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라 폴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 책 표지. 이 책은 우리에게 경쟁이란 것이 무엇인지, 희망이 무엇인지를 묻게 한다.
시공주니어
트리나 폴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은 우리의 교육 현실에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책이다. 책에서 애벌레들은 경쟁의 기둥을 올라가면서 서로를 밟고, 친구들을 떨어뜨리면서 기둥의 꼭대기를 향해 올라간다. 기둥의 꼭대기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우리 교육문제도 마찬가지다. 모두들 최고의 대학에 가면 희망이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서로를 밟고, 밀어내면서 오늘도 열심히 경쟁의 사다리를 올라간다. 청소년 시절의 풋풋한 청춘의 시간을 버리고, 친구들과 우정은 버리고 경쟁을 취하면서, 높은 등록금으로 부모들과 자신의 아까운 열정을 낭비하고 그리고 청년기의 마지막에 실업의 늪과 수렁을 맞이하면서….
호랑애벌레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기둥의 끝 부근까지 올라가지만 기둥 끝에도 희망이 없음을, 기둥 끝에 올라간 애벌레들이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호랑애벌레는 내려오면서 그 사실을 수많은 애벌레들에게 말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는다. 내가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위를 향해 올라간다. 호랑애벌레는 우리 사회의 희망을 찾고자 하는 교육단체요, 시민단체라고 볼 수 있다.
최근에 '학벌없는 사회'란 시민단체가 해산했다. 1998년에 출범한 학벌없는 사회는 우리 사회의 신선한 충격을 던졌지만, 학벌이 없어지기는커녕 더욱 고착화돼가는 현실 앞에서 지난 2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은 안타까운 시간이었을 테다. 기둥의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는 애벌레들에게 그곳에는 희망이 없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통하지 않는 것은 학벌없는 세상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목소리와 비슷했다. 학벌을 없애야 한다고 아무리 소리쳐도 껍질은 더욱 단단해질 뿐, 해체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노란애벌레의 방식은? 호랑애벌레 소리쳐 학벌을 해체하자는 것이었다면 노랑애벌레는 마을마다 동네마다 대학을 하나씩 만들어버리는 것에 가깝다. 천 년 전에 대학이 만들어질 때 지식과 지혜의 공동체라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대학이 과연 대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을 속에서 작지만 큰 대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을에는 지혜롭게 사람들을 보살피는 이들이 있으며, 각자 살아가면서 터득한 생활의 기술이 있으며, 서로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마당과 우물터가 있다. 마을에 이미 있는 지식과 지혜를 서로 배우고, 부족한 것들은 다른 마을에서 배운다면 부족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더구나 알파고의 시대, 세계의 정보가 실시간으로 흐르는 이 시대에.
문제는 상상과 용기, 마을은 상상이다
각자가 살아온 마을이 다르기에 마을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마을의 정의 중 하나는 상상의 공동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굳이 공간을 같이 하지 않더라고 상상으로 공감할 수 있다면 재미난 마을로 탄생할 수 있다.
경쟁에 휘둘리고 불안에 휩쓸리는 것은 상상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대학이 가능함을 상상하면서 마을대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족함이 없을 수 없겠지만, 각자가 지닌 재능과 열정과 지혜를 믿고 꽃피는 봄날에 '마을대학 종로'가 시작한다.
마을대학은 누구나 무엇이든 어느 곳에서든 만들 수 있다. 알파고의 시대에는 부족한 것은 상상일 뿐, 시간과 공간은 크게 구애를 받지 않는다. 21세기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것도 상상해볼 수 있도록 하는 시간과 환경을 줘야 하지만, 19세기 교육부와 20세기 학교는 요지부동이다.
마을대학 종로에서는 다양한 시도를 준비하고 있다. 한옥에서 전통장과 천연 조미료 만드는 법을 배우고, 행복하게 사는 법과 행복하게 죽는 법도 배울 것이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 이웃과 더불어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사는 법도 배우고, 관심이 있다면 주제에 천착해 더 깊은 수준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 속에서 장인이 나오고, 생활 박사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교육관료와 외눈박이 전문가들이 빼앗아 간 버린 배우는 즐거움과 가르치는 즐거움을 봄날 오후에 만끽하려고 한다.
새로운 상상과 나른한 봄날 오후를 즐기고자 하는 이들은 봄꽃 가득한 정독도서관을 거닐고 마을대학에 문을 두드려는 보는 것도 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