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회] 호기롭게 2대1 대결... "말을 내놔라"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66회]

등록 2016.06.27 12:17수정 2016.06.27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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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쯤 가다보니 말발굽 소리가 계곡을 울려 퍼졌다. 무영객이 귀를 기울이니 산길로 들어오는 소리다. 그는 말이 필요했다. 둘 혹은 셋. 한 명이면 기습이 낫겠지만 둘 이상이면 길을 막고 정면 승부하는 게 낫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숫자가 많고 상대가 혼자라면 피해가지 않고 시비를 가리려 한다. 게다가 혼자서 길을 막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여기다 강호인이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무영객은 길 한가운데를 가로막고는 허리에 찬 협봉도를 꺼내 왼손에 들었다. 

말발굽 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들리는 걸로 보아 기마술을 익힌 것 같았다. 곧이어 굽이를 돌아 말 탄 자들이 나타났다. 소매를 묶고 각반을 찬 무복 차림에 왼쪽 가슴에 '비(飛)'가 새겨져 있고 그 둘레로 두 개의 원이 그려져 있다. 이들이 연신 '이랴' 하면서 채찍질을 하자 말 뒤로 흙먼지가 자욱이 일었다.


앞서 달리던 자가 무영객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급히 고삐를 죄었다. 말이 놀라 비명을 지르자 뒤처져 따라오던 말도 제풀에 놀라 '히이이잉' 하고 마성(馬聲)을 지르며 급히 서고는 제자리에서 원을 그렸다. 깊은 산중 길 한가운데 누군가가 길을 막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그들였다. 게다가 길을 막은 사람이 손에 검까지 쥐고 있으니 부아가 한껏 치솟았다.

"웬놈이냐. 죽고 싶어 환장했느냐, 달리는 말 앞에 서다니!"

고함을 친 자는 많아야 20대 후반인 젊은 사내였다. 뒤에 있는 자는 그보다 더 몇 살 아래로 보였다.

"말을 내놓아라."

무영객은 아무런 설명 없이 용건부터 밝혔다.


"뭐야 이건.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대뜸 남이 탄 말부터 내놓으라니. 넌 도적놈이냐?"

앞 선 자가 다시 고함을 질렀다.


"두 번 묻지 않겠다. 말을 내놓아라."

무영객을 말을 끝냄과 동시에 잡고 있던 협봉도를 천천히 뽑았다.

두 사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고는 실소를 터뜨렸다. 이어 뒤에 있던 청년이 무영객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너는 이분이 누군 줄 아느냐? 비룡문의 곽충 대협이시다. 추일도영(追一刀影)이라는 외호로 더 유명하신 분이다."
"…."

이 애송이들도 강호밥을 먹었다고 통성명부터 하려고 든다. 이 지역에서 비룡문이 제법 위세를 떨치는가 본데, 그따위 허명(虛名)으로 상대에게 유세부터 하려고 드는 자치고 제대로 된 자 드물다. 하물며 패기와 힘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애송이들한테야 무얼 더 대꾸하랴. 무영객은 말로서 상대의 기를 죽이려는 자를 가장 경멸한다. 그는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무영객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두 청년은 또 한 번 서로를 마주보더니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말이 도망가지 않게 고삐를 길가의 나뭇가지에 매어놓았다. 이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어깨를 기울여 등에 맨 검을 뽑았다. 말이 통할 것 같진 않은 자라고 판단했음이다.

"형님,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뒤에 있던 청년이 곽충을 향해 말했다.

"민아, 시간이 촉박하다. 내가 빨리 해치우마."

곽충이 민이라는 청년을 향해 말하고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무영객이 검을 들어 곽충을 가리키고는 이어 그 뒤에 있는 민이라는 청년도 가리켰다. 둘 다 한꺼번에 덤비라는 의미다.

"이런, 싸가지 없는 작자 같으니…."

한꺼번에 둘 다 대적하겠다는 상대의 의사에 격분한 곽충이 석 자 길이의 장검을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며 돌진했다. 그러나 기세만 몰아쳤지 실속 없는 휘두름이었다. 공격 방향이 상하좌우 골고루 퍼져있긴 하지만 너무 고른 나머지 강약이 없다. 집단끼리 맞붙는 진법이든 개인과 개인이 대결하는 검술이든 타격의 강약과 고저가 있어야 한다. 꽉 찬 집중과 비어 있는 속임수가 다양하게 전개되어야 한다. 다양하면 상대가 예측할 수 없다. 예측을 못하면 당황하기 마련이고, 당황하면 틈이 보인다. 결국 대결이란 상대의 틈을 노리거나 틈을 만드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무영객이 곽충의 검식 몇 초를 피하면서 한 생각이다. 따지고 보면 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곽충의 검끝에서 한 치 만 벗어난 채 그가 들어오면 뒤로 물러나고 그가 물러나면 따라가 한 치의 거리만 유지했다. 그 상태가 계속되면 상대는 제풀에 당황하게 된다. 눈앞에 잡힐 듯 서 있던 상대가 갑자기 허깨비처럼 보이는 것이다.

곽충은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후배 앞에서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에 흥분한 나머지 첫 초식부터 비룡문의 절기를 펼쳤다. 비선팔무(飛仙八舞)의 제1식 제형무신(劑形無身)을 전개한 것이다. 제형무신은 형상을 파괴하고 신형을 가늠할 수조차 없도록 폭풍처럼 몰아가는 게 특징이다. 무엇보다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날렵한 신형이 몸에 익어야 한다.

그런데 상대는 자신의 검 끝에 매달린 것처럼 그의 검이 나아가면 나간만큼, 거둬들이면 들인만큼 똑 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마치 자신은 허공을 베고 그 자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 있던 것처럼. '으음,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군.' 곽충은 속으로 되씹었다.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며 잠깐의 시간이 주어지자 민이라는 청년이 무영객의 뒤를 차단했다.

무영객은 이제 앞뒤에서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끝내는 게 피차 간에 나을 것이다. 그는 협봉도를 가벼이 쥐고 손목 위로 빙그르르 한바퀴 돌렸다. 그리고는 낮은 자세로 곽충의 허리께로 칼끝을 향했다. 이 자가 먼저 들어올 것이다. 이 자의 검을 피하며 틈을 보이면 뒤에 있는 자가 달려들겠지. 그때 승부가 갈려질 것이다.

그의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곽충이 '차압!' 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박차 올랐다. 무영객이 낮은 자세를 취하자 위에서 공격하기 좋은 제4식 제식초무(劑式超舞)를 펼친 것이다. 번개가 치듯 우박이 내리듯 위에서 검날이 위에서 쏟아졌다. '챙, 챙, 챙', 악기가 내는 음처럼 청아한 소리가 숲속에 울렸다. 무영객이 칼등으로 몇 개의 검을 막아낸 것이다.

이 틈을 타 뒤에 있던 민이 무영객의 등을 향해 일검을 취했다. 민은 자신이 펼친 회심의 일격에 기대가 컸다. 그는 벌판처럼 너른 등을 보았고 상대는 위에서 쏟아지는 검을 막아내기에 바빠 뒤를 방비할 새가 없었다. 이때다! 싶어, 별다른 초식을 전개할 것도 없이 검술의 기본 동작이자 가장 강력한 공격인 찌르기를 택한 것이다.

그는 성공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왜 당한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자신의 공격이 왜 성공하지 못한 것인가를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미처 다하기도 전에 그의 의식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왜, 나의 일검이 성공하지 못했을까…. 왜….

무영객은 일부러 등을 보여 뒤에 있는 상대를 유도한 다음 순식간에 등을 활처럼 휘어 칼날을 적의 심장에 향했다. 청년은 달려오던 관성으로 무영객의 칼날을 고스란히 자기 심장에 박아넣고 말았다. 

단 한 수에 동료가 쓰러지는 걸 보자 곽충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앞에 있는 자가 자신보다 고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곽충은 이성을 찾자 짧은 순간이지만 생각에 잠겼다. 검은 눈앞의 사내를 겨누고 있지만 마음은 딴 곳으로 달려갔다.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곳은 비룡표국. 급한 임무를 띠고 가는 길이다.

어제 총관사가 자신을 부르더니 장문인 어르신에게 전해야 할 급한 전갈이 있으니 촌각을 다투어 운부산에 가라고 했다. 만약을 위해 솜씨가 괜찮은 표사 한 명과 같이 동행하라고 했다. 전달할 내용은 간단했다. 은화사와 금의위가 운부산 산장으로 가니 부디 조심하시길 바란다고 했다. 거기에 한마디 덧붙여 못난 소인을 부디 용서해 달라는 말도 같이 전해달라고 했다.

곽충은 총관사의 얼굴에 드리워진 먹구름이 너무 어두워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한시라도 급한 것 같아 동행할 비룡문 후기지수 정민(鄭慜)을 찾으러 나섰다. 정민은 표행이 끝난 후의 노고를 풀기 위해 술을 마시고 있을 것이다. 곽충이 주루에서 잔을 꺾고 있는 정민의 목덜미를 잡고 표국으로 왔을 때 얼굴이 노래진 하인이 후원에서 뛰쳐나왔다.

초, 총관사께서…. 말을 잇지 못하는 하인을 보고 곽충이 후원으로 달려갔다. 총관사 금택영은 구연정의 기둥에 목을 매고 숨져 있었다. 뭔가 깊은 사연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곽충은 유언과 다름없는 총관사의 마지막 말을 전하기 위해 뒤처리도 미룬 채 정민과 함께 운부산 산장으로 가던 길이었다. 
덧붙이는 글 월, 수, 금요일, 주 3회 연재합니다.
#PERD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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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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