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의 인생이 꼬였다, 돈 때문에

[한국 소설이 건네는 이야기 ⑩] 김근우의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

등록 2016.02.20 15:22수정 2016.02.23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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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웅크린 채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몸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나곤 합니다. 몸이 쪼그라들어서인지 가슴도 답답해집니다. 괜히 화도 나도 예민해지고 난데없이 목도 컬컬해지는 게 전반적으로 상태가 영 나빠져요. 이런 상태가 되면 저는 얼른 밖으로 나가 걷습니다. 며칠 바람을 쐬지 않으면 이런 상태가 되곤 하더라구요.

저녁 어스름이 질 때 걷는 걸 가장 좋아합니다. 몇 년째 똑같은 거리를 걷는데도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좋습니다. 살아있는 기쁨마저 느낍니다. 내 몸 속 어딘가에 있을 특정 유전자를 향한 고마움도 절로 생깁니다.


별 것 아닌 일에 감동하고, 웃고, 심지어는 살아있는 기쁨까지 느낄 수 있는 게 그 유전자 덕 같거든요. 삶에 힘겨워 꼴딱꼴딱 숨이 넘어가는 순간이 와도 이 유쾌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는 우리들은 계속 살아나갈 수 있을 겁니다. 대신, 유전자를  발동시키려면 바람 정도는 쐬러 밖으로 나와야 하겠지요.

세상이 보여주는 대로의 세상은 온통 어둡습니다. 돈과 탐욕의 세상을 보고 있으면 정신이 다 아찔합니다.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우리는 계속 그 세상을 주시합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돈과 탐욕의 본능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 안엔 이런 본능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아름답고 맑고 깨끗한 걸 보고 싶은 본능도 있습니다. 바람을 쐐야지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유쾌 상쾌 유전자처럼, 이런 본능을 일깨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다른 세상의 모습을 봐야 합니다. 아름답고 맑고 깨끗한 세상, 예쁘고 진솔하고 다정한 세상을 말이죠.

돈 때문에 인생 꼬인 사람들

a  책 표지

책 표지 ⓒ 나무옆의자

그런 세상을 보는 기분으로 김근우 소설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를 읽어나갔습니다. 위트가 담겨 있는 문장들이 소박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엮어가고 있습니다. 소설은 전반적으로 황당함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제목만 봐도 느껴지잖아요. 고양이를 잡아 먹은 오리라니. 그런데 이 황당함이 풀려가는 과정은 결코 황당하지 않습니다. 다정하고 진솔하지요. 이 책의 매력은 바로 이 다정함, 진솔함에 있습니다. 사실 제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첫 페이지 첫 문단이 주는 통쾌함 때문이었습니다.

불광천에는 오리가 산다.
나는 돈이 없다.
위의 두 가지 사실은 아무 상관이 없으며, 없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살다 보면 아무 상관도 없는 일들이 한데 얽혀서는 장 꼬이는 것처럼 꼬일 때가 있게 마련이다. 이것은 내 인생이 그렇게 꼬였던 시절의 이야기다.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 중에서


어디 소설 속 주인공만 인생이 꼬일까요. 살다 보면 누구나  한두 번은 기가 막힌 일을 당하고, 정말이지 장이 꼬인 것처럼 인생이 꼬이게 되죠. 그렇게 인생이 꼬였던 경험을 이렇게나 아무렇지 않게 농을 치듯 던져놓는 작가의 수법이 저는 통쾌했습니다. 꼬인 인생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거든요.

주인공 남자의 인생이 꼬이게 된 이유는 남자의 전 재산이 꼴랑 4264원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재능 없는 삼류 작가가 글로 밥을 벌어먹고 살려다 이 신세가 된 것이죠. 소설에는 남자처럼 인생이 꼬인 여자도 나옵니다. 여자의 인생이 꼬인 이유도 역시나 돈 때문인데요. 주식을 하다 돈을 다 날려먹었거든요. 둘은 소설에서 한 팀이 됩니다.

여기에 꼬마 한 명이 추가됩니다. 다행히 꼬마에겐 돈 문제가 없습니다. 꼬마가 이 팀에 합류한 이유는 꼬마의 할아버지 때문인데요. 할아버지가 누구인가. 네, 할아버지가 바로 이 책의 실질적인 주인공입니다. 팀 이름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를 쫓는 사람들'을 만든 장본인이거든요.

남자와 여자의 인생이 꼬였다는 의미는, 그들이 고양이를 먹은 오리를 쫓아다니게 됐다는 말입니다. 한낮 기온이 삼십 도를 넘나드는 불광천가를 훝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생김새가 거기서 거기인 오리 사진을 찍는 게 그들의 일이 됐거든요.

황당하지만 다정한 이야기 

할아버지에겐 호순이란 고양이가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불광천에 산책을 나갔다가 그만 오리에 잡아 먹히고 맙니다. 할아버지는 당장 사람을 모읍니다. 일당 5만 원을 줄 테니 불광천 오리 사진을 모조리 찍어오라 시킵니다. 범인이 아닌 범압 색출 작전이죠. 호순이를 잡아먹은 오리를 산 채로 잡아오면 현금으로 천만 원을 준다고도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돈 때문에 그 일을 수락하고 맙니다.

할아버지의 말을 믿을 순 없죠. 고양이를 먹는 오리라니. 오리를 먹는 고양이면 모를까. 남자는 할아버지가 노망난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정신으로 이런 일을 계획하고 이런 식으로 돈을 쓸 순 없는 거죠. 남자는 돈과 양심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매번 돈이 이기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할아버지에게 말을 할까도 생각합니다. 그런 오리는 세상에 없다고. 그런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절실하거든요. 할아버지는 고양이가 사라진 이후 먹지고 씻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리를 찾고 말겠다는 의지가 할아버지를 지탱하고 있는 거죠.

할아버지의 절실함에 남자와 여자, 꼬마도 절실해집니다. 이제 오리가 고양이를 먹었냐, 먹지 않았냐는 그들에게 논란거리가 돼지 않습니다. 그들은 할아버지를 이해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지금 운명과 대결을 펼치고 있는 것이라고. 그런 할아버지를 말릴 수는 없는 것이라고. "운명을 자각한 사람은 투쟁하거나 체념하거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고, 양쪽 다 말리거나 그만두게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마치 <모비딕>의 선장 에이해브가 운명과 맞서 싸웠던 것처럼요. <모비딕>에서 에이해브는 운명과의 대결 끝에 패배하고 죽음을 맞습니다. 이제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를 쫓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할아버지가 에이해브처럼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미친 할아버지라도, 죽게 할 순 없죠. 책의 후반부는 이런 할아버지를 위해 머리를 맞대고 일을 꾸며 나가는 세 사람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 책을 읽은 후 밖으로 나가 한번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직 봄은 오지 않았지만, 걷다 보면 봄날의 미풍이 우리 몸 안에서 불어오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목도리를 푸르고 가방에 넣은 뒤 계속 더 걸어보면 어떨까요.

걷다 보면, 평생 본 적 없던 불광천 오리가 보고 싶을 수도 있을 거예요. 생긴 게 거기서 거기인 오리 사진을 찍고 다니던 세 사람의 모습이 언뜻 머리를 스쳐 지나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다 황당했던 지난 나의 경험이 떠오를 수도 있어요. 웃음이 날 수도 있습니다. 갑자기 산다는 게 참 재미있어질 수도 있구요.
덧붙이는 글 <고양이를 잡아 먹은 오리>(김근우/나무옆의자/2014년 03월 05일/1만3천원)
개인 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 - 2015년 제1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근우 지음,
나무옆의자, 2015


#김근우 #소설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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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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