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교 4학년 때 자치기구 회장을 맡았었다. 총학생회, 학생복지위원회, 총여학생회, 대의원회, 동아리연합회, 각 단과대 회장까지만 들어가는 중앙운영위원회(중운위)의 멤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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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교 4학년 때 자치기구 회장을 맡았었다. 총학생회, 학생복지위원회, 총여학생회, 대의원회, 동아리연합회, 각 단과대 회장까지만 들어가는 중앙운영위원회(중운위)의 멤버였다. 각과 학생회장까지 포함하는 운영위원회(운영위)는 꽤 큰 규모였기에 중요한 결정사항들은 중운위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리고 나라 전체가 그렇듯이 대학의 정치 현장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남성 중심적이다. 남학생들은 3, 4학년이 되면 여학생보다 학번이 높고, 학교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여학생이 많은 학과나 학부, 단과대라 하더라도 학생회장은 남자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 '남자 회장-여자 부회장'의 구도는 정말 질릴 정도로 많다.
중운위 멤버는 나를 포함해 여학생은 서너 명밖에 되지 않고, 대부분 남학생들었는데 학교에서도 입김이 세기로 유명한 공대에서 총학생회, 학생복지위원회, 대의원회, 동아리 연합회 회장과 부회장을 거의 다 맡아가다시피 했다. 그 시절 여대를 빼고 다른 학교들도 다들 비슷한 분위기였을 것으로 안다.
신입생 OT라는 큰 행사를 마치고 난 시점이었다. 총학생회의 잘못된 운영으로 많은 학생이 불만을 제기했고, 특히 회장단의 저항이 거셌다. 나를 비롯한 중운위 위원들은 이에 대해 총학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로 했다.
겨울방학과 새 학기 초는 자치단체장과 총학의 힘겨루기가 심한 시기다. 이때 힘의 우위를 확보하지 않으면 일 년 내내 한 쪽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학 정치지만 실제 정치판과 다를 게 별로 없다. 단과대 학생회장들은 각과 회장들의 불만사항들을 접수하고, 정리했다.
나는 여학생이었지만 학번 높은 남자 회장들 사이에서 절대로 밀리지 않는 나름 '깡'이 있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도 역할이 주어졌다. 몇몇 회장들이 먼저 의견을 제시하면 '논리적이고 침착한 태도로 조목조목 잘못을 따져 최종 정리하는 것'이 내 임무였다. 그렇게 회장단과 역할을 나누고 의기투합한 후 흩어졌다.
그런데 며칠 뒤 운영위 회의를 하는데 회의가 끝나갈 때까지 아무도 그 안건을 꺼내지 않는 것이다. 총학이 준비한 안건들을 다 처리하고 다른 안건 있으십니까? 건의사항 있으십니까? 하는데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고개 숙이고 뭘 메모하는 척하면서 입 다물고 있던 것이다. 눈치를 살피던 나는 총학생회장이 '그럼 이것으로서 운영위를 마치겠...'하는 순간에 손을 번쩍 들고 '저 의견 있습니다' 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중운위 멤버들의 표정들이란.
서너 명 정도가 돌아가며 하기로 했던 이야기를 결국 나 혼자 다 해버렸다. 문제점을 일일이 다 언급하고 정리한 후에, '이 문제에 대해 운영위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총학생회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합니다!'라고. 총학생회장은 얼굴이 빨개졌고, 각과 회장들은 웅성웅성하고, 중운위 회장들은 계속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총학생회장은 어쩔 수 없이 심기가 매우 불편한 얼굴로 변명 섞인 사과를 했다.
나중에서야 그 회의가 있기 며칠 전에 나와 다른 한두 명의 여학생을 빼고 남자 회장들끼리 룸살롱인지 나이트 룸인지를 가서 양주 마시고 놀면서 자기들끼리 화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총학이 술을 사고, 다른 중운위 위원들은 그걸 얻어먹었으며 남자들끼리 '룸 정치'를 한 것이다.
공적인 자리에서 해결할 문제를 매우 사적인 공간에서 남자들끼리, 그것도 학교 정치에서 권력의 상층부에 있는 남자들끼리 해결했다. 그들은 군필자 복학생들이었고, 공대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공대생이 아니어도 룸살롱과 양주면 얼마든지 뭉칠 수 있는 '남자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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