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을 돌아보게 하는 소설의 힘

바오닌 등 아시아 소설가들의 힘을 담은 <물결의 비밀>

등록 2016.07.04 17:01수정 2016.07.04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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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3장짜리 소설이 사람의 기분을 이렇게 무겁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경험했다. 수천 장짜리인 도스토옙스키 소설 <까라마조프네의 형제들>을 읽었을 때의 중량감에나 비기려나. 소설 속 사건의 시작은 "그해 칠월 보름날 밤, 홍수로 물이 가득 찬 바로 그 순간, 미군의 일제 폭격이 우리 마을 앞을 지키던 제방을 겨냥했다"에서 비롯된다.

이 한 문장에는 베트남 현대사를 아는, 아니 인류 잔혹사를 아는 이들의 인식 속에 가장 무서운 공포가 있다. 그 공포는 신화 시대 수신(水神) 공공의 공격으로 무참히 물고기 밥이 되던 중원의 연약한 백성부터, 몽골의 잔인한 도륙에 희생된 사람들, 순박한 인디오를 신식 무기로 잔혹하게 살상하던 신대륙 발견자들 등 수많은 현장에서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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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의 비밀 겉 표지 ⓒ 아시아 간

경비초소에서 마을을 지키던 나는 물결이 집을 삼키기 전 아내가 있는 집으로 달려간다. 다행히 아내와 아들을 안고, 마을 사당 보리수 나무 줄기에 몸을 의탁한다. 수많은 사람과 짐승이 물의 아가리에 빨려 들어가는 지옥. 힘이 빠진 아내가 아들을 떨어뜨리고, 아내도 아이를 향해 물길 속으로 사라진다. 힘겹게 아이를 구한 후 정신을 잃은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그렇게 구한 아이는 남자 아이가 아닌 여자 아이였다. 그리고 아이가 커서 소녀가 다 되어버린 지금도 그 강둑에서 회한에 젖을 수밖에 없다. 그날의 모든 것을 아는 물결을 바라보면서. 지난 수천년 인간의 역사에서 인도주의가 작용한 사례는 많지 않았다. 베트남전도 마찬가지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홍수 속 제방을 무너뜨리는 군대, 네이팜 탄으로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는 군대, 유독성 고엽제를 무차별 뿌려대던 군대는 언제나 존재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최근 출간된 <물결의 비밀>(아시아 간)의 첫 번째 수록 작품이다. 계간 '아시아'에 수록된 작품을 모은 이 소설들을 읽으면서 나는 늦게라도 아시아 문학의 숲을 볼 수 있다는 것에 작은 안도감을 느꼈다. <물결의 비밀>을 쓴 작가 바오닌은 나에게 낯선 작가가 아니다. 중국의 한 공간과 한권의 책을 연결해 쓴 <중국도시기행>(성하출판 간)에서 나는 구이린(桂林)과 그의 소설 '전쟁의 슬픔'을 연결해서 썼다(관련기사 : 아름다운 땅 구이린에서 떠올린 전쟁).

그래서 근 25년 만에 만난 그의 이름과 소설이 반갑다. 동시에 여전한 깊은 공감에 마음이 저리다. 이 소설집은 표제작만이 아니라 모든 소설이 시간과 공간을 지나서 깊은 감동이 있다.

필리핀 작가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의 <불 위를 걷다>는 얼마전 처음 가본 마닐라에서의 다양한 느낌과 최근 대통령에 당선되어 마약상에 대한 공격을 휘두르는 두테르테의 뉴스들이 겹쳐져 있기에 더욱 깊이 다가온다. 루신의 <아큐정전>을 닮은 베트남 작가 남까오의 <지 패오> 등 수록작 모두가 깊은 공감을 준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에 공감이 큰 이유는 아시아라는 공간에서 당대를 살아온 작가들의 사실적 경험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터키, 인도, 파키스탄에서 일본까지 이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는 현대사의 다양한 각인들이 온 몸에 찍혀 있다. 심지어 타국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희생당한 '다이토마루' 호의 아픔을 담은 일본 작가 유다 가쓰에의 <모래는 모래가 아니고>까지도.

더욱이 이제 베트남이나 필리핀 등의 나라는 먼 이방의 나라가 아니라 아이들의, 친구들의 외가라는 점에서 더욱 더 깊게 느껴진다. 그런 나라의 역사나 아픔을 모르고 한 땅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둘째 현대사의 굴곡을 비슷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월남전이나 2차대전, 파키스탄 전쟁 등 전쟁의 상품을 근저에 안고 있다. 이런 문제 뿐만 아니라 의료가 산업화되어 인권을 침범하는 문제를 담은 싱가포르의 고팔 바라담의 <궁극적 상품>에 이르기까지 이 시대에 대한 문제를 소설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가장 반가운 것 중에 하나는 요즘 내가 많이 읽는 중국 작가군에 츠쯔젠(迟子建)을 추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소개한 <돼지 기름 한 항아리>는 헤이롱지앙성 모허(漠河) 출신인 그녀의 고향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러 국경지대에 벌목 노동자로 떠난 아버지가 있는 곳을 찾아나선 어머니와 3남매의 여정과 그 속에 숨어있는 사랑과 인연을 담은 이야기다.

그리 길지 않은 소설이지만 이 여정이 갖고 있는 중국 북방의 다양한 풍모와 사람들의 곡절 많은 삶은 다양한 흥미를 제공한다. 사실 우리와는 낯선 땅으로 느낄 수 있지만 여정의 출발점인 북만주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던 곳이다. 모허 지역은 자서전 <우등불>을 쓴 철기 이범석 장군이 한때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던 곳이다.

츠쯔젠의 이 소설이 짧으면서도 인상적인 것은 험난한 국가의 건설부터 문화대혁명 등 중국 역사의 곡절을 지나는 민중들의 질곡의 삶이 잘 녹아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낡은 옛집과 바꾼 돼지기름 한 항아리와 그 속에 담긴 비밀들은 지극히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사랑과 작은 탐욕, 애증이 다 함축되어 있다. 검색하니 츠쯔젠은 중국의 주요문학상을 모두 타고, 루신문학상을 세 번이나 수상했다. 그러나 한국에는 번역 작품이 한 권(<어얼구나강의 오른쪽>) 밖에 있지 않아 아쉬웠다.

우리 서가는 온통 서양 문학이 중심이었다. 일본이나 중국 문학은 소개가 늘어가지만, 인도나 동남아 문학은 소개가 더디다. 이 소설집이 가까운 이웃 나라들의 문학 세계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됐으면 싶다.

물결의 비밀 - 아시아 베스트 컬렉션

바오 닌 외 지음, 구수정 외 옮김,
도서출판 아시아, 2016


#아시아 #소설 #바오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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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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