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우산> 겉표지
보림
오늘 소개할 책은 바로 알록달록한 우산이 등장하는 그림책 <노란 우산>이다. 그런데 이 그림책에는 글씨가 없다. 시디가 한 장 들어있을 뿐이다. 책장을 펴면 이런 안내 문구가 나온다.
"이제 빗소리와 함께 제일 첫장을 여시고 침묵과 함께 책장을 넘기시며 감상하시기 바랍니다."침묵과 함께 감상하라니. 그림책 입문 몇 년 만에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런데 이 안내 문구는 굳이 없어도 될 듯하다. 침묵이 통하지 않는 그림책이니 말이다.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들리지 않아도 들리는 것 같고 글씨가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 같으니, 침묵이 통하지 않을 밖에. 이 얼마나 신비한 경험인지.
글 없이도 충분히 좋은 그림책노란 우산에 장화를 신은 아이가 집을 나섭니다. 옆동에 사는 아이도 집을 나섭니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어딘가로 가는 길, 우산은 셋에서 다섯으로 늘어납니다. 길에 보이는 놀이터를 그냥 지나치지 못 하는 아이들. 괜히 발자국을 남겨 봅니다. 분수대를 지나 계단을 걷고 철길을 건너니 아이들은 십여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셀 수 없을 만큼 거리를 메운 우산 행렬. 저만치 학교가 보입니다.
'비오는 날 학교 가는 모습을 담은 거구나.' 마치 드론을 띄워 동영상을 촬영한 듯 빗속에 더 선명하게 보이는 우산 색깔. 그 안에 숨은 아이들의 이야기들이 궁금한데, 여기서 열살 큰아이와 숨은 그림 찾기 하나.
"이 그림책에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게 있던데.""응? 뭔데?""찾아봐.""장화인가? 뭐지? 뭐야? 뭔데?""알려주면 재미없는데... 비오는 날인데, 빗줄기가 그림에 없지 않니?""아... 그래도 비오는 날인 건 알 수 있지.""어떻게?""일단 우산을 썼으니까, 그리고 여기 물웅덩이도 있잖아. 장화도 신었고. 그리고 나무랑 풀도 비가 오니까 색이 짙어졌어. 자 봐봐, 여기."글씨 없는 그림책의 장점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라 들었다. 겪어보니 정말 그러하다. 이 책을 혼자 읽을 때는 '아이가 보는 그림 속 이야기는 어떨까' 궁금해 하며 봤는데, 같이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니 퍼즐을 맞추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가 재밌어 하는 건 물론이고. 나중에는 한 페이지씩 이야기를 지으며 읽어 봐야지.
그러나 고백하건대 이야기 짓기보다 피아노 소리가 더 좋았다. 그림책에 글이 있지 않아도, 이야기가 있지 않아도 이대로 충분하다 생각이 들 만큼. 며칠 전, 봄비다운 봄비가 내렸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앞에도 알록달록 우산꽃이 피었다. 모았다 퍼지기를 반복하는 우산꽃들의 행렬은 횡단보도 건너편 학교 앞까지 이어졌다.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대로 충분히 좋네, 싶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