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예고한 고목?

임진왜란 최초의 승병장 영규대사와 금산성 전투 조헌 선생의 유적 가산사

등록 2016.05.13 16:42수정 2016.05.13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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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사 극락전. 왼쪽의 작은 건물 산신각은,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처럼, 규모는 조그마해도 충청북도 기념물 제115호로 지정된 상당한 문화재이다. ⓒ 정만진


'옥천읍에서 보은으로 가는 37번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옥천군 안내면이 나온다. 도율리로 접어드는 도로를 따라 5km 정도 가서 율티(栗峙)를 넘으면 조헌 선생 은둔지(도래밤티)와 유상지석(遊賞之石)이 있는 마을(용촌리)이 나온다. 여기에서 답양리 방면으로 2km 정도를 더 가면 왼쪽으로 가산사 입구가 있으며, 작은 개울을 건너 골짜기를 따라 나 있는 폭이 좁은 시멘트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채운산 중턱쯤에 작은 분지가 형성되고 넓은 평지가 나오는데, 이곳에 가산사가 위치하고 있다.'

한국문화사학회가 2001년에 펴낸 <문화사학> 15집의 가산사 위치 설명이다(괄호 안은 인용자의 추가). 읽기만 해도 가산사가 인적 드문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 저절로 헤아려지는 문장이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길 안내문에 의지하여 목적지를 찾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들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안내회남로 671' 또는 '안내면 답양리 37'을 휴대폰 화면에 띄운 채 단숨에 가산사에 닿는다.


보은에서 50리, 옥천에서 50리 떨어진 산속의 가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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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 내부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비롯한 삼존불. 1992년 화재로 말미암아 소실되어 버려 1994년 극락전 중건 때 다시 만든 작품이다. ⓒ 정만진


그러나 지난날, 특히 420년이나 전인 임진왜란 때의 가산사는 어느 누구도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숭유척불의 조선 시대였으니 말을 타고 이곳을 찾는 선비는 애당초 있을 까닭이 없었고, 간혹 부처님을 모시려는 독실한 마음에 젖은 불신자나 드문드문 쌀 한 보자기를 챙겨든 채 허위허위 외진 산길을 걸었을 것이다.

가산사는 현대의 차도로 따져도 보은읍에서 약 50리(20km), 옥천읍에서도 대략 50리 떨어진 궁벽한 산속에 자리잡고 있다. 당연히 인구 밀도가 낮고 교통과 수송 수단이 마땅하지 않았던 농경 시대에는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지도 않았다. 그만큼 이곳은 사람의 자취가 드문 오지였다. 그래서 단순 농꾼이었던 사람이 문득 의병에 들어 칼쓰는 법을 배우고, 도를 구하던 젊은 승려가 진법에 따라 움직이는 법을 터득하는 훈련장으로 쓰이기에는 오히려 적격이었다.

<문화사학>도 '임진왜란 직전까지만 해도 가산사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가산사가 위치한 지역이 병자호란 이후에야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할 정도로 오지였기 때문'이라면서 '그만큼 가산사가 위치한 지역은 오지였기 때문에 군사훈련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영규대사와 조헌 선생이 이 일대에서 임진왜란 승병과 의병을 일으키고, 또 훈련시킴으로써 가산사가 유명해졌다는 뜻이다.

깊고 외진 산중이기에 의병 훈련지로 적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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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사 영정각 안에서 보는 조헌 선생과 영규 승병장의 모습. 본래 영정은 일제 강점기 때 '왜놈'들이 없애버렸고, 지금 것은 그 모작이다. ⓒ 정만진


아니나 다를까, 가산사 들머리의 안내판은 스스로 임진왜란 당시의 승병과 의병 근거지였음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제 자랑 꼴불견'이라지만 우리나라 국민 어느 누구도 가산사의 자화자찬에 못마땅한 반응을 보이는 이는 없으리라. 외적의 침입 때마다 백성들이 분연히 일어나 떨쳐보인 창의 정신은 항몽(抗蒙) 이래 우리가 세계 만방에 자랑할 수 있는 유구한 민족 정신이기 때문이다.   

'옥천 가산사(佳山寺) 영정각(影幀閣) 및 산신각(山神閣)
충청북도 기념물 제115호
충북 옥천군 안내면 안내회남로 671

채운산(彩雲山) 기슭에 자리잡은 가산사는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절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지리지(地理誌)에, 가산암(佳山菴)이 오래 전에 없어진 작은 암자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어서 자세한 내력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기허당(騎虛堂) 영규(靈圭) 대사와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이 이곳에서 승군(僧軍)과 의병(義兵)을 일으켜 훈련하였다고 하여 호국도장(護國道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영규 대사와 조헌 선생은 힘을 합하여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 전투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 숨을 거두었다.

이에 가산사에서는 영정각을 짓고 영규 대사와 조헌 선생의 영정을 모셨는데, 일제 강점기에 영정은 없어지고 지금은 위패(位牌)만 모셔져 있다. 영정각 지붕 끝 기와에 새겨진 글로 보아 영정각은 조선 숙종 20년(1694)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의 형태는 정면 1칸, 측면 1칸,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木造) 기와집으로, 매우 작은 규모이지만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산신각은 산신탱화(山神幀畵)를 봉안하기 위한 집으로 영정각과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건축 용어 설명

용마루 : 지붕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
망와 : 지붕의 마루 끝에 세우는, 와당이 달린 암막새
와당(瓦當) : 기와 막새나 내림새 끝에 둥글게 모양을 낸 것
암막새 : 암키와가 쭉 이어져 형성된 기왓골의 끝에 드림새를 붙여 만든 기와
수막새 : 수키와가 쭉 이어져 형성된 기왓등의 끝에 드림새를 붙여 만든 기와
드림새 : 막새의 끝 부분. 초기에는 기와 끝을 조금 짓이겨 처져 내려오도록 하는 정도였으나 차츰 덧대어 각종 문양을 새기는 것으로 발전했다. 반원형, 타원형도 있으나 원형이 대부분이다.
암키와 : 지붕의 고랑이 되도록 젖혀 놓는 기와. 바닥에 깔 수 있게 크고 넓게 만듦.
수키와 : 두 암키와 사이를 엎어 잇는 기와. 속이 빈 원기둥을 세로로 반을 쪼갠 모양임.

안내판은 영정각이 1694년(숙종 20)에 지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거가 그 건물 지붕 끝 기와에 새겨진 글이라고 해설한다. 지붕부 용마루 끝에 올려져 있는 망와(望瓦)에 새겨져 있는 명문(銘文)이 건물의 역사를 증언하는 중요 단서가 된다는 설명이다. 처마 밑에 서서 그냥 쳐다보아서는 기와에 새겨진 글자를 읽을 수 없지만, 내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康熙三十三年  甲戌四月望日 施主金貴奉 化主安得信 別座雪岑 供養主戒明 近人安白雲 惠印 主導(강희 33년  갑술사월망일 시주김귀봉 화주안득신 별좌설잠 공양주계명 근인안백운 혜인 주도)'

1694년(숙종 20, 청 강희제 33, 갑술년) 4월에 김귀봉, 안득신, 설잠, 계명, 안백운, 혜인이 주도하여 영정각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건축 시기가 밝혀져 있는 이 망와는 조선 후기 목조 건축사를 연구하는 데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녔다. 그래서 영정각은 충청북도 기념물 115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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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각과 그 오른쪽의 산신각 ⓒ 정만진


가산사 영정각의 가장 특이한 점은 건물 정면으로 처마부를 앞으로 길게 빼낸 다음, 그 아래에 둥근 기둥들을 세워 두었다는 사실이다. 변주(邊柱)들 사이에 벽체는 없다. 물론 변주들과 건물 본체는 마루로 연결된다. 유가(儒家)의 재실(齋室) 형식이 사찰 안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영정각 우측 뒤편, 영정각과 극락전 사이에 있는 산신각도 영정각과 함께 충청북도 기념물 115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아주 작은 것이 특징인 듯 여겨지는 이 산신각은 사용된 나무 재료들의 상태와 짜여진 수법으로 보아 영정각과 같은 때에 건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내부에는 산신도(山神圖)가 걸려 있다.

가산사 산신각과 영정각에는 민중들의 마음이 담긴 실화가 전해진다. 1992년 누전으로 화재가 발생하여 극락전이 불에 타 무너지고, 극락전에 모셔져 있던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77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비롯한 많은 유물들도 소실되고 말았는데, 영정각과 산신각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그 이후 사람들은 영규 대사와 조헌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영정각을 보호하기 위해 채운산 산신이 영험한 신통력을 보여준 것이라고 믿고 있다.

큰불로 극락전과 불상 탔을 때에도 영정각은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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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사 구요사(舊寮舍) 앞의 고목 둥치에는 커다란 귀 모양의 구멍이 뜷려 있다. 가산사 신도들은 이 구멍을 세상의 소리를 듣는(觀音) 나무의 귀로 받아들인다. 나무는 나라에 큰일이 벌어지는 해에는 그 번잡한 소리를 미리 듣고 전체의 반쯤에 싹을 틔우지 않는데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가 벌어졌던 해에 새잎이 돋아나지 않았다고 했다. 올해도 약 반쯤의 나무에 잎이 나지 않아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몹시들 궁금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 정만진


그런데 가산사에는 놀라운 징험을 온몸으로 보여준 신물(神物)이 또 한 가지 있다. 이는 이 사찰에 머물면서 장편소설 <오국지>를 집필한 정수인 소설가에게서 들은 것이다. 영규 대사와 조헌 선생의 임진왜란 유적지인 가산사를 찾아 채운산에 들렀을 때, 여전히 사찰 경내에서 거주하고 있는 정 작가를 만났다.

새로 지은 종무소에서 볼 때 구요사(舊寮舍) 오른쪽에 있는 거대한 고목 뒤편으로 정 작가는 발걸음을 했다. 커다란 나무둥치 아래에서 정 작가는 사람의 머리보다 조금 위쪽을 가리켰다. 나무둥치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그 구멍은 신기하게도 완전히 사람 귀처럼 생긴 모양을 하고 있었다. 가산사 신도들은 이 구멍을 나무가 세상의 소리를 듣는 관음(觀音)의 귀로 여긴다고 했다. 관음의 귀 위에서부터는 두 줄기 큰 가지를 좌우로 뻗치고 있는 이 나무는 나라에 큰일이 벌어지는 해가 되면 그 번잡한 소리를 미리 들은 나머지 한쪽 가지에 싹을 틔우지 않는다고 했다. 최근의 경우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가 벌어졌던 2004년에 왼쪽 가지에 새잎이 돋아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상의 잡음을 듣는 귀 가진 가산사 고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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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사 산신각 ⓒ 정만진

정 작가는 "저기 보세요, 올해도 나무의 약 반쯤에 잎이 나지를 않아요, 가산사 신도들은 올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몹시들 궁금하게 여기고 있어요" 하고 말했다. 과연 나무는 두 줄기 큰 갈래 중 한쪽에만 잎을 틔운 채 서 있었다. 다른 한쪽 가지는 마치 말라죽기라도 한 듯이 까만 얼굴로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을 예고했다는 나무의 신통력을 들으니, 문득 이 나무가 임진왜란의 발발도 감지하고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사실 여부를 알 수가 없다. 가산사는 1675년(숙종 1) 조정에 의해 호국 사찰로 지정을 받으면서 영규 대사와 조헌 선생의 영정이 봉안되는 등 크게 중창되고, 1694년에 이르러서도 영정각이 중수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이래 조선총독부가 불온(不穩)사찰로 지목하면서 급격히 퇴락하고 말아 자료들이 송두리째 망실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일제는 임진왜란의 두 용장 영규 대사와 조헌 선생을 모시고 있는 가산사가 항일 운동의 기지로 활용될 가능성을 우려했고, 결국 두 분의 영정을 말살했을 뿐만 아니라 그 외 많은 유물들도 탈취했다. 게다가 줄곧 감시를 했다. 그 결과 차차 찾아오는 신도들이 줄었고 가산사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차차 잊혀져갔다.

그러나 이제 가산사는 조금씩 임진왜란 유적지다운 기상을 되찾아가고 있다. 극락전 중앙문 우측에 걸려 있는 '祖國統一 人類平和 祈願 道場(조국통일 인류평화 기원도장)' 현판과, 구요사 기둥에 부착되어 있는 '人類平和 祖國統一 推進 全國 在野 道敎人 聯合會 本部 道場(인류평화 조국통일 추진 전국 재야 도교인 연합회 본부 도장)' 편액이 어쩐지 그런 예감을 가지게 해준다. 나무의 반쪽에 새잎이 돋아나지 않은 것이 가산사 자체의 대단한 중흥을 예고하는 좋은 징조가 아닐까? 온 국민들이 앞을 다투듯이 정성으로 가산사를 찾아 임진왜란의 역사를 되새겨 보아야 할 텐데.....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영정각을 향해 허리 굽혀 절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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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각과 극락전이 보이는 풍경. 두 건물 사이에 있는 산신각은 영정각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 정만진


#가산사 #조헌 #영규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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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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