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왕후의 무덤인 태릉.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김종성
인종이 죽자 명종이 왕이 됐다. 이때 명종은 열두 살이었다. 나라를 직접 통치하기에는 적은 나이였다. 그래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의 권한을 얻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아들이 스무 살이 된 1553년까지 수렴청정의 권한을 보유했다.
하지만 1553년 이후로도 문정왕후의 통치는 끝나지 않았다. 수렴청정이 끝났지만, 문정왕후는 '아직 안 끝났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권력을 행사했다. 임금인 명종을 무시하고 자신이 실질적인 임금 역할을 했던 것이다. 수렴청정 이후에도 문정왕후가 권력욕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은 친동생 윤원형과 친척들을 비롯한 친위세력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문정왕후 본인이 권력을 행사하고 싶다고 해서, 또 친위세력이 버티고 있다고 해서 권력을 무한정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합법적인 임금인 아들이 "앞으로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면서 어머니에게 맞서는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성년이 된 아들을 마음대로 다루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것도 아들이 보통 아들이 아니라 임금 아들이라면, 더욱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문정왕후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문정왕후는 아들을 계속해서 허수아비로 만들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그 조치의 내용이 위의 <명종실록>에 소개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문정왕후와 명종 사이에 아래와 같은 일이 많았다고 한다.
"자기 입으로 '왕을 세운 공로가 내게 있다'고 말하고, 이따금 임금에게 '내가 없었다면, 네가 무슨 수로 이렇게 됐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명종에게) 함부로 호통을 치니, 마치 민가의 팔팔한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는 것 같았다."일국의 왕인 자기 아들을 야단치고 꾸짖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통해 아들을 자기 그늘에 묶어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문정왕후는 명종을 무력화시키고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명종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머니가 권력욕이 강했으니, 아들도 어느 정도는 그랬을 것이다. 명종도 자기 권력을 찾기 위해 어머니에게 맞섰다. 어머니의 호통을 들으면서도, 틈만 나면 독자노선을 모색했다. 대표적 사례는 처가의 일원인 이량을 중용해서 어머니 쪽을 견제하고자 한 것이다. 처가를 앞세워 외가를 견제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하지만, 명종의 시도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545년에 왕이 된 명종은 1565년까지도 실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왕이 된 후로 20년 동안 허수아비로 살았다. 어머니에 맞서 끊임없이 독자노선을 모색했지만, 어머니한테 계속 밀린 탓에 허수아비처럼 지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명종한테 최대 정적은 왕권을 위협하는 귀족이 아니라 어머니일 수밖에 없었다.
흔히들 "권력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도 나눌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이치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문정왕후와 명종처럼 정치권력이 매개된 모자관계인 경우에는 '권력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서도 나눌 수 없다'는 말이 통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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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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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허수아비로... 아들 발목 잡은 지독한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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