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카라 까지 장장 17시간을 달려야 하는 버스 지붕에 이삿짐까지 싣고 있다.
송성영
버스는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의 승객을 태우고 3시가 넘어 출발했다. 포카라까지 장장 17시간. 지정된 좌석번호가 있는 버스였지만 시내버스나 다름없었다. 중간 중간에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내리고 거기다가 이삿짐에 해당하는 식탁이며 침대, 가재도구 등을 버스 지붕에 싣기도 한다.
그렇게 여기저기서 짐이며 사람들을 가득 채우고 달리고 또 달린다. 차창 사이로 스팀기운 같은 훅한 더위가 몰려와 차라리 창문을 닫고 있는 게 나을 정도였다. 4시간 쯤 달려와 어딘가 그 지명을 알 수 없는 버스 스탠드에서 저녁을 먹었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생수를 사서 다시 버스에 오르는데 곱슬머리의 운전기사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당신 나라의 친구 미국인 여자가 버스 탔습니다. 잘 해보세요."나는 운전기사에게 미국은 한국과 친구의 나라가 아니다. 한국은 미국의 자본에 종속돼 있다 라고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냥 가볍게 웃으며 차에 올랐다. 내내 버스에 외국인은 나 혼자가 전부였는데 외국인이 하나 더 늘었다.
금발의 젊은 여자는 미국인이 아니라 독일인 배낭 여행자였다. 그녀는 중간 중간 휴게소에서 나처럼 담배를 피워 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혼자서 인도 네팔 여행길에 나섰다는 그녀는 나처럼 틈틈이 사진을 찍고 뭔가를 꼼꼼히 메모하고 있었다.
외국인이 나 혼자라는 것을 알고 그녀는 언제나 내 곁으로 다가와 담배를 피웠다. 젊은 여자 혼자 낯선 사람들 틈에서 밤새 달리는 장거리 버스를 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그 큰 눈으로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는 현지인들 틈에서 그나마 내가 외국인이라는 것에 의지가 됐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그 지명을 알 수 없는 낯선 도시에서 오후 세 시에 출발한 포카라행 버스는 밤새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깜박 잠들어 깨어난 새벽녘, 어느 도시에서 내 옆 좌석에 젊은 사내가 앉았다. 나처럼 간단한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그와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그가 내게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물어왔다.
자신은 네팔 경찰이라며 모바일을 열어 사진을 보여준다. 차량이 전복 되어 있거나 살해 현장의 시체 사진, 그리고 가족사진을 보여준다. 나는 그동안 인도에서 찍은 몇몇 사진을 보여줬다.
"당신은 어디로 갑니까?""고향에 부모님을 만나러 갑니다."그의 고향은 포카라에서 한 시간쯤 떨어져 있는 작은 산골 마을이라고 한다. 농사를 짓고 있는 부모님을 한 달에 한 번씩 찾아뵙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산골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네팔 산악지대에서는 어떤 농사를 짓고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본래의 목적지였던 히말라야 설산 안나푸르나를 까마득히 잊고 그를 따라가고 싶었다.
"내가 당신의 고향 마을에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얼마든지 환영합니다."또 다른 목적지가 생겼다. 네팔 경찰 어르준 채트린, 그를 따라 나서기로 했다. 여행길은 사람과 사람으로 이어져 있다. 발길 닿는대로 가다보면 그 어떤 인연을 만나게 된다. 그 인연을 무작정 따라가 보기로 했다. 바르디아 국립공원에서 나올 때 버스 차장을 믿었다가 속았던 것이 하루도 채 안됐다. 하지만 그 덕분에 자애로운 보살의 미소가 담긴 물 한 잔으로 바다와 같은 자비심을 맛볼 수 있지 않았던가.
한국을 떠나온 지 70여 일 째. 여행 중에 누군가 친절한 웃음으로 다가와 건네는 물 한 잔이라도 함부로 먹지마라, 친절하게 다가오는 누군가를 무작정 따라 나서지 마라는 여행 경고장은 내게 더 이상 불필요했다. 나와 만나는 인연들에게 내일 배신을 당한다 해도 오늘, 지금 이 순간을 믿기로 했다. 내가 만약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