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악이 하늘까지" 악당 중의 악당 윤원형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사극 <옥중화> 두 번째 이야기

등록 2016.05.21 21:59수정 2016.05.21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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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옥중화>의 윤원형(정준호 분).
드라마 <옥중화>의 윤원형(정준호 분). MBC

윤원형이 악당 가운데 상악당이 된 이유


드라마 옥중화의 윤원형(정준호 분)은 어느 정도 탐욕스러운 이미지를 풍기고 있다. 누나인 문정왕후(명종의 어머니)의 후광에 힘입어 권세를 부리고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윤원형이 죽은 뒤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사관 즉 역사 기록자도 윤원형을 그렇게 평가했다. 음력으로 명종 20년 11월 18일자(양력 1565년 12월 10일자) <명종실록>을 편찬한 사관(史官)은 "이전 시대의 권력형 간신 중에서 윤원형만큼 죄악이 하늘까지 닿은 자는 없었다"는 논평을 달았다. 죄악이 하늘까지 닿았다! 악당 중에서도 상(上)악당이라는 평가다.

윤원형이 이런 평가를 받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런 이유 중에는 합당한 것도 있다. 반면에 어떤 이유들은 좀 납득하기 힘들다. 시대가 달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납득하기 힘든 이유들도 있다. 그중 하나가 이 글에서 소개된다. 

윤원형한테는 정난정이라는 첩이 있었다. 노비 출신 첩이었다. 아버지는 양반 관료이지만 어머니가 노비라서 그 자신도 노비가 된 사람이다. 과거에는 어머니의 혈통을 기준으로 개인 신분을 판정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일 수밖에 없었다.

정난정이 첩이었기 때문에, 정난정과 윤원형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첩의 자식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기 때문에, 이 아이들도 노비로 태어났다. 이런 아이들은 면천을 받고 양인(자유인)이 된다 해도 첩의 자식이란 멍에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첩의 자식은 상속에서도 차별을 받았고 결혼에서도 제약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과거시험 응시에서 제약을 받았다. 첩의 자식은 서얼이라고 했다. 서얼은 서자와 얼자의 총칭이다. 얼자는 어머니가 노비인 아이이고, 서자는 어머니가 노비가 아닌 아이다. 조선왕조에서는 이런 사람들의 과거시험 응시에 제약을 가했다.


과거시험에는 무과·문과·잡과가 있었다. 서얼들은 처음에는 아무 데도 응시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폭군 연산군 때인 1496년, 이들에게 잡과(기술직 시험) 응시의 기회가 주어졌다. 모든 서얼에게 기회를 준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차관급 이상인 서얼에게만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

이렇게 제한적으로 기회를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선비들 대다수가 서얼 차별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성리학을 배운 선비들은 정통과 진짜를 중시했다. 이들은 누가 가문의 정통 후예이고 진짜 후예인가를 중시했다. 이런 차원에서 적자(정실부인의 자녀)를 우대하고 서얼을 차별하는 정책을 지지한 것이다.


 조선시대 아동.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정약용) 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조선시대 아동.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정약용) 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선비들이 서얼들의 과거 응시 제한한 이유, 경쟁률 때문

선비들의 태도에는 사심도 깔려 있었다. 그들은 과거시험을 통과해야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대부분이 양반가 자제인 서얼들의 과거 응시를 제한하면 자신들의 합격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일반 농민이 첩을 두고 서얼을 낳는 경우는 드물었으므로, 서얼은 대개 다 양반가 자제였다. 대개 다 상류층 자녀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반인보다 교육을 많이 받았다. 이랬기 때문에, 동등한 기회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과거에 급제할 수 있었다.

이런 잠재적 경쟁자들의 과거 응시 기회를 빼앗는 것은, 양반 선비들 입장에서는 손해 될 게 없는 일이었다. 이런 점도, 선비들이 서얼 차별을 지지했던 동기 중 하나였다. 연산군이 서얼에 대한 차별을 '제한적으로' 철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런 점에 대한 고려에 기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연산군의 개혁 이후에도 서얼은 여전히 무과·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이런 상태가 윤원형이 살았던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윤원형의 서얼 자녀들은 기술직에는 응시할 수 있어도 무과나 문과에는 응시할 수 없었다.

윤원형의 자녀들은 서얼 중에서도 얼자였다. 서자보다 못한 얼자였던 것이다. 소설 <홍길동전>의 홍길동도 얼자였다.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었다. 이른바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홍길동의 심정은 윤원형 아이들의 가슴 속에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면천을 받기 전까지, 이 아이들은 법적으로는 노비였다. 이런 아이들은 "아버지!" 하고 자신 있게 부를 수 없었다.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아버지 앞에서 응석도 부릴 수 없었다. 또 무언가를 해달라고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말할 수도 없었다. 남들이 지켜볼 때는 특히 그랬다. 남들의 눈을 의식해서 아버지 앞에서는 노비처럼 굴어야 했다.

윤원형은 아이들의 이런 애환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꼈던 모양이다. 아내인 정난정이 그런 감정을 심어준 결과이기도 했지만, 윤원형 역시 아이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아내의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윤원형은 행동에 나섰다. 연민을 느끼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그는 명종시대의 실질적 통치자인 누나 문정왕후를 움직여 자기 아이들에 대한 차별이 철폐되도록 만들었다. 왕명에 의해 그 아이들이 특례를 적용받도록 한 것이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장 중 하나였던 성균관 비천당.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소재.
조선시대 과거 시험장 중 하나였던 성균관 비천당.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소재. 김종성

대다수 양반 아버지들은 현실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윤원형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기 아이들에 대한 차별을 없앤 그는 세상 모든 서얼들을 구제하기 위한 운동에 착수했다. 서얼에게도 무과·문과 응시의 기회를 제공하는 개혁을 추진한 것이다. 

윤원형의 행동은 서얼을 둔 다른 아버지들과 비교할 때 대단한 것이었다. 다른 양반 아버지들도 서얼 자녀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을 것이다. 자식이 자기 앞에서 노비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좋을 아버지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양반 아버지들은 현실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서얼 자녀가 불쌍하기는 하지만, 문제를 고치려고 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조선을 지배한 남자들은 대개 다 양반가에서 적자로 태어났다. 이들 중 상당수는 서얼 형제들이 차별을 받는 것을 보면서 성장했다. 서얼에 대한 차별을 전제로 살면서, 공부하고 출세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서얼 차별이 없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 기득권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자기의 서얼이 겪는 애환을 불쌍히 여기면서도 문제를 개혁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윤원형은 자신이 정권 실세가 된 점을 활용해서 개혁에 나섰다. 이 개혁은 당연히 엄청난 반발에 직면했다. 재야 선비들뿐 아니라 정부 신하들의 대부분도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소수의 신하들만 찬성했을 뿐이다. 하지만, 윤원형은 문정왕후를 움직이고 명종을 움직일 수 있는 위치를 활용해 개혁을 성사시켰다. 이때가 명종 재위 8년인 1553년이다.

엄청난 반발에 부딪히며 통과된 개혁이라, 100% 만족스러운 개혁이 될 수는 없었다. 반대파의 정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개혁은, 서얼의 손자 또는 증손자 때부터 무과 및 문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서얼 본인은 여전히 응시할 수 없도록 하되, 서자의 경우는 손자 때부터, 얼자의 경우는 증손자 때부터 응시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도 조건이 있었다. 서얼이 양인 여성과 혼인한 경우에만 손자 또는 증손자 때부터 응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누더기 개혁이라는 느낌이 드는 개혁이다.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은 반대파의 목소리를 완전히 제압할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윤원형의 개혁은 서얼들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하고 감사할 만한 일이지만, 대다수가 양반가의 적자 출신인 선비들한테는 정반대 일이었다. 이들한테는 윤원형이 악당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비들은 윤원형을 욕하고 깎아내렸다. 위에서 소개한 <명종실록>의 사관은 윤원형이 개혁을 추진한 동기를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자기 첩이 낳은 자식들을 모두 다 사대부 가문과 결혼시켰다. 자기가 죽은 뒤에라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을까봐, 첩의 자식도 벼슬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밀어붙였다."

선비들 입장에서는 첩의 자식이 양반가의 자식과 결혼하는 것은 사회악이었다. 그런 사회악을 범한 윤원형이 자신의 죄악을 감추고자 서얼 문제 개혁을 추진했다는 게 사관의 주장이다. 그런 다음에 사관은 이런 말도 덧붙였다.

"그 외에도 (윤원형의) 흉악한 죄들은 머리털을 뽑아 헤아린다 해도 다 셀 수 없다."

서얼들에게 과거 응시의 기회를 제공한 것도 '흉악한 죄'에 포함된다. 이 정도로 당시 선비들은 윤원형이 과거시험 경쟁률을 높인 것에 대해 분개했다. 이것은 윤원형이 사후에 악당이란 평가를 받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옥중화 #서얼 #윤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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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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