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찢어져도 뛴다... 아빠의 유치원 운동회 분투기

우여곡절 많았지만... 역시, 잘 다녀왔어요

등록 2016.05.09 14:21수정 2016.05.09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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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 하면 만국기죠. ⓒ pixabay


"나 발이 갈라져서 뛰지 못한다고 꼭 율이 담임 선생님한테 말해줘야 해."


지난 5일이었습니다.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에서 어린이날을 맞아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운동회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운동도 싫어하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그리 즐기지 않는 성격인 탓에 사실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유치원 운동회라면 엄마들만 잔뜩 모여 있을 것인데 저 혼자 그곳에 가라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일이었습니다(저희는 중국에 거주하고 있어서 5월 5일 공식적인 휴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내는 출근했습니다).

"저기…. 혹시 안 가면 안 될까?"
"안 가도 되기는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다 엄마 아빠랑 있을 텐데…, 그럼 율이는 혼자 있는 거잖아?"

정말 진지하게 안 가면 안 되냐고 아내에게 물어보니 그래도 괜찮답니다. 다만 아들이 혼자 다른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혼자 있을 생각을 하니 도저히 안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깔끔하게 입고 유치원으로 나섰습니다.

"아버지 안 나오시면 어머니라도 나오세요"

그리고 드디어 들어선 유치원. 엄마들이 대부분이기는 했지만 아빠들도 꽤 많이 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여전히 유치원 운동장으로 들어가는 게 두려웠습니다. 다른 아빠들은 그래도 아이 엄마라는 지원군과 함께 왔지만 아빠 혼자 온 집은 저희 집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유치원 운동장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엄마들이 가득한 천막 앞을 씩씩하게 걸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곧 멍한 상태가 됐습니다.


"일찍 가야 천막 안에 돗자리 펼 수 있대. 늦게 가면 천막 밖에서 햇빛 다 받고 있어야 한다는데."

아침에 아내가 늦게 가면 천막에 자리가 없어 햇빛을 고스란히 다 받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제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제게 남은 자리는 강렬한 햇살이 그대로 쏟아져 내리는 천막 밖 공간이었습니다. 사실 저보다도 행사 중간 중간 아이들이 부모님들이 있는 돗자리에 와서 쉬다 간다고 하는데 계속 햇볕을 쬘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섰습니다. 또 점심 시간에 잠시 온다는 아내가 아침에 자신이 했던 이야기를 듣고도 늦게 와 아이와 오손도손 따뜻한(?) 햇볕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걱정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홍팀 백팀에서 태극기 드실 아버지 두 분 나오세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다소 멍해진 순간, 유치원 원장 선생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가만히 앉아 있으려고 했지만, 우리 아들이 속한 홍팀 응원석을 보니 아무리 둘러봐도 남자가 저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까 전에는 분명히 많았는데 어째서 없는 것일까. 이미 홍팀 중 한 아빠는 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안 나오시면 어머니라도 나오세요."

물론 저를 바라보고 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어쩐지 유치원 원장 선생님의 말이 제게 하는 것처럼 느껴져 천천히 태극기를 들러 나갔습니다. 그리고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자 저 쪽에서 아들이 있는 반이 입장해 들어왔습니다. 아들은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뭔가를 찾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일찍 온 엄마 아빠들은 아이들에게 이미 인사를 한 모양입니다. 두리번거리던 아들이 저와 눈을 마주치자 웃었습니다. 정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국민의례를 다 마치고 제 옆에 선 아들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아빠 왔잖아. 아빠 왔는데 안 좋아. 왜 엄마 안 와서?"

아들은 별다른 대답이 없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다 엄마가 왔는데 율이는 엄마가 안 와서 서운했던 모양입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배신감도 느꼈습니다. 아빠는 와도 그렇게 반갑지는 않단 말인가!

"앞쪽에 서 계신 두 분 아버님 나와주세요."

뛰라고? 나 발이 아픈데?

아들을 달래고 있는데 원장 선생님이 앞쪽에 서 있는 아버지 두 분 나오라고 했습니다. 5세 반이 제일 앞에 섰기 때문에 제일 앞에 서 있던 저는 별생각없이 앞으로 나갔습니다. 앞에 나가니 패트병 중간을 뚫어서 끈으로 연결한 줄넘기줄 같은 게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저보고 이것을 뛰어넘으라는 것인 줄 알고 어떻게 할까 고민했는데 끝에 가서 손잡이를 잡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끝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아이들이 나오면 줄넘기처럼 돌려주는 줄 알았습니다.

"자, 줄 서 있는 아이들이 뛰어넘을 수 있도록 저 끝까지 줄을 쭉 끌고 가시면 됩니다."

그랬더니 패트병 줄넘기를 갖고 아이들과 부모님이 줄 서 있는 끝 쪽까지 쭉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찢어진 발바닥이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그 정도야 어렵지 않을 것 같아 끝까지 쭉 갔습니다. 마지막 가족까지 패트병을 뛰어넘고 허리 좀 피려는 순간….

"패트병을 엄마랑 아이들 머리 위로 들어올리세요. 그렇게 한 다음 뛰세요!"

뭐라고? 뛰라고? 나 발이 아픈데? 반대편에 있는 아이 아빠가 뛰자 저도 자연스럽게 달리게 됐습니다. 찢어진 발바닥이 아픈 것보다 워낙 운동을 안했더니 그 짧은 거리를 뛰고도 힘이 많이 들더군요.

"자, 이제까지 연습이었고요. 이제 실전 들어갑니다. 실전은 두 번 왕복입니다. 두 번이요."

아니, 연습이라니요…. 이렇게 열심히 뛰었는데. 그리고 실제로는 무려 두 번이나 왕복해야 한다니.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안할 수도 없었습니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고 막상 경기에 들어가니 또 질 수 없다는 승부욕이 발동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달리기를 할 때 응원을 해주는 아이들과 엄마들의 목소리에 무언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생겨 더 더 빨리 달려야지 하는 순간 오히려 다리에 힘을 풀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워낙 운동을 안 해서 몸이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를 악 물고 뛰어서  이겼습니다. 별 거 아닌데 마치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것처럼 어찌나 큰 쾌감이 느껴지는지 그 다음 학부모 참여 대회는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가 속한 팀이 이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참여한 활동은 두 번 다 줄다리기였는데 운동 부족으로 뚱뚱해진 몸을 무기 삼아 줄 앞에 서서 그냥 무조건 누워 버렸습니다. 저 때문에 이긴 것은 아니겠으나 어쩐지 제 덕분에 이긴 것 같이 알 수 없는 쾌감이 계속 밀려왔습니다. 무엇보다 줄다리기를 하고 오니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제 어깨를 열심히 안마해주는 것이 느껴져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들인 줄 알았더니... 아들은 과자만 냠냠

"야, 그래도 우리 아들밖에 없네."

시합에서 이긴 것보다 아빠 힘들다고 안마해주는 아들이 기특해서 돌아본 순간 낯선 얼굴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제 아들이 아니라 같은 반 친구이고 전부터 알고 지내던 집의 딸내미가 삼촌 힘들다고 안마를 해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이구, 시원하다. 고마워요. 그런데 율이는 어디 있지?"

제 아들은 어디 있는지를 찾으려고 뒤를 돌아보니 아들은 열심히 과자를 집어 먹고 있었습니다. 아까부터 서운했던 감정이 또 올라오려 했지만 저를 닮았으니 그렇게 먹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겠지라면서 넘겼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운동회의 꽃 마지막 순서 이어달리기 순서가 돌아왔습니다.

"달리기를 잘 하시는 부모님들은 아버님, 어머님, 각각 두 분씩 나와 주세요."

사실 마음 속으로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한 바퀴를 멋있게 돌고 결승선을 끊으면서 박수를 받는 장면을 생각하니 정말 나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대표로 나서겠다고 생각하신 한 학부형이 몸 푸는 자세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숨겨진 고수들이 엄청나게 많이 나올 것 같은 느낌.

게다가 아빠 대표로 나온 두 명 중 한 명은 굉장히 날렵해 보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축구를 오래 한 몸 같았습니다. 그래서 우선 참기로 했습니다. 무엇보다 아들이 계주 대표로 나온다고 하니 사진도 찍어야 한다는 그런 정당한 이유를 내세워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달리기가 시작됐지요. 나가지 않은 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내가 나갔으면 그냥 졌겠다."

옆에서 어떤 아이 아빠가 한 말이 제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움과 부담감으로 시작했던 운동회가 끝나지 시원함과 서운함이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운동회가 끝난 다음 날.

"아빠 발 아픈데도 잘 뛰던데."

이렇게 말하는 아들의 말에 운동회에 정말 잘 갔다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내의 말.

"운동회 갈 때 좀 예쁘게 하고 가지 그랬어?"
"예쁘게 하고 갔지. 내가 제일 멋있더라."

운동회도 열심히 참여했고 아빠들 중 제일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운동회가 끝난 후 맞은 일요일. 지나는 길에 같은 유치원에 다니던 학부형을 만났습니다. 정말 잘 간 걸까 생각이 들더군요.

"오늘은 좀 괜찮네. 운동회 때는 왜 그러고 왔어?"

역시 가지 말아야 했나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역시 잘 갔다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5살 밖에 안 된 아들과도 이미 많은 일을 겪었고, 이런 많은 감정들이 오고 가는데 37살 아들을 둔 아버지는 어떤 감정이실지 문득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궁금해졌다기보다 아버지께서 저를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견디셨던 지난 날의 무게라는 감정이 조금은 제 어깨에도 실리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5월에 있는 어버이날이 무겁다는 것을 아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워낙 커서 갚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다만 그 큰 부모의 사랑을 다시 자식에게 내리 사랑을 해줄 수는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께서 아버지 시대의 방식으로 저를 사랑하셨듯 저는 제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친구처럼 제 아들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추억하듯 제 아들도 제 나이가 됐을 때 제 손자·손녀를 보면서 저를 추억하길 바라며.
덧붙이는 글 제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어린이날 #운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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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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