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위권 학생 위한 '불편한' 배려

[아이들은 나의 스승 76] '학종'이 가져온 학교 풍경, 다다익선 경시대회

등록 2016.07.07 16:53수정 2016.07.07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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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중·고등학생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가 실시된 지난 6월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배화여고에서 고2 학생들이 문제를 풀고 있다. ⓒ 연합뉴스


정기적인 월말 고사에다, 심지어 과목에 따라 주초 고사·주말 고사까지 치러야 했던 내 학창시절에 비하면 많다고 할 순 없지만, 요즘 아이들도 시험이 너무 잦다고 하소연한다. 채 다섯 달도 안 되는 한 학기에 중간고사와 서술형 시험·기말고사가 있고, 전국의 모든 학교와 학원에서 동시에 치러지는 연합고사도 봐야 한다. 게다가 특정 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한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까지…. 이름도 종류도 참 다양하다.

얼추 한 달에 한 번 꼴이다. 그나마 전국 연합고사와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는 하루에 다 끝나지만, 내신 성적에 반영되는 학교 시험들은 과목이 많은 까닭에 짧게는 이틀에서 길게는 사나흘에 걸쳐 치러진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한 주가 통째로 시험에 할애된다. 바짝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앞 주와, 다소 긴장이 풀어진 상태로 점수를 확인하게 되는 시험 뒤 한 주는 진도를 나가는 데 애를 먹게 만든다.

물론, 시험이 치러지는 동안도 엄연히 수업일수에는 포함되지만, 단위수가 적은 과목의 경우에는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지난 5월처럼 연휴가 긴데다 소풍과 체육대회 등 행사가 몰려 있는 경우라면, 수업시간 아이들과의 오랜만의 만남이 어색할 만큼 공백이 커지게 된다. 내 과목의 경우 학기 초 블록타임으로 두 시간을 묶어 수업을 설계한 통에, 어느 학급은 딱 한 번 수업하고 5월 한 달을 마감해야 했다.

우후죽순 난립한 경시대회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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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영수 경시대회는 기본, 교과별 보고서 경진대회, 과학탐구 토론대회... 하나하나 거론하는 것조차 숨이 차다. ⓒ pixabay


그런데, 숱한 시험 말고도 수업시간 마음을 콩밭에 가도록 만드는 게 또 하나 있다. 바로 이름도 다 외우지 못할 만큼 다양한, 학년별·교과별 경시대회가 바로 그것이다. 학교생활기록부에 공식적으로 기재할 수 있는 '스펙'이다 보니 몇 해 전부터 학교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교육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교외의 수상 내역 기재가 금지된 이후 일선 학교마다 유행처럼 번진 '신종' 교육과정이다.

국·영·수 경시대회는 기본이고, 교과별 보고서 경진대회, 과학탐구 토론대회, 수리 논술대회, 독서 토론대회, 영어 말하기 대회, 영어 쓰기 대회, 진로탐색 포트폴리오 경진대회, 토론 논술 캠프 등 일일이 거론하는 것조차 숨이 차다. 더욱이 대개 학기마다 한 번씩 치러지는 게 보통이라 조금 과장하자면, 거의 매주 경시대회가 잡혀있다고 보면 된다. 성격이 비슷한 것들도 많아 아이들은 물론, 교사들조차 정확한 명칭을 헛갈려한다.

이는 특정 학교만의 '과욕'이 아니라, '학교생활기록부 종합전형'(학종)의 확산이 가져온 전국 인문계 고등학교의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숫제 '다다익선'이라는 인식이 학교마다 팽배해있는 듯하다. 어차피 학교생활기록부 내용이 풍성해지려면 '꺼리'를 만들어야 하고, 교외 활동을 기재할 수 없다고 하니 '꿩 대신 닭'으로 부랴부랴 고안한 것이다. 그런 탓에 나름의 전통을 자랑하는 일부 대회를 제외하면 급조한 티가 역력하다.


경시대회를 그간의 수업 내용을 스스로 심화학습하고 평가해보는 기회라고 보면, 빈도가 잦고 종류가 많다고 해서 몽니부릴 일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대회에 참가하는 학생들이 소수인데다 대개 겹치기로 나간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문과와 이과의 최상위권 학생들이 동일 계열의 경시대회를 독식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특정 학생의 중복 참가가 가능하도록 학교가 실시 날짜와 시간을 조정하는 해프닝마저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학교마다 각양각색의 교내 경시대회가 만들어지는 진짜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학종이 대세로 자리 잡은 시대에, 오로지 최상위권 학생들의 명문대 진학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학교의 '자상한 배려'인 셈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그렇듯 학종은 학교마다 아이들의 계량화된 점수에 비례해 학교생활기록부의 양과 질을 '양극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100명의 아이들 위한 시간을 최상위권 1명을 위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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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중·고등학생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가 실시된 지난 6월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배화여고에서 고2 학생이 쉬는시간에 잠시 잠을 청하고 있다. ⓒ 연합뉴스


물론, 일부에서는 명문대 진학률에 목 매달 수밖에 없는 학교와 경시대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려는 최상위권 아이들을 탓할 수 없다는 반론도 없지 않다. 참가 자격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데다 아무리 독려해도 애초 관심을 보이지 않는 다수의 아이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영어 잘하는 아이가 수학도, 국어도, 과학도, 역사도, 심지어 운동도, 노래도 잘하는 현실이니 그들의 지적에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당장 수많은 경시대회를 '그들만의 리그'로 여기며 소 닭 보듯 하는 대부분의 아이들의 해묵은 자괴감은 그렇다 치자. '심화반'이다 뭐다 해서 교내에서조차 성적순으로 아이들을 끊임없이 서열화하려는 뿌리 깊은 관행이 이어져오는 마당이니, 이젠 그 정도에 상처받을 아이들도 아니다. 성적에 따라, 경제력에 따라 비슷한 아이들끼리 친구로 엮이는 모습이 어디 어제오늘의 일인가.

더 큰 문제는 교사들이 정작 수업보다 온갖 경시대회 준비에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아이들이 함께하는 프로그램이라면 모를까, 몇몇 최상위권 아이들을 위한 '잔치'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교사는 전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 준비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한 동료교사는 이를 두고 "100명의 아이들을 위한 시간을 고스란히 최상위권 1명을 위해 쓰고 있는 셈"이라며 씁쓸해했다.

소수만을 위한 시험은 시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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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경시대회, 누구를 위한 시험일까. ⓒ pixabay


판사는 판결로 말하고, 교사는 수업으로 말해야 한다. 아이들과의 만남, 곧 수업이야말로 교사의 존재 이유라는 뜻이다. 교사들마다 별도로 주어지는 행정적인 업무도 수업에 방해가 되면 흔히 '잡무'라며 백안시할 만큼 수업은 중요하다. 학기마다 짧지 않은 방학이 주어지고, 그 기간 동안 수많은 직무 연수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도 오로지 교사들의 수업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다.

경시대회의 난립이 학종 때문인 건 맞지만, 그것의 교육적 효과도 무시할 순 없다는 주장도 있다. 백 보 양보해서 그 점을 인정하더라도, 경시대회는 평가의 일환이지 수업의 연장일 순 없다. 말하자면, 중간고사·기말고사와 같은 시험의 한 종류일 뿐이며, 그렇잖아도 온갖 시험이 차고도 넘치는 마당이니 다짜고짜 효과 운운하는 것은 민망한 짓이다. 더구나 소수 최상위권 아이들만을 위한 시험임에랴.

몇 명만 수업에 집중할 뿐 대부분의 아이들이 졸거나 엎드려 자는 수업은 수업이 아니듯, 소수의 아이들만을 위한 시험은 시험이 아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을 단지 '구경꾼'으로 만드는 시험이라면 학교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 단언컨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각종 교내 경시대회는 아이들 사이에 위화감만 불러일으켜 수업은 물론 학교생활 전반에 해를 끼칠 뿐이다.

사족 하나. 대학은 인문계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이 대학 입시에 철저히 종속돼 있는 현실을 즐기고만 있을 요량인 듯하다. 아이들의 적성과 잠재성을 판별하고 공정하게 평가할 시스템이 과연 대학에 있기는 한 걸까. 대학의 입학사정관들에게 이 한마디는 꼭 건네고 싶다. 겉포장에 신경을 쓰다 보면 정작 그 안에 담긴 물건에 소홀하게 되는 건 인지상정이다. 지금 학종이 꼭 그 꼴이다.
#학생부 종합전형 #경시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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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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