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의 힘

[한국 소설이 건네는 이야기 14] 윤성희의 <구경꾼들>

등록 2016.03.03 17:44수정 2016.03.03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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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 문학동네

지난주에  방송된 <무한도전> '나쁜 기억 지우개' 편은 그 어느 때보다 감동적이었습니다. 포맷은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였지만, 프로그램이 실제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의 힘'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방송 내내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한도전 멤버들은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멘토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따뜻한 조언을 건넸지요. 이후 사람들은 한데 모여 둘러앉아 또 이야기합니다. 이때 역시 누군가가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들은 경청하지요.


이번에는 <무한도전> 멤버들이 일반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유재석은 특유의 따뜻하고 진심 어린 태도로 사람들이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지요. 카메라가 앞에 있고 유재석이 앞에 있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들이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공감해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멘토들은 듣는 이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진심을 다해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요. 멘토 중 한 명이었던 혜민스님은 들어준다는 것은 사랑의 능동적인 표현이라고 말했어요. 수동적으로 고개만 끄덕끄덕한다고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끄덕거림 속에 상대를 향한 깊은 관심을 내포해야 한다구요.

멘토로 나온 분들이 해준 이야기는 하나같이 다 좋았지만, 저는 특히 그분들이 이야기를 듣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누가 이야기를 하든 그분들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진심으로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또 공감하더라구요.

끄덕끄덕. 너무나 쉽게 할 수 있기에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이 조용하고 작은 행동은 사실 우리가 타인에게 바라는 거의 모든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건 기적보다 더 기적 같은 일일 수 있어요. 우리 삶을 지탱해 주는 건 한 순간의 기적이 아니라, 누군가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행위 그 자체니까요.

이야기가 우리를 버티게 한다


윤성희의 <구경꾼들>에 나오는 인물들도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습니다. 다른 대부분의 소설에서처럼요. 다만 이 소설과 다른 소설엔 하나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나오는 모든 이들에게 주위의 모든 이들이 귀를 열어주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전 처음엔 이 소설을 기적에 대해 이야기 소설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런 기가 막힌 기적에 대해서요. 예를 들면 이런 것. 트럭에 깔리고도 뼈 하나 부러지지 않은 사람,  교통사고 때문에 결혼 10주년 기념 여행을 포기했더니 가려던 호텔에 폭탄테러가 벌어진 일, 시멘트 반죽에 빠졌다가 살아난 남자, 연을 날리다 연줄에 다리가 엉켜 연과 함께 날아갔으나 무사했던 일, 무너진 공사현장에서 삼일 만에 살아난 남자 등등의 기적 말이에요. 이 모든 사연들은 소설에 나오고 있었고, 또 주인공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소년의 가족들도 기적 같은 일을 맞죠.


모두가 죽거나, 한 두 명 크게 다칠 수 있었던  교통사고에서 단 한 명도 크게 다치지 않은 가족. 신문 기자가 찾아올 정도로 기적 같았던 이 사건에  끼어들었던 또 다른 우연과도 같은 기적들. 기적 덕분에 사람이 살고, 행복이 이어지고, 웃음꽃이 피는 그런 이야기가 소설의 주 내용일 줄 알았던 거에요. 하지만 소설은  기적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말이지요. 소설에서 기적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끈과 같은 거였구요.

기적을 통해 사람들은 만나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소년의 엄마, 아빠는 무려 기적처럼 살아난 사람을 만나러 회사까지 그만두고 해외로 떠나기까지 합니다.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러요. 여행에서 돌아온 아빠가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할 때 가족들은 새벽 세시에 편의점으로 몰려가기도 합니다. 새벽 세시만 되면 편의점에 찾아와 초콜릿을 먹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러요.

만약 이 소설이 영화였다면 우리는 매우 특이한 영화를 볼 수 있었을 겁니다. 엑스트라가 없는 영화. 다른 영화 같았으면 잠시 얼굴만 비추고 화면에서 빠질 사람이 어느새 자리를 잡고 앉아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러면 주인공들은 추임새를 넣어가며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는 거에요. 그렇게 이야기가 돌고 돌아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는 영화 한편이 탄생하는 거죠.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을 지탱하는 건 이야기였습니다. 삶이 주는 쓸쓸함과 역경 앞에서 무너지고 싶을 때도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다시 살고자 힘을 냅니다. 소설은 말하고 있었어요. 한 순간의 기적은 우리를 버티게 하지 못하지만, 이야기는 우리를 버티게 할 수 있다구요.

하루에도 참 많은 만남이 이뤄지지만, 우리는 정작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주고받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안의 이야기들은 단단한 돌이 되어 우리 내부에 더 깊이 쿡 박혀버리게 되지요. 이렇게 박힌 돌이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저 역시 제 고민을 혼자만 안고 지내는 편이었습니다. 혼자 끙끙 앓고 힘들어하다가 몸이 아프기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러다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언젠가부터는 내게 귀를 열어주는 친구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렇게도 하지 못했던 '힘들다'는 말을 친구에게 하니 그 자체로 돌이 물컹하게 풀려버리더라고요. 대신 저도 친구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줍니다. 삶은 너무 힘이 들지만, 그래도 친구와 주고받는 이야기 덕분에 하루하루를 버텨낼 수 있는 것 같아요.
덧붙이는 글 <구경꾼들>(윤성희/문학동네/2010년 10월 05일/1만2천원)
개인 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

구경꾼들

윤성희 지음,
문학동네, 2010


#윤성희 #소설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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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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