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도시 탐색론, 왜 그림을 넣었냐면

[서평] 철학자의 도시 담론, 우석영의 <철학이 있는 도시>

등록 2016.04.04 14:45수정 2016.04.04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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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여관 또는 하숙이다. 한 빌딩 안에 방을 여러 개 만들어놓고 세를 놓는 집이니, 역시 현대적 도시의 산물로 미국에서 가장 크게 발달되었다." - 68쪽

이 글은 1933년 <신동아> 5월호에 실린 기사의 일부다. 처음 아파트의 개념을 소개한 것으로 당시 아파트는 '공동세입자주택' 정도로 통했다. 2016년의 아파트와는 상당히 다른 개념이다.


명실상부 오늘날의 아파트는 현대 도시적 삶의 대표적인 매개체로 자리매김 되었다. 부유층과 신중산층의 경제 수준을 가늠하는 아이콘으로 급부상해 '괜찮은 삶을 의미하는 문화 기호'로까지 인식되었다.

아파트에 대한 인식 차이가 이 정도라면, 도시 전반을 아우르는 양상은 훨씬 급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을 떠나 10여 년 만에 돌아온 철학자에게 발각된 도시의 면모는 어떠할까. 고국으로 돌아온 철학자에게 서울은 낯선 이물감으로 가득한 타지였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친숙하지 않았던 도시의 면면들.

10여 년 만의 서울은 친숙하지 않은 도시

 <철학이 있는 도시> 그림으로 읽는 우리 시대, 한국 도시 인문학
<철학이 있는 도시> 그림으로 읽는 우리 시대, 한국 도시 인문학궁리
우석영의 <철학이 있는 도시>는 어쩌다 이방인이 된 철학자에게 발각된 도시 보고서이자, 철학자의 사색이 담긴 도시론이다. 대학 시절 미술사회학을 전공한 경험을 바탕으로 저자는 도시적 상징성을 담아낸 미술작품도 함께 실었다. 이 책은 도시, 철학, 미술, 이 세 영역을 혼합해 새로운 전체를 만드는 '콜라주'의 기법으로 시대의 문제를 짚어나간다.

2015년 OECD 국가기준 한국이 받은 성적표는 다음과 같다. 자살률 1위. 공교육비 민간 부담 수준 1위. 실업률 증가폭 1위. 저임금노동자 비율 1위. 이 불명예스러운 일등의 연속 행진이 가리키는 것은 다름 아닌 꼴찌였다. 사회안전망 수준 꼴찌. 공공사회복지 지출 비율 꼴찌. 어린이와 청소년의 행복 지수 꼴찌.


이 숫자의 행렬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저자는 묻는다. 1953년 휴전협정으로 전쟁은 종식됐지만, 지금 '다른 버전의 전쟁'을 치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전쟁에 버금가는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초상화다. 전쟁의 폐허에서 거의 모든 것을 복구했던 '리셋(reset)의 시대'를 지나왔지만, 물질, 정신, 민주주의라는 삼중의 빈곤은 여전하다.

한국 사회의 동력이 된 멘털리티란 서구에 뒤처지지 않는 부와 웰빙의 추구다. 처음에는 일본식을, 그 다음은 미국식, 그 다음에는 서유럽, 북유럽 식을 '좋음의 기준'으로 삼아왔다. 이는 좋은 삶의 기준을 스스로 찾지 못한 고질병으로, 저자는 '뿌리 없는 에토스(ethos 좋은 삶에 대한 감각)의 질병'이라고 칭한다.


일상을 잠식해버린 극소비사회의 총체적 지배력도 눈에 띄는 변화였다. 깍듯한 존칭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고객님'. 자아에 내재된 여러 겹의 정체성 중 고객님은 소비 군중만을 지칭한다. '모든 개인의 고객님화'로 자본의 사회적 지배력이 심리적 지배로까지 확장되었다. 삶의 감각의 '내비게이터'가 되어, 소비심리를 조장하고 부추기는 것이다.

딘호 벤토의 그림 <인간 동물Ⅱ>는 소비하는 동물로 퇴화한 인간을 보여준다. 네 개의 다리에 신겨진 빨간 구두, 목에 둘러진 명품 가방. 얼굴만 사람일 뿐 그 외형은 짐승에 가깝다. 거울에 비친 얼굴도 사람이 아닌 흉측한 해골바가지. 소비에 길들여진 인간 최후를 담은 한 폭의 그림 앞에서, 인간의 본질마저 묵살하는 자본의 지배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지난 10여 년간 무서운 기세로 성장한 모바일 시장은 한국 도시의 주류적 특징으로까지 확대된다. 우리는 '모바일링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의 과다한 정보는 욕망의 자극처에서 다른 자극처로 끊임없이 이동하게(모바일링) 한다. 정보혁명, 인터넷 소비자본주의, 소셜미디어로 특징 지워지는 현대는 외부로부터 밀려오는 '자극체의 과다성'를 더욱 악화시킨다.

그래서 도시의 삶이란 '살아감'이 아니라 '떠밀려감'이다. 이 '떠밀려감'은 장소 정체성을 잃어버린 도시민의 삶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반은 거주이고 반은 표류인 '거류'가 대다수 도시민들의 생활 방식인 것이다. 한국도시의 전형적인 공간인 아파트는 이 '거류'의 방식을 양산한 장소이기도 하다. 주거공간이 삶의 터가 되지 못하고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해 '기한부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초고속 압축 성장 국가의 기적 뒤에는 도시 빈민의 문제가 숨어 있다. 1990년대 중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추진되자 노동시장은 급격하게 유동적으로 움직였다. 한시적 노동시장에 새롭게 출현한 노동자층인 프레카리아트(Precariat)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실정이다. 노동 시장의 문제는 경제 문제이기 전에 실존의 문제이다. 한 사회의 노동 구조는 개인의 삶 전체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게오르게 그로스의 <실직상태>는 실직된 가장과 아이가 나란히 거리를 걸어가는 장면을 그려놓았다. 이목구비가 뭉개져 얼룩덜룩한 남자의 낯빛. 아이의 얼굴마저도 하얗게 질려있다.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지만 닿을 곳은 그 어디인지 불확실하다. 이처럼 프레카리아트의 삶은 시한부로 사회적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문제를 떠안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시대는 '호모 파베르(도구를 활용, 인공물을 제작하는 인간)가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사람)를 압도한 시대'로 발전했다. 더 알아낼 무언가에 대한 조급함으로 우리의 뇌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이 테크네의 능력을 맹신하는 한 휴식은 우리에게 없다. 능력을 발휘할 일자리도 없지만, 휴식다운 휴식을 취할 여유도 없다. 저자는 이 시대를 '휴식이 어려운 시대'라고 명명한다. 단순히 쉬지 못함이 아니라 휴식이 행복과는 무관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행복마저 규격화 된 사회가 바로 한국의 도시다. 저자는 이상적인 삶의 모델에 포박된 채 한 방향으로만 달려가는 한국인의 맹목성을 공포라고 규정짓는다. 그 중에서도 경제 공포는 사회적인 강박증세로까지 나타난다. 경제적 불안 심리가 집단적인 징후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 경제 공포가 부모에서 아이에게로 되물림 된다는 것이다.

사회라는 전쟁터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아이들은 '배우는 기계'가 된다. '피지배 상태의 무력감'에서 싹튼 아이들의 '순응감각'은 커다란 비극을 초래했다. 4·16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그 '순응감각'은 생사의 갈림길에서조차 자발적인 움직임을 만들지 못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에 가만히 있도록 순응하게 만든 당사자는 우리 사회였다.

이렇게 길들여지고만 있을 것인가

저자는 묻는다. 우리는 제대로 된 미래 도시민을 양성하고 있는가. 그 질문은 '우리는 제대로 된 도시를 만들고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환원된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견딜 만한 현실'이거나 '견뎌야만 하는 현실'이다. 그 어느 쪽을 택해도 견딘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시간이 거듭될수록 견딤은 길들여짐이 된다. 이렇게 길들여지고만 있을 것인가.

따뜻한 한 잔의 커피에서 커피 농장 노동자들의 억센 손과 발을 그린 그림을 떠올린다면, '안주'하지 못하고 '안달'하는 자신을 느낄 때마다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노인의 풍경이 떠오른다면, 그 떠올림은 테오리아(theoria) 의 삶을 실천하는 한 방법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실천한 테오리아의 삶의 핵심은 '놓아둠'이다.

감응하여 그 한때에 머무름. '현재를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상실하는' 우리에게 그림은 머물러 바라보게 한다. 유동하기 쉬운 정신과 마음을 하나의 좌표로 정박하게 한다. 이것이  책 곳곳에 소개된 그림의 의미다. 동서양을 가로지르고,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찾아낸 그림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런 것일 게다.

"도시는 인간의 이상이 표현된 장소야. 그리고 이상을 찾아가는 인간의 거처이기도 하지. 하지만 인간인 한 우리는 지구의 질서, 우주의 질서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어떤 기형의 도시이든 인간이 만든 한 언제나 이 질서의 요구를 받지." -272쪽

철학의 향기를 덧씌우고 미술적 색채로 물들여 바라본 도시, 그 속에 인간의 이상이 꿈틀거린다. 콘크리트 빌딩 숲에 가려져 있을 뿐, 우리가 바라볼 삶의 지평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무언가에 떠밀리고 무언가에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도시의 미로 속, 그 어딘가에 아직 완성되지 못한 인간의 이상이 있다.
덧붙이는 글 <철학이 있는 도시> 우석영 지음/ 궁리/ 18000원

철학이 있는 도시 - 그림으로 읽는 우리 시대, 한국 도시 인문학

우석영 지음,
궁리, 2016


#도시 # 우석영 #철학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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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척 합니다. -이병률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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