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회] 절정고수가 장난같은 초식에 걸려들다니...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69회]

등록 2016.07.05 10:06수정 2016.07.05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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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갈 때는 비밀 통로를 이용하자구나."
"네? 비밀 통로가 있습니까?"

관조운이 반가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비밀 통로라 해서 별 다른 건 아니고 헛간 뒷문이 절벽으로 오르는 길과 연결돼 있다네."

그러고 보니 절벽 밑에 허름한 헛간 하나가 있었던 것이 관조운의 머리속에서 떠올랐다. 

"그럼, 절벽에 길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자세히 보면 절벽 사이에 길이 나 있다네. 성인 한 명이 몸을 옆으로 해야 겨우 발을 디딜 정도로 좁은 길이지만 약초 캐러 다니는 사람들한테는 대로나 다름없는 길이지."
"아, 이곳에 약초꾼들이 드나드는 모양이군요."

혁련지가 말했다.

"자운헌을 짓고 나서는 뜸하지만 지금도 간혹 약초꾼들이 찾곤 한다네. 여긴 약왕(藥王) 손사막도 채약하러 다니던 길이었지."
"아, 약왕(藥王)이라 불리는 손사막이 이곳 운부산에 약초를 캐셨나요?"


혁련지가 물었다.

"대사형이 둘째 사형을 데리고 이곳으로 온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다네. 운부산에는 기화요초가 많다네."


손사막이라면 갈홍, 화타와 더불어 3대 의성(醫聖)으로 불리는 전설 속의 인물이다. 관조운은 약초꾼들이 다니는 숨겨진 길이 있다는 담곤의 말에 안도가 되었다. 구사곡이나 조수협으로 되돌아 나간다면 은화사와 금의위와 마주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담곤이 손사막 얘기를 꺼내자 관조운이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는 별채의 서실에 가서 스승 모충연이 쓴 <무극의통>를 꺼내 품에 넣었다. 혹시 언젠가 만나게 될지도 모를 둘째 사숙을 위해서다.

"절벽 위에서는 어디로 연결됩니까?"

검을 어깨에 멘 혁련지가 담곤에게 물었다.

"절벽을 다 오르고 나면 그곳을 반야봉이라고 한다네. 반야봉 뒤편 능선을 따라가면 대항산으로 연결되지. 하지만 남북 팔백리 대항산맥을 종단할 것 까진 없고, 하루 이틀 거리만 우회한 후 동쪽 사면을 따라 내려가면 부주현이 나올 것이네."

말을 마친 후 담곤은 관조운과 혁련지를 돌아보았다. 어제 산장에 올 때와 다른 게 있다면 관조운의 등에 바랑이 짊어져 있고 혁련지의 어깨에 검이 매여 있다는 것이다. 

막 출발하려는 찰나 쾅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부서지면 두 명의 사내가 뛰어들었다. 하나는 체격이 장대하고 다른 하나는 보통 체격인데, 둘 다 가슴에는 '금(金)'가 새겨진 배자를 입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손에는 장검이 쥐여져 있다. 그들은 입구를 막고 담곤 일행을 일별하더니 다짜고짜 검광을 뿌리며 공격을 했다.  

체격이 큰 장한이 앞서서 담곤에게로 향했다. 그 체격에 어디서 그런 속도가 나오는지 말 그대로 전광석화처럼 담곤의 요혈을 찔러들어 왔다. 담곤이 무공을 잃었다지만 약간의 경공이 남아 있고 검의 길을 아는지라 오른쪽으로 도는 척 하다 반대편으로 몸을 굽혀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장한은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연속공격으로 검을 베어나왔다.

그런데 검세(劍勢)가 중윈의 검술과 사뭇 달랐다. 베는 것과 찌르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할까. 검을 쥔 손을 가볍게 뿌리치듯 하면서 손목에 탄력을 주어 위력은 없지만 속도가 빨랐다. 중원의 검술은 손목을 고정시키고 팔과 어깨를 주로 사용하는데 비해 장한의 검은 몸동작이 크지 않지만 검의 변화가 손목에서 나와 변화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보통 체격의 사내 또한 전광석화처럼 관조운을 향해 날았으나 혁련지가 어느새 심운검을 뽑아 사내의 옆을 치고 들어갔다. 사내는 중원의 정통 검술을 익힌 모양새다. 준비 자세는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는 격검세(擊劍勢)를 취하다가 공격이나 수비를 할 적에는 한 손으로 그어가는 무당이나 청성 류의 검식 같았다.

혁련지는 아미의 절학 비검유혼(飛劍幽魂) 중 제오식 섬전화우(閃電花雨)로 공격했다. 섬전화우는 바람에 꽃비가 날리듯 검이 사방에서 치고 들어가는 초식이다. 그러나 상대는 옆에서 기습하는 혁련지의 검을 별 어려움 없이 튕겨내고는 방향을 바꿔 혁련지를 마주보았다. 관조운에게는 검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혁련지가 이번에는 제칠식 탈명추혼(奪命追魂)으로 검을 앞뒤로 뻗으며 파고들어갔다. 사내는 이번에는 움찔하더니 뒤로 물러섰다가 오른쪽 옆으로 돌며 혁련지의 검을 모두 받아쳐 튕겨냈다. 사내는 검을 피하기보다 받아치는 쪽에 주력하는 걸 보니 반격의 틈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혁련지는 두 번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내심 긴장했다. 상대의 무공이 자신보다 상수면 상수였지 하수는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보다 고수와의 대결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불리해진다. 이 경우 상대의 기세를 꺾을 회심의 일격이 필요하다. 그녀는 스승 모충연이 말년에 자신에게만 전수해준 청학십삼식의 자세를 취했다. 왼 다리에 중심을 잡고 오른 다리는 언제든 튀어오를 태세를 갖추는 것이다.

두 번의 기습을 막아낸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곧추 세우더니 '타압!' 하는 기합과 함께 검을 낮추었다가 사선으로 치켜올리며 공격해 왔다. 혁련지는 청학검법을 시전할 여유도 없이 사내의 공격을 방어해야 했다.

사내의 공격은 매서웠다. 두 번 연속해 이어지는 동작이 혁련지는 요혈마다 파고들었다. 혁련지는 검을 들어 겨우 막아냈다. 다행히 모충연이 남긴 검은 날이 두꺼운데 비해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은 명검이었다. 상대의 검과 부딪쳐도 진동이 덜해 검세(劍勢)를 갖추기가 용이했다. 귀한 재질로 만든 검인 모양이었다. 두 번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사내는 마음을 다잡은 듯 검을 꼬나들었다. 이어 요잇!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돌며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이상한 초식이었다. 전진과 후퇴만으로 보법을 전개하며 찌르는데 동시에 여러 곳에서 칼날이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혁련지가 도저히 맞부딪칠 수가 없어 뒷걸음으로 피했다. 사내의 기세는 더욱 세졌다. 마침내 혁련지의 등이 벽에 닿았다. 사내는 한 발 물러섰다가 다시 공격 태세를 갖추더니 '치잇' 소리를 내며 몸을 훌쩍 날렸다. 사내가 공중에 뜬 상태에서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옆에서 무언가 날아오르는 기색을 느껴 검을 옆으로 쳐냈다.

'와지끈'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공중에서 나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의자였다. 혁련지가 벽에 몰린 걸 보고 관조운이 옆에 있던 의자를 던진 것이다. 사내가 의자를 쳐내는 틈에 혁련지는 옆으로 돌아 벽에서 벗어났다. 관조운은 부서진 의자의 다리 하나를 주워들고 사내와 맞섰다. 사내는 관조운과 혁련지 양쪽에서 공격을 받게 되었으나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마치 장난을 하듯 혁련지의 검과 관조운의 몽둥이를 검배로 쳐내며 전진했다. 이제 관조운과 혁련지가 동시에 구석으로 몰리는 형국이 됐다.

한편 장대한 체격의 사내 조복은 담곤을 공격하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천하제일 비천문의 사대제자인 담곤을 기습하면서 과연 성공을 할까 하는 의구심이 자신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 깃들었다. 그 자신이 웬만하면 정면대결로 무예를 가리지 뒤에서 기습하는 걸 수치로 여겼으나, 이번만큼은 상대가 상대인지라 기습 방식을 택했다. 자운헌이라는 당호가 새겨진 건물 안에 들어가기 전 조복은 자신이 담곤을 맡을 테니 서생과 낭자는 전광이 맡으라고 손짓으로 신호를 했다.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가자마자 조복은 담곤에게 남방 요(遙)족의 절기를 펼치며 공격해 들어갔다. 조복은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는 웬만하면 요족 무술을 펼치지 않았다. 자신의 뿌리가 드러나는 것이 싫을 뿐만 아니라 중원과 다른 유파의 검법을 백안시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따위 이유로 비장의 절기를 아낄 수가 없었다. 타인의 시선이 자신의 목숨보다 중할 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담곤의 대응이 이상했다. 자신의 공격을 피하는 것도 겨우 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아슬아슬했고, 움직임도 두서가 없었다. 무공을 아는 자라면 나올 수 없는 동작이었다. 보법과 자세가 균형이 맞지 않고 상황에 따른 반사적 동작에 의지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속임수일지도 모른다. 조복은 긴장하지 않고 이번에는 공격 방식을 약간 달리했다. 검으로 상단을 겨냥하면서 발로 하단을 공격하는 퇴각술을 펼친 것이다. 일종의 속임수지만 실전에서 의외로 잘 먹히는 공격이다.

담곤 같은 절정고수가 이런 장난 같은 초식에 걸려들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나 실전에서 상대의 움직임을 현혹시키기에는 썩 유용한 허허실실이라서 상대를 떠보듯 시전한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먹혀들었다. 담곤이 자신의 발에 채여 공중에 붕 떠 벽으로 날아갔다. 조복은 반사적으로 검을 베어나갔다. 담곤이 최후의 힘을 짜내듯 공중에서 몸을 뒤틀었으나 검은 그의 무릎 어림을 날카롭게 베고 지나갔다. 이어 담곤이 쿵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치며 떨어졌다. 담곤은 의식을 잃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혁련지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힐끗 주었다. 예상한대로 담곤이 상대의 공격에 쓰러진 것이다. 그녀는 기습한 자들이 굉장한 고수라는 걸 알고 담사숙이 걱정되었다. 무공이 사라진 사숙은 그저 힘없는 노인네에 불과할 뿐이다. 사숙을 방어하고 싶었으나 상대는 그럴만한 틈을 주지 않았다. 아니 사숙을 보호하기는커녕 그녀 자신도 눈앞의 적의 공세를 받아내기에 급급한 처지였다. 사숙을 쓰러뜨린 사내가 검끝을 사숙의 목에 겨누고 싸늘하게 말했다.

"검을 거둬라!"

그 말에 혁련지는 전의가 싹 가셨다. 눈앞의 상대를 꺾을 자신도 없었지만 사숙의 목숨을 담보로 계속 대결할 수도 없었다. 혁련지가 검끝을 아래로 향하자 상대도 공격을 멈췄다. 관조운도 몽둥이를 내렸다.

"검을 버려라!"

사내는 여전히 검끝을 사숙의 목에 겨누고 말했다. 혁련지가 검을 바닥에 던지자 관조운도 몽둥이를 버렸다.

"계집년을 결박해."

조복이 전광을 향해 말했다. 전광은 품에서 포승줄을 꺼내 혁련지에게 갔다. 혁련지가 두 손을 내밀자 전광이 손목을 묶고 조복을 쳐다보았다.

"손만 묶으면 돼. 이동을 해야 하니까."

전광이 이번에는 관조운에게 다가갔다. 관조운도 손목을 내밀었다.

"그 놈은 놔둬, 이 노인네를 업어야 하니까."

조복이 말하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혁련지의 검을 집었다. "음, 이 검은 꽤 쓸만해 보이는 군." 조복은 날을 눈앞에 갖다 대고 검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자신의 검은 검집에 넣고는 혁련지의 검을 가지고 허공에 몇 번 휘둘렀다. "생각보다 무게도 안 나가고. 탄력도 좋군."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더니 이번에는 검무를 추듯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검을 아래에서 위로 비껴올림과 동시에 곁에 있던 전광을 전광석화로 베었다.

갑자기 기습을 당한 전광은 헉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명문혈의 급소를 정확하게 베인 모양이다. 전광은 고개를 들어 조복을 쳐다보았다. 눈동자엔 초점이 없다. 돌연한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이다. 전광은 이내 고개를 떨구고 '허억 허억' 하는 숨소리를 냈다. 이윽고 커억 하는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조용해졌다. 엎어진 전광의 가슴에서 붉은피가 실개천처럼 흘러나왔다.
덧붙이는 글 본디 연재 요일은 월, 수, 금요일입니다. 다만, 이번 69회는 편집부 사정으로 인해 화요일(7월 5일) 게재합니다. 양해바랍니다.
#PERD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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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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