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번이 지고도 또... 근로복지공단 항소 이제 그만

삼성 직업병 관련, 공단의 면담거부와 침묵에 유감

등록 2016.02.17 16:42수정 2016.02.17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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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28일 법원으로부터 이은주씨의 난소암 사망 산재인정 판결을 받은뒤 반올림 농성장에 이를 알리는 피켓을 설치했다 ⓒ 반올림


반올림이 삼성전자 서초 사옥 앞에서 오늘(17일)로써 134일째 노숙농성 중이다. 백혈병 등 직업병 문제에 대하여 삼성에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을 촉구하고 있으나 삼성의 무책임으로 농성은 장기화 하고 있다.

전기도 없이 한겨울 비닐 두 장을 지붕 삼아 추위를 막고 쪽잠을 자는 고된 농성 가운데 지난 1월 28일 우리는 눈물 나도록 기쁜 소식을 들었다. 삼성반도체 난소암 사망노동자 고 이은주님이 서울행정법원으로부터 산업재해 인정 판결을 받은 것이다.

법원은 망인이 과거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며 사용한 접착제와 세척제 등 유해화학물질 성분에 노출된 점, 망인에게 난소암이 발병한 원인 및 발생기전이 의학적으로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더라도 근무당시 장기간 지속적으로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되었고 주야간 교대근무 등으로 피로, 스트레스가 누적, 이러한 유해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에 난소암이 발병, 사망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산재인정 판결로 인한 기쁨과 안도의 시간도 잠시, 고 이은주 님의 유족과 반올림은 근로복지공단이 이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이번 주 금요일(19일)이 난소암 판결에 근로복지공단이 항소를 제기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다.

설 명절에도 반올림은 농성장을 지키며 고 이은주님 판결에 대한 항소제기가 부당한 이유에 대해 기고를 하고 근로복지공단을 설득했다. 항소문제와 관련하여 유가족과 함께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에게 면담요청을 하고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설 명절이후 밀린 업무처리에 바빠 면담에 응할 수 없으며, 문서로도 어떤 입장도 표명할 처지가 안 된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근로복지공단의 무성의한 태도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까지 유족의 고통을 연장할 셈인가.

이번 판결은 난소암으로는 최초의 인정 판결이나 삼성반도체 직업성 암 관련 산재인정 판결로는 벌써 5번째이다. 매번 법원은 업무와 질병간의 상당인과관계를 협소한 의학적 인과관계만 볼 것이 아니라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보는 사회적 혹은 규범적 인과관계임을 분명히 했다. 어떤 유해요인에 노출되어 병이 발병했는지를 파악할 의학적 규명이나 작업환경에 대한 정보가 사업주의 은폐나 과거 작업환경 복원의 불가능 등 여러 사정상 부족한 상황에서 노동자 측에게 그 모든 책임을 떠넘긴다는 것은 산재보험 정신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 이은주님의 생전 모습 ⓒ 반올림


이렇게 법원은 노동자 측에서의 입증 곤란의 사정을 감안하여 그 입증 정도를 완화하고 산재보험이 국가와 기업, 사회가 함께 짊어지고 가는 공적부조의 목적이 있음을 매번 판결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번 난소암 판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근로복지공단이 이에 대해 또다시 불복하여 항소를 한다면 더 이상 아무런 개선의 의지가 없는 죽은 기관임을 스스로 천명하는 셈이다.


번번히 법원에서 같은 논리로 패소함에도 불구하고 근로복지공단에 애써 항소를 제기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동안 근로복지공단은 입증책임 전환 혹은 완화의 목소리에 대해 '무분별한 산재인정으로의 국가재정낭비가 우려된다'며 거부해 왔다. 그러나 난소암과 같은 희귀암은 산재인정의 길이 열린다고 하더라도 매우 드문 암이므로 산재보험 재정에 악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항소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소송 제기로 인한 국가재정의 낭비다.

부당한 항소제기로 인하여 고통을 배가시키는 일은 이제 중단되어야 한다. 이미 근로복지공단은 항소제기를 남발해 왔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망노동자 고 황유미, 고 이숙영 님이 2011년 6월 서울행정법원으로부터 산재인정 판결을 받았을 때에도 유족과 반올림의 절박한 호소를 뿌리치고 삼성과 함께 끝내 항소를 제기했다.


그 결과 또다시 3년 2개월 동안 항소심 재판을 받아야 했고 최종 산재로 인정되기까지 7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 뒤에도 근로복지공단은 삼성반도체 고 김경미(백혈병 사망), 고 이윤정(뇌종양 사망) 님의 산재인정 판결에 번번히 항소를 제기했다. 그러나 이번부터는 근로복지공단이 또다시 무책임하게 항소를 하는 일만큼은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위의 이유에 더하여 고 이은주님과 그 가족들을 생각하면 더욱 항소만큼은 막고 싶은 마음 금할 길 없다.

이은주씨는 93년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 17세의 어린나이에 입사하였다. 와이어본딩 공정에서 메틸알코올, 에폭시 수지류의 접착제와 세척제 등 유해화학물질을 취급하면서 주야간 교대근무로 힘들게 일을 했다. 배가 불러오는 등 몸에 이상증상을 느껴 99년 퇴사했고, 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00년에 난소낭종 진단, 결국 암으로 악화되어 12년간 투병하다 2012년 1월 4일 사망하였다.

온양의 흙냄새를 맡고 자랐고 집안에서 가장 어린 막내가, 삼성반도체 공장에 다닌뒤 20대에 난소암을 진단받고 12년의 투병 끝에 숨졌으니 오랜 투병생활을 함께 해온 가족들의 아픔이 오죽할까. 4남매 중 각별한 애정을 쏟았던 막내딸이 긴 세월 고통스럽게 투병하다 사망했으니 그 슬픔이 오죽할까.

79세의 연로한 아버지는 딸이 죽고 나서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세상과의 소통을 스스로 닫아버렸고 그렇게 4년이 흘렀다. 그런 아버지가 딸의 산재인정 판결 소식을 전해 듣고는 공단과의 면담을 위해 처음으로 세상 속으로 걸어 나올 참이었다. 그런데 근로복지공단은 시간이 없다며 만남을 거부하고 공문 한 장의 성의표시도 할 수 없다니 억울하고 아픈 마음 감출 길 없다.


딸 은주씨를 먼저 보내고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할 당시, 은주씨 아버님 이해철님의 슬픔에 잠긴 얼굴 ⓒ 이정구 기자


주씨를 생전에 단 한번 만난 적이 있다. 2011년 12월, 김민호 노무사님의 소개로 말기 암 투병중인 은주씨를 면회 갔던 날, 병원 침대에 앉아 노랗고 수척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한 그녀가 했던 말을, 그 두려운 눈빛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산재신청을 하면 회사에서 괴롭히지 않을까요. 회사가 노조 만들려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했는데요...." 이미 12년 전에 퇴사한 회사가 말기 암보다 무서웠던 그녀는 그로부터 한 달 뒤인 2012년 1월 4일 서른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가족들은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다. 최소한의 절차인 염을 하고 화장을 했다. 염을 하면서 어머님은 딸의 얼굴에 마지막 작별의 키스를 하면서 "내가 잘못했다. 미안하다 아가야"라고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순간 참았던 눈물을 조용히 훔치고 말았다. 왜 은주씨의 죽음이 평생 병간호로 힘들었을 어머님의 잘못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근로복지공단이 더 이상 부당한 항소를 남발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오는 금요일이면 항소제기기한이 끝난다. 근로복지공단이 만에 하나 고 이은주님 난소암 산재인정 판결에 대해 항소 제기를 검토하고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길 간절히 촉구한다.
#삼성 직업병 #난소암 #반올림 #삼성 백혈병 #삼성반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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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황상기 씨의 제보로 반도체 직업병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전자산업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민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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