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나 너 좋아해>의 겉표지/ 신순재 글/ 차정인 그림
돌베개어린이
사랑을 전할 방법은 모두 달랐다. 피라미는 물 속에서 찰랑찰랑 헤엄치다 몸 색깔을 바꾸는 재주를 부렸다. 사랑에 빠진 공작은 자박자박 걸어와 꼬리 날개를 활짝 펼쳤다. 말은 뚜가닥뚜가닥 달려와 잇몸을 활짝 보이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굴뚝새는 멋진 둥지를 선물했고, 물총새는 맛있는 물고기를 선물했다. 어두운 밤 반딧불이는 깜박깜박 꽁지 불을 켰다.
사랑을 전할 수많은 방법 중 개구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개구리의 몸 색깔은 마음대로 변하지 않을 뿐더러 개구리에겐 꼬리 날개도 없었다. 튼튼한 잇몸은커녕 둥지를 지을 재간도, 물고기를 잡을 능력도 없었다. 개구리는 반딧불이의 꽁지 불빛이 부러워 한숨도 못 잤다.
그때였다. 귀뚜라미의 뚜르르르 노랫소리가 들려온 것은. 목청이라면 개구리도 뒤지지 않았다. 그래, 노래야! 개구리는 턱주머니를 볼록하게 부풀렸다. 개루개루 개루개루 나 너 좋아해! 개구리의 세레나데에 온 동네가 시끄러웠지만, 세상에서 유일한 자신만의 사랑 노래였다.
백일 기념일을 앞두고 너도 꽤나 고심이 많았겠지. '사이버 세상'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어떤 선물을 준비할지, 어떤 고백의 말을 해야할지 궁리한 끝에 남들이 하는 건 모두 다 해봐야겠다는 결론을 내린 듯 했다.
책가방과 영 어울리지 않는 케이크 상자에 피식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요란한 선물 꾸러미에 대한 시기어린 질투심 때문은 아니다. 이제껏 받아본 꽃은 빨간색 색종이로 만든 카네이션뿐이니, 그 꽃송이가 부럽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오히려 너의 우울한 사춘기에 불어온 봄바람이어서 반가웠다. 너의 황량한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줄 핑크빛 로맨스를 응원하고픈 생각이었다. 어느새 너는 개구리처럼 천방지축 사랑을 고민할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어른들이 벌이는 애정공세를 그대로 따라하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걱정부터 앞섰다. 너의 손끝 하나로 언제든 네 곁에 머무는 '사이버 공간'을 마냥 신뢰할 수도 없었다.
늦는다고 했지만 눈길은 자꾸 벽시계를 향했다. 시끌벅적한 백일 기념 파티에 떠들썩할 테지. 어느 드라마에서처럼 '뽀뽀해' 하는 친구들의 함성이 쏟아지면, 마지못해 그런 액션을 취하지는 않을까 싶은. 같은 반 여학생이라고 했는데. 쓸데없을지도 모를 걱정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부모가 일러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치얼마 전, 나름 조심스러운 물음에 너는 담담하게 말해줬다. 손은 잡아보았냐는 질문에 너는 그렇다고 했다. 무엇보다 숨기려 하지 않아 고마웠다. 어떤 기준은 알려줘야 할 것 같아 입을 열려는데 네가 먼저 말했다.
"네네, 알겠습니다. 아들 인생에 괜한 상상력은 NO NO! 그런 상상력은 엄마 글에서 펼치시라구요."요사이 듣기 어려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꽤 진심이 담긴 말투였다. 그런 걱정쯤은 능히 알고 있다는 듯. '남자는 어깨'라며 팔굽혀펴기를 하고, 알통을 만든다고 아령을 들며 호들갑을 떨었던 너였다. 겉멋이 잔뜩 들어 앞뒤 분간도 못할 줄 알았는데, 그날따라 믿음직스러웠다.
오히려 노트북 앞에서 쩔쩔매는 내 모습까지 마음 속에 두고 있었던가 보다. 쓸 얘기가 사춘기 아들 밖에 없냐며 핀잔을 주고, 어떤 날에는 네 얘기 그만 써먹으라고 놀릴 때도 있었는데. 그래 맞다, 우리 이 그림책 함께 읽었지. 사랑을 전하기 위해 낯선 미지의 길로 뛰어들고, 생판 모르는 동물들과 만나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열정적인 개구리를 응원했었는데...
그런데도 가끔씩 침대 밑에 나뒹구는 끈적끈적한 휴지 뭉치를 볼 때마다, 어른으로서 일러줄 성에 대한 개념을 생각해보곤 했다. 어쩌면 그 해답은 이 그림책 속 결말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구애에 성공한 개구리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올망졸망한 올챙이들. 이 세상 모든 생명들은 사랑하는 마음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들이다.
어렸을 적 책장이 닳도록 들추었던 이 그림책의 아름다운 결말을 잊지 않기를 바라며, 주인 없는 빈 방 책상 위에 이 그림책을 올려놓았다. <나 너 좋아해> 그림책 제목만큼이나 상큼 발랄한 고백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되기 위해, 조금은 낯간지러운 질문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다.
성에 대한 인식이 너의 가슴에 싹 트도록 말이다. 부모가 일러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치는 몸에서 다시 몸으로 이어지는 '생명' 아닌가. 이런 엄마 마음을 알아챌지 모르겠지만. 딱히 받아본 적 없는 성교육이라서 민망스럽지만, 솔직한 태도만큼 좋은 건 없으니, 숨김없이 한번 들이대 봐야지. 엄마는 별 걸 다 얘기한다고 발끈할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제 방으로 숨어버릴지 그 이후가 사뭇 궁금해진다.
나 너 좋아해
신순재 글, 차정인 그림,
길벗어린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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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척 합니다. -이병률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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