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인데, 왜 하필 지금 여행을 하냐고?

[사진책 읽기] 슬구 <우물밖 여고생>

등록 2016.05.26 11:30수정 2016.05.26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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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 앉은 학생은 모두 비슷하거나 똑같아 보입니다. 줄을 맞춰서 앉고 똑같은 옷차림에 엇비슷한 머리 모습인 아이들은 '아이'가 아닌 '학생'이라는 이름이 붙으면서 '이름'이 아닌 '숫자'로 불리기 마련입니다. 더군다나 학생으로서 학교에 가서 교실에 들어서면 모두 똑같은 교과서를 펼치지요. 다 다른 숨결로 태어나서 다 다른 생각으로 살아온 아이들이지만 '학생이 할 일은 시험공부'라는 틀로 나아갈 수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열일곱 살이나 열여덟 살에 '학생'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학생이 아닌 '내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까요? 스무 살 나이가 될 무렵에는 똑같이 짜맞춘 틀에서 벗어날 틈이 생길까요? '평범한 학생'이라는 이름을 내려놓고서 '나다운 숨결'이나 '나답게 새로운 꿈'으로 나아가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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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 푸른향기

(학교에서) 인정결석 처리를 해 줄 수가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 말은 꼼짝없이 무단결석 처리를 받는다는 거였다. 결석 자체가 생활기록부에 주는 영향이 무척 크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과연 그걸 감내하면서까지 일본을 가야 할까 하고 며칠을 고민했다. (18쪽)

첫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는 인천 행 비행기 안에서 든 생각은 하나였다. "난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42쪽)

1998년 5월에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나 줄곧 이 고장에서 살았다고 하는 슬구(신슬기) 님은 2016년에 고등학교 3학년이라고 합니다.

'평범한 학생' 테두리에서 보자면 '입시생'이나 '고3 수험생'이라 할 테지만, 슬구 님은 두 가지 이름에다가 다른 이름을 스스로 지어서 붙입니다. 바로 "우물밖 여고생"입니다.

"우물밖 여고생"은 그동안 우물에 스스로 갇혀서 지낸 줄 알아차린 여고생입니다. 그동안 우물에 스스로 얽매인 채 지낸 줄 몰랐으나, 이제는 우물밖이라고 하는 너른 삶터가 있는 줄 알아낸 여고생입니다. 우물에 머무는 삶이 아니라, 새로운 우물을 찾아나서는 삶이라든지 우물이 아닌 냇물이나 골짝물이나 샘물이나 바닷물을 찾아나서면서 꿈을 키우려는 여고생입니다.


이번만큼은 내 감정에 충실한 여행을 해 보는 거야. 살면서 맘만 먹으면 올 수 있는 게 제주 아니겠어? 일생에 한 번뿐인 여행도 아니니 너무 조급해 하지 말자. (64쪽)

끝내 별똥별은 보지 못했지만 괜찮다. 그보다 더 멋진 별과 달을 만났고, 그날의 바람과 공기를 느꼈고, 묘한 밤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으니까. 이거면 됐다.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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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 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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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얼굴 ⓒ 슬구


"우물밖 여고생"은 열일곱 살에 처음으로 알바를 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고스란히 하면서 일삯을 받는 일이 얼마나 '안 만만한가'를 이때에 처음으로 온몸으로 느꼈다고 해요. 만 원도 천 원도 아닌, 이른바 백 원이나 십 원조차 거저로 나한테 오지 않는 줄 뼛속 깊이 느꼈다고 합니다.

"열일곱 우물안 여고생"은 학교를 다니면서 꾸준히 알바를 했고, 차츰 일삯이 모여서 제법 목돈이 되었다고 해요.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알바를 했달 수 있는데, 시나브로 한 가지 생각이 꿈처럼 떠올랐다고 해요. 첫 생각은 "내 사진기 장만하기"였고, 이 다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여행 나서기"였다고 합니다.

사진기를 장만해서 여행에 나서려는 생각은 '어머니하고 일본 여행'이었다는데, 어머니는 갑자기 함께 갈 수 없는 일이 생겼다고 털어놓았답니다. 이때에 슬구 님은 '스스로' 생각하지요. 비행기표나 숙소 예매를 모두 취소하느냐, 아니면 혼자서 씩씩하게 떠나느냐. 이 갈림길에서 혼자 여행길에 나서기로 했고, 첫 걸음마처럼 첫 '나 홀로 여행'을 마치면서 "우물밖 여고생"으로 거듭나는 길에 섰다고 합니다.

<우물밖 여고생>(푸른향기, 2016)이라고 하는 사진수필책은 이렇게 태어납니다. 천천히 껍질을 깨듯이 찬찬히 우물밖 너른 터를 돌아보려고 하는 작은 눈길이 꿈길로 거듭나는 사이에 태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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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시야마 벚꽃 ⓒ 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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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 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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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대 ⓒ 슬구


하루에 몇 대 없는 버스를 놓쳐 두 시간을 길거리에서 보내야 하더라도 네가 화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82쪽)

왜 하필 지금 여행을 하냐고 물으면, 너는 왜 지금 여행을 하지 않느냐고 되묻고 싶다. (120쪽)

사회에서는 흔히 말하기를 '학생은 공부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다만,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대목에서는 '어떤 공부'를 하면 되는가까지 건드리지는 않아요. 학교에 가서 교실에 들어가야만 '공부'라고 여기곤 하지만, 공부는 학교에서만 할 수 있지 않습니다.

<우물밖 여고생>을 쓴 슬구 님은 알바를 하는 동안 '알바를 하는 곳'에서 사회와 경제와 노동을 배웠습니다(공부했습니다). 알바를 해서 얻은 돈을 푼푼이 모아서 사진기를 장만하는 동안 기쁨이나 보람이나 즐거움이나 선물이 무엇인가를 배웠어요. 어머니하고 일본 여행을 다녀오려는 꿈은 스러졌지만, 나 홀로 여행을 다녀오면서 '곁에 다른 사람이 없어'도 혼자서 하나부터 열까지 척척 살펴서 갈무리하는 살림을 배웠어요.

여행길에서 새로운 이웃하고 동무를 배웁니다. 나고 자란 곳에서만 바라보던 삶터가 아닌, 드넓은 새로운 삶터를 배웁니다. '시흥에서 보는 하늘'을 넘어서 '제주에서 보는 하늘'이나 '경주에서 보는 하늘'이나 '일본에서 보는 하늘'을 새삼스레 배워요.

하나씩 새롭게 배우는 동안 하나씩 새롭게 사진으로 빚습니다. 천천히 새롭게 마주하는 삶과 사람과 사랑을 천천히 새롭게 사진으로 옮깁니다. 누구한테서 배운 사진이 아니라, 스스로 새롭게 배우면서 찍는 사진입니다. 누구한테서 배운 글이 아니라, 스스로 새롭게 배우면서 쓰는 글입니다.

남한테 예쁘게 보여주려고 하는 사진이나 글이 아닌, 스스로 새롭게 배우는 기쁨과 보람과 즐거움과 땀방울을 담는 사진이나 글입니다. 멋스럽게 선보이려고 하는 사진이나 글이 아닌, 스스로 즐겁게 맞이하는 하루를 그저 즐거운 마음이 되어 엮는 사진이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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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 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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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풀 ⓒ 슬구


추운 날씨 탓에 나뭇잎들이 얼어서 걸을 때마다 바스락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좋았다. 나뭇가지가 부서지는 소리는 특히 더. 그래서 나는 풀숲만 찾아 걸었다. (152쪽)

<우물밖 여고생>은 우물밖으로 내디딘 첫걸음을 보여줍니다. 이 나라 '평범한 학생'이 서로 엇비슷하거나 똑같지 않다는 목소리를, 마음 속에서 흐르는 목소리를, 교과서나 책에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스스로 온누리를 차근차근 디디고 밟고 서면서 느끼는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앞으로는 너른 바닷물 같은 목소리가 되고 싶은 꿈을 보여주고, 쉬잖고 솟는 샘물 같은 목소리로 살려고 하는 몸짓을 보여줍니다. 들을 적시는 냇물 같은 목소리로 자라는 숨결을 보여주고, 구수하게 끓는 밥물 같은 기운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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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본 것 ⓒ 슬구


삶에 여유가 있기 때문에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기 때문에 삶이 여유로운 것이다. (159쪽)

우물 밖으로 첫걸음을 내디딘 슬구 님은 이제 '생활기록부 성적이나 숫자'에서 조금은 홀가분할까요? 생활기록부에 '무단결석'이라는 글씨가 찍히더라도 이러한 굴레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을까요? 또는 우리 사회나 학교에서 '나 홀로 드넓은 온누리를 배우려는 여행'을 하겠다는 '평범한 학생'한테 '삶 공부(체험학습)'를 하는구나 하고 받아들이도록 제도나 규칙이 바뀔 수 있을까요?

사진기·세발이·연필·책을 벗으로 삼아서 나서는 고즈넉한 마실길은 슬구 님이 <우물밖 여고생>에서 밝히듯이 스스로 넉넉해지려고(여유로워지려고) 나서는 새로운 길입니다. 돈이 넉넉해서 나서는 여행이 아닌, 마음을 넉넉하게 가꾸려는 꿈을 사랑스레 품기 때문에 나설 수 있는 새로운 길이지 싶습니다. 이리하여 <우물밖 여고생>에 깃든 사진이나 글은 풋풋하면서 차분한 그림이 됩니다. 이제 막 너른 터를 맛본 풋풋함이요, 이 너른 터에 흐르는 바람을 듬뿍 마시는 차분함입니다.

기쁜 열여덟을 기쁜 몸짓으로 맞이하면서 적바림한 사진과 글이, 기쁜 열아홉에도, 기쁜 스물다섯에도, 기쁜 서른 마흔 쉰에도, 오월바람 같은 따사로운 이야기꽃으로 늘 새롭게 깨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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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 ⓒ 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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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숲 ⓒ 슬구


덧붙이는 글 <우물밖 여고생>(슬구 사진·글 / 푸른향기 펴냄 / 2016.5.12. / 14000원)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yes24.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우물 밖 여고생

슬구 글.사진,
푸른향기, 2016


#우물밖 여고생 #사진책 #사진비평 #여고생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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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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