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맞는 말일까요

한국백혈병환우회, 백혈병 환자와 가족들이 참여하는 서울둘레길 토요일 걷기

등록 2016.04.26 11:20수정 2016.04.26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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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하는데 저는 오히려 아프고 난 후에 더 철이 없어진 것 같아요. 저희 엄마께서도 저를 보면 혀를 끌끌 차세요. '쟤를 누가 서른 넘은 사람으로 보겠냐며.' 그런데 오히려 아프기 전보다 지금처럼 이렇게 사는 게 맘이 편해요. 건강을 되찾아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도 많이 변했어요. 그런 경험을 나누는 이런 자리가 저로서는 정말 반가워요."


백혈병 환자와 서울시민이 뭉쳤다

백혈병 환자와 환자 가족이 함께 모여 서울둘레길 완주를 목표로 걷기에 나섰다. 한국백혈병환우회는 지난 3월부터 11월까지 매월 2회, '서울둘레길 토요일 걷기 프로젝트(이하 서둘토)'를 진행하고 있다.

백혈병 투병 중인 환자와 완치된 이들, 환자 가족, 자원봉사자, 서울시민들이 함께 모여 서울둘레길을 걸으며 서울의 역사와 문화, 자연환경에 대해 함께 느끼고 배우고 체험한다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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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둘레길 토요일 걷기' 프로젝트에 참가한 한국백혈병환우회의 회원들이 네 번째 걷기 프로젝트를 마친 후 기념 사진을 위해 포즈를 취했다. ⓒ 한국백혈병환우회


서울대학교 암병원 연구발표(2011년)에 따르면 암 환자의 76%가 우울상태를 호소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돌보는 환자들의 가족 또한 우울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데 가족들의 82.2%가 우울증상을 겪고 있고, 이들 중 17.7%는 자살충동을 느낄 정도다. 이러한 현실에서 백혈병 투병 중인 환자와 완치된 환자들의 만남은 무엇보다 그 의의가 크다는 것이 주최 측의 설명이다.

한국백혈병환우회의 이은영 사무처장은 "백혈병 환자나 가족들의 우울감은 심각한 수준이다. 오랜 투병 생활로 지친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며 "투병 중인 백혈병 환자와 가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투병 의지다. 이번 서둘토 프로젝트를 통해 환자와 가족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고 걷기를 통해 건강도 함께 추구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대학생이나 청년들을 대상으로 서둘토 서포터즈를 모집 중이다. 생태 전문가를 초빙해 함께 둘레길을 걸으면서 나무나 꽃에 대해 배우고, 서울둘레길의 환경을 깨끗이 하자는 '클린 캠페인'도 진행할 예정이다.

고덕산에 오르며 서로의 이야기를 풀어놓다

지난 23일, 네 번째 서둘토 프로젝트로 둘레길의 제3코스인 고덕ㆍ일자산코스를 걸었다. 백혈병 판정을 받고 이식 후 완치된 환자들과 현재 투병 중인 환자들, 한국백혈병환우회의 대학생 자원봉사자 모임인 '반딧불이'의 회원 15명이 광나루역을 출발해 한강공원 광나루지구, 암사나들목, 암사동 선사유적지를 3시간 넘게 걸어 고덕역에 도착하는 10km 여정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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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3일, 네 번째 서울둘레길 토요일 걷기 프로젝트에서는 고덕 일자산 코스를 걸었다. ⓒ 한국백혈병환우회


"항암치료 받을 때는 몸도 너무 힘들고 다 귀찮아요. 오늘 코스가 산길은 아니지만 백혈병 투병 중인데 이런 건 생각도 못하죠. 이런 과정이 중요하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지만 사실 실천하기는 쉽지 않아요. 그런데 이번 기회를 통해 백혈병에서 완치된 환우들도 만나고 얘기를 들으면서 희망이 생겨요. 얘기를 들으면서 부럽기도 하고 나도 열심히 치료받으면 저렇게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항암치료를 끝내고 건강이 좋아져 이번 걷기에 참석했다는 이강일씨는 조혈모세포를 이식받은 후 완치 판정을 받은 이미진씨에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미세먼지가 심해 마스크를 쓰고 걸으면서도 얘기만은 멈추지 않는다. 따뜻한 날씨에 땀이 나고 숨이 차올라도 얘기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표정만은 밝다.

이날 걷기에는 대학생 자원봉사자 모임인 '반딧불이'의 회원들도 참여했다. 대학 3년생인 조성민씨는 자신도 백혈병 투병 경험이 있다며 조심스레 얘기를 꺼낸다.

"고등학교 때 백혈병 진단을 받았어요. 항암치료도 받고 이식 수술도 했는데 병원에서 한국백혈병환우회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요. 지금은 일상생활 하는 데 무리는 없어요. 건강이 좀 괜찮아져서 '반딧불이'에 가입했고 6기로 활동하고 있어요. 제가 백혈병 환우였다가 자원봉사자로 이런 행사에 참여하니 감회가 새롭네요. 오늘은 자원봉사자로 왔지만 환우회 행사에 올 때마다 힘을 얻어가는 느낌도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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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둘레길을 걸으면서 각자의 투병 경험을 나누고 길(生)을 찾다. ⓒ 한국백혈병환우회


고덕산 정상에서의 점심식사 시간. 백혈병을 앓다 완치된 후 한국백혈병환우회에서 무균차량 '클린카' 운행을 도맡아 하고 있는 이충호씨가 맛있는 김밥을 직접 사가지고 왔다며 생색을 낸다. 완치된 후 몇 년째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는 환우 몇 명은 막걸리도 한 잔씩 한다. 술을 끊었다며 사양하니 술 끊은 기념으로 한 잔 하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이른바 '아재 개그'에 껄껄 거리는 모습이 좀 철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런 생각이 표정에 나타나기라도 했는지 의미심장한 대답이 돌아온다.

"이식 후에 다시 새 사람이 된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다른 사람한테 조혈모 세포를 기증받아 이식수술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모습은 중년의 아저씨라도 새로 태어난 지 10년도 안 됐어요. 열 살 밖에 안 돼서 철이 없어요."
#한국백혈병환우회 #서울둘레길 토요일 걷기 #서울둘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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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노동자. 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작업을 해왔으나 암 진단을 받은 후 2022년 <아프지만, 살아야겠어>, 2023년 <나의 낯선 친구들>(공저)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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