) 우리 생활비 500만 원이 관리비 100만 원, 식비 180만 원, 학원비 80만 원, 대출이자 100만 원, 내 용돈 40만 원 이렇게 된 거 맞지?(식비와 학원비를 각각 20만 원 줄이고 본인 용돈 40만 원을 넣었습니다)와이프 : (어이가 없지만) 어차피 부족하니까 400만 원이라도 빨리 줘. 돈 쓰는 순서는 대출이자, 관리비, 학원비, 식비 그리고 나서 자기 용돈 순서야. 500만 원 벌어오면 자기 용돈 생각해 볼게.남편 : 앗! (좌절합니다)다시 몇 달 후 남편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냅니다.
남편 : 내가 주는 돈 400만 원 있잖아. 그거 쓰는 순서가 대출이자, 관리비, 내 용돈 그러고 나서 학원비, 식비 순서 맞지? (갑자기 본인 용돈이 우선순위로 올라왔습니다)와이프 : 뭐라고? 누가 그래?남편 : 내 맘이 바뀌었어. 그러니까 내 용돈부터 줘.교육부 보도자료를 다시 보겠습니다. 교육부가 '누리과정 예산을 정확히 산정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마치 식당 가서 밥 먹고 밥값 계산하느라 돈을 일일이 세는 것처럼 묘사했는데, 정확히는 누리과정 예산을 '기준재정 수요액 산정에 반영'했다는 의미입니다.
기준재정 수요액 산정이란 돈이 얼마가 필요한지 따져보는 작업입니다. 이걸 계산해 보는 이유는 중앙정부가 각 지방교육청으로 교부금을 나눠줄 때 누구에게 많이 줘야 하고 누구에게는 조금 줘도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위의 예에서 와이프가 남편에게 얼마를 생활비로 달라고 할지 계산해 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교육부 자료에서 '누리과정 예산 4조 원을 산정했다'는 '기준재정 수요액 산정에 4조 원을 포함시켰다'가 정확한 표현입니다. 위에서 남편이 500만 원 지출내역에 자기 용돈 40만 원을 밀어 넣은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와이프가 생각하는 500만 원 지출내역과 남편이 생각하는 500만 원 지출내역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통상적으로 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와이프가 월 지출을 500만 원으로 추정했지만 남편이 500만 원을 다 주지 못하는 상황이 많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400만 원밖에 못 벌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교육교부금에서도 추정해 본 금액을 다 못 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줄 수 있는 돈은 세금을 거두어들인 돈의 일정비율이기 때문입니다. 나누어주는 기준을 잡기 위해 필요한 항목과 금액을 추정해 보는 것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부금은 보조금과 달리 항목을 지정해서 주는 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제5조 1항). 주는 쪽에서는 총액을 줄 뿐이고, 받는 쪽에서 알아서 집행하는 돈입니다. 가정에서 어떤 항목이 우선 지출 대상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살림을 맡은 와이프 권한인 것처럼, 교육예산에 있어서는 지방교육청의 권한입니다. 그래서 남편의 첫번째 시도를 와이프가 무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두번째 남편의 시도는 무엇과 같을까요? 작년에 중앙정부가 지방재정법 시행령을 개정해 누리과정 예산을 의무지출 항목에 포함시킨 건 남편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 용돈을 지출 우선항목으로 바꾼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전액 교부했으니 예산을 편성하라'고 당당히 말하는 건 남편이 내 마음이 바뀌었으니 내 용돈부터 달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남편이 이렇게 나온다면, 가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남편이 술 먹고 객기로 시도해 볼 수 있는 말이긴 합니다. 하지만 중앙정부가 공식 보도자료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죠. 정말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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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조세재정팀장과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으로 일하는 회계사입니다
'숫자는 힘이 쎄다'라고 생각합니다. 그 힘 쎈 숫자를 권력자들이 복잡하게 포장하여 왜곡하고 악용하는 것을 시민의 편에 서서 하나하나 따져보고 싶습니다.
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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