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 때문에 국회 찾아 온 사람들

[모비딕 프로젝트] 정치 공백의 시대, 청년의 정치 참여 시동 걸다

등록 2016.02.26 15:45수정 2016.02.26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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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지 않기 때문에 나서지 않는 게 아니라, 나서야 하기 때문에 나섭니다. 그게 참된 용기입니다." 은수미 의원이 10시간18분 동안 필리버스터를 한 이유다. 이어 "내가 이 자리에 서야 되는지 혹은 내가 용기를 더 내야하는지 항상 질문을 한다. 내린 결론은 20대 때 간절한 것 이상으로 간절하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어제 저녁 9시 여의도 국회의사당 로비에는 '나서야 하기 때문에 나선'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특히 청년층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10명의 시민이 본회의장을 찾았다. 모두 2030세대였다. 이들은 나흘 째 이어지는 필리버스터를 방청하려 국회에 왔다. 이날 하루동안 총 225매의 방청권이 발급됐다.

평소보다 1.5배 높았던 국회 방청

평소보다 1.5배 많다. 필리버스터 첫 날인 23일에는 294매로 가장 높았다. 24일에는 199매로 다소 줄었다. 집계를 낸 의회경호담당실 방청담당 부서 관계자는 "유별나게 오늘은 주로 개인 방청이 많았다"며 "회사원이나 학생들이 한 두 명씩 왔다"고 전했다. 단체를 제외한 순 개인 방청객 수는 본회의 한 회기가 마무리 돼야 집계된다. 정확한 개인 방청객 수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관계자 말마따나 분명 '정치에 관심이 많아진 것이 피부로 느껴지는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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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방문 접수 중인 두 청년 방청객 ⓒ 갈릴레이서클


필리버스터는 단순히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합법적 정치 행위' 개념을 넘어서고 있다. 게다가 '의외로 재밌다'는 반응도 이어진다. 오후 5시에 방청을 시작해 9시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30대 여성은 "정치는 잘 모르지만 어떤 내용인지 직접 듣고 싶어 왔다"고 했다. "(들어 보니) 무제한 토론 내용이 재밌는 수업처럼 느껴졌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24일 은수미 의원은 무제한 토론 동안 국정원 간첩조작사건 등 여러 증거 조작사례들을 알렸다. 같은 날 박원석 의원은 국정원의 35년 역사를 다뤘다. 부일장학회 헌납 및 경향신문 매각 사건, 인민혁명당 및 민청학련 사건, 동백림 사건 등 국정원 전신인 중앙정보부의 조작 사건을 이유로 테러방지법을 반대했다. 필리버스터가 현대사 강의가 된 것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 여성은 "야당 의원들이 자신의 필리버스터에서 다룰 내용을 강의 커리큘럼처럼 미리 보여주면 어떻겠느냐"며 "관심 있는 시간에 챙겨볼 수 있으니까 더 좋을 것 같다"는 말도 전했다.

기성언론에 대한 반발심에 본회의장을 찾은 취업준비생도 있었다. 언론인 지망생인 이유진(25)씨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오늘 자 신문에 실린 은수미 의원에 대한 내용들을 보고 욱하는 마음이 들어 직접 와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기록 경쟁하는 필리버스터'라는 제목의 기사를 6면에, 중앙일보는 <준비 안 된 야당의 필리버스터>라는 기획 보도를 했다.


이씨는 "오늘 3시간 동안 방청했는데 신경민 의원 발언 당시 조원진 의원과 2분 간 설전이 오갔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다음 날 언론 보도를 예상할 수 있다"며 24일 은수미 의원 발언 당시 김용남 의원과의 설전만을 언론이 대거 보도한 사례를 들었다. "오늘자 뉴스와 내일 신문도 테러방지법이 왜 통과되면 안 되는지, 의원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했는지를 말하기보다 단 2분의 이야기로 도배될 거라는 생각부터 들었다"며 언론 보도를 예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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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증을 맡기면 방문증을 준다. 국회의사당에서 외부인은 핸드폰과 가방을 소지할 수 없다. ⓒ 갈릴레이서클


"내일도 오겠습니다" vs "즉각 중단하라!"

국회 밖에서는 '간절함 때문에 용기를 낸' 사람들이 있었다.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선 시민 필리버스터가 사흘 째 진행 중이다. 어제 오전 시간 동안에는 소수 정당의 후보들이나 유명하지 않은 정치 신인들이 목소리를 이어갔다. 정문을 지키는 십여 명의 의경들의 입김이 하얗게 보이는 추운 날이었음에도 발언자들은 손에 핫팩을 쥔 채 발언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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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 “내일도 오겠습니다” vs “즉각 중단하라!” ⓒ 갈릴레이서클


더불어민주당 김병관씨의 발언을 이어받은 녹색당 예비후보 신지예씨는 "본래 필리버스터는 소수정당을 위한 제도"라고 일축했다. 신 후보는 이어 "그런데 원외정당인 녹색당은 필리버스터에 참여할 수조차 없다"고 호소했다.

더불어민주당 김빈씨는 새벽 5시 30분 부터 시작한 1시간 가량의 발언을 마치며 "필리버스터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며 "'과정을 지킨 호소'를 통해 '과정을 무시한 테러방지법'에 반대한다"고 외쳤다. 당에 인재영입된 김씨는 청년 문제에 대해 "제가 겪는 문제다"라며 "청년의 다양한 문제의 원인은 정치 참여 부족에 있다"고 했다. 이어 "미래 정치를 육성할 정치 전문가를 키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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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연합과 대한민국미래연합이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 갈릴레이서클


시민 필리버스터 너머로 필리버스터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대한민국미래연합 강사근 상임대표는 국회 근처 천막에 머물며 1인 시위를 이틀째 이어오고 있다. 그는 "테러법은 국민 생명과 재산, 안보를 위해 중요한 사안인데 왜 포기하라는 것이냐"라며 "배신행위를 하려면 (야당은) 당장 국회에서 나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전 11시경에는 어버이연합 회원 백여 명이 국회 앞에서 '더불어테러당'이라는 피켓을 들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20대 청년은 "이 분들의 생각에는 반대하지만 긍정적인 현상"이라며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럽다지 않냐"고 반문했다.

용기가 만드는 정치의 생동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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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한 박주민 변호사 ⓒ 갈릴레이서클


현장에서 만난 박주민 변호사는 "특히 청년들의 참여가 많아 놀랍다"고 했다. 그는 지방에서 올라온 7명의 청년과의 만남을 회상하며 "청년의 정치 참여가 드디어 시동을 걸었다"고 분석했다. 이어 "드디어 실감이 나고 생동감 있는 정치의 가능성을 봤다"며 기뻐했다.

기성 정치의 시대는 갔으나 젊은 정치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은 정치 공백의 시대. 새롭게 부는 흥미로운 정치 바람이 국회에서만 그치면 안 된다는 게 박주민 변호사의 생각이다.

박 변호사는 "전국적인 정치 바람이 불도록 지역 선거구에서도 필리버스터를 시행해야 한다"고 했다. 필리버스터가 단순한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는 데 많은 시민들이 공감했다. 특히 청년이 정치와 호흡할 수 있는 진정한 정치의 시대가 열리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덧. 필리버스터를 직접 보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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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야경 ⓒ 갈릴레이서클


방청은 국회의원의 확인을 받으면 가능하다. 미리 의원실로 전화해 방청 의사를 알리면 된다. 주로 국회의원 지역 구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청이지만 국회의원의 소개를 받으면 방청권을 받을 수 있다. 본회의 동안 방청이 가능하다. 방청석은 본회의장 2층을 사용하며 260여석이 마련돼 있다. 기자들도 함께 공간을 사용한다.
덧붙이는 글 "후보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소수 정당의 후보가 단 한 명의 국민을 대변한다더라도 그 후보는 조명 받아야 합니다. '갈릴레이 서클'이 기획한 <모비딕 프로젝트>는 기성언론이 비추지 않은 구석 정치를 비춥니다. 우리의 발칙하고 빛나는 생각들을 기대해주세요.

취재 및 글/ 김수빈 박종화 장은선
#모비딕프로젝트 #필리버스터 #무제한토론 #갈릴레이서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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