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년 동안 떠나지 못하는 700명의 원혼들

어느 물푸레나무가 기억하는 충주 국민보도연맹사건

등록 2016.07.07 13:12수정 2016.07.07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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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충주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 현장인 싸리고개 산골짜기 충주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 발생 66주기인 7월 5일, 단편소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을 통해 학살사건을 생생히 묘사했던 현장인 건국대 충주캠퍼스 맞은편 싸리고개 산골짜기를 최용탁 작가가 가리키고 있다.

충주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 현장인 싸리고개 산골짜기 충주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 발생 66주기인 7월 5일, 단편소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을 통해 학살사건을 생생히 묘사했던 현장인 건국대 충주캠퍼스 맞은편 싸리고개 산골짜기를 최용탁 작가가 가리키고 있다. ⓒ 유문철


가뭄 뒤에 장맛비가 내린다. 하늘만 보고 사는 농부는 가뭄 뒤에 단비가 내리면 고된 농사일을 내려놓는다. 이웃과 삼삼오오 모여 막걸리잔 부딪히며 가뭄으로 갈라지고 타들어 가던 마음을 달랜다.

후배 농부는 굵은 장대비가 내리는 날, 마을을 떠나 차로 한 시간 거리인 충주에서 사과농사 짓는 선배 농부를 만나기 위해 나섰다. 오늘(7월 5일)은 특별한 날이기 때문이다.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 후문 근처에 있는 야트막한 고개에서 선배를 만나기로 했다. 그 고개 이름은 '싸리고개'다.

선배 농부는 약속시간보다 10분 일찍 싸리고개에 도착해 있다가 약속시간보다 10분 늦게 도착한 후배 농부를 반갑게 맞는다. 2주일 만이다. 최 선배는 20여년 농사일로 검게 그을고 우락부락한(?) 얼굴과 투박한 손, 그리고 큰 덩치와 달리 섬세하고 자상하다. 산문만 읽다가 처음 얼굴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이 이 사람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어서 와요, 비가 많이 오지? 조금 일찍 왔길래 먼저 둘러 봤어요. 여기 와 본 지 몇 년 되었는데 그새 많이 바뀌었네."

8년 터울의 두 농부는 고개를 지나 산으로 향한다. 두어 차례 차를 타고 돌다가 길가에 차를 세운다.

"어디 보자. 여기가 좋겠네. 보세요, 저기 골짜기가 그 골짜기예요."

산골짜기를 손으로 가리키는 최 선배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지며 눈시울이 붉어진다. 두 농부는 장대 같은 장맛비를 맞으며 무엇을 찾아 서성거린 걸까? 늘 해맑게 웃는 최 선배의 눈에 왜 물기가 비치는 걸까? 후배 농부가 골짜기를 바라보며 묻는다.


"물푸레나무가 저기 있겠네요."
"그럼요. 물푸레나무는 우리나라 산 어디에나 흔한 나무이니까요."

선배 농부의 이름은 최용탁이다. 21년 전 고향 충주로 귀농했다. 1985년 충주댐 완공으로 인해 충주 살미면 월악산 자락 고향마을이 물에 잠겨 부모님과 고향을 떠났다. 타향살이를 하다 부모님이 먼저 충주 산척면에 터를 잡았고 이어 맏아들이자 장손인 최 선배 부부가 부모의 뒤를 따랐다. 10여년 농사를 지으며 어린 시절 꿈이었던 시를 끄적거리며 두문불출했다.


2006년에 선배인 안재성 작가의 권유로 소설 한 편을 썼다. 당시 농협조합장 선거 천태만상을 보고 '거의' 있는 그대로 쓴 단편소설 <단풍 열끗>으로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했다.

농사꾼이라고는 하지만 부모님이 보기에 겨울만 되면 골방에 들어앉아 책과 씨름하고 노트에 뭔가를 쓰고 지우기를 되풀이 하는 아들을 아버지는 마뜩치 않게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 난데없이 문학상을 수상하고 상금까지 집에 가져 오니 아버지는 놀라서 아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우리 집이 반가였다고는 하나 문집을 낸 것은 네 오대조에서 그치고 말았다. 이제 네가 문집을 엮었으니 내가 조상 뵐 면목이 생겼다."(녹색평론 2015년 3~4월호, 통권 141호)

문학상 수상 이후 <한국작가회의> 정회원이 되었고 농사지으며 글을 쓰는 직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막혔던 봇물이 터지듯이 글을 쏟아냈다. 원래 꿈은 시인이었는데 세상에 나오는 글은 소설과 산문, 평전, 신문 칼럼이다. 최근에는 세월호작가기록단에 참여하여 단원고 학생들과 가족의 삶을 썼다. 후배 농부인 내가 아는 선배 농부는 이런 사람이다.

최 선배와는 몇 달 전 책읽기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녹색평론에 연재하던 농사 산문에 깊은 인상을 받고 있던 차에 책읽기 모임에 가면 만날 수 있겠다 싶어 단양에서 충주로 찾아갔다. 책읽기는 구실이고 농사꾼들이 흔히 그렇듯이, 기나긴 술자리 뒤풀이가 모임 때마다 되풀이 되었다. 농사 이야기, 사는 이야기, 세상 이야기 등을 두서없이 나누었다.

a 최용탁 작가의 최근작 <아들아, 넌 어떻게 살래?> 녹색평론과 한국농정신문을 비롯한 매체에 기고했던 글 모음집인 이 책에는 충주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을 직접 겪은 최용탁 작가의 가족 이야기가 담겨 있다.

최용탁 작가의 최근작 <아들아, 넌 어떻게 살래?> 녹색평론과 한국농정신문을 비롯한 매체에 기고했던 글 모음집인 이 책에는 충주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을 직접 겪은 최용탁 작가의 가족 이야기가 담겨 있다. ⓒ 유문철


책모임 뒤풀이에서 우연히 나온 충주 국민보도연맹사건

최 선배는 지난 4월 말에는 그동안 여러 잡지와 신문에 썼던 글들을 모아 녹색평론사에서 <아들아, 넌 어떻게 살래?>라는 이름으로 책을 펴냈다.

출판기념회를 멋쩍어하던 최 선배가 21년째 농사짓는 사과 과수원에서 책읽기 모임 회원 셋과 최 선배의 선배인 안재성 작가와 이성아 작가를 불렀다. 여섯 사람이 소주에 메기매운탕을 안주로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최 선배는 모인 사람들에게 저자 사인을 해서 갓 나온 책을 한 권씩 나눠 주었다.

최 선배의 산문을 좋아하는 나는 집에 돌아와서 선물 받은 책을 꼼꼼히 읽었다. 녹색평론에 실렸던 농사 산문은 이미 예전에 모두 읽었다. 단행본으로 모아서 읽으니 기억이 새롭고 읽는 맛이 달랐다.

글을 다시 읽다가 <겨울밤, 아버지하고>란 한 대목이 눈에 밟혔다. 원래 녹색평론 2015년 3~4월호에 실린 글이다. 그 당시에는 겨울에 사랑방에 앉아 새끼 꼬는 아버지와 아들의 정겨운 한 때로만 읽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책모임 뒤풀이에서 우연히 충주 국민보도연맹사건 희생자 위령제 이야기가 나왔다. 최 선배의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가 희생자였다는 것, 7~8년 동안 유족회 총무를 맡아서 희생자 조사와 소송을 이끌었다는 것, 마침내 국가가 잘못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와 배상을 했다는 것, 2010년 제1회 합동위령제에서 최 선배가 유족들과 함께 피눈물을 흘리며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시를 지어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최 선배를 만날 때마다 마음 한 자락이 저려왔던 터에 <겨울밤, 아버지하고>에 나오는 한 대목은 가슴을 쳤다.

"아버지는 겨우 열두 살에 일곱 식구의 가장이 되었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집안의 두 기둥이었던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가 좌익 혐의를 받고 학살되었다. 겹겹이 시체 쌓인 집단 학살의 현장에서 열두 살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시체를 찾아 지게에 지고 30리를 걸어왔다고 했다."(아들아, 넌 어떻게 살래? 112쪽)

지난주에 아이 손을 잡고 단양 다누리 도서관에 갔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주말이면 즐겨 찾던 도서관이다. 새로 지은 도서관으로 아이들이 책을 편하게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인테리어가 두드러진다. 아이와 함께 책 구경을 하던 차에 최용탁이란 이름이 쓰여 있는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박건웅 만화, 최용탁 원작인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이란 만화책이다. 도서분류번호가 911이니 한국현대사다. 궁금증이 일어서 얼른 꺼내 펼쳐 보았다. 차례에 '국민보도연맹사건이란?'이란 목차가 눈에 들어오면서 가슴이 쿵쾅 거렸다. 아, 최 선배가 그 때 말한 할아버지 얘기구나!

a 박건웅 만화/최용탁 원작인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이 만화에는 1950년 7월 5일부터 8일까지 건국대 충주캠퍼스 인근 싸리고개 산골짜기에서 벌어졌던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박건웅 만화/최용탁 원작인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이 만화에는 1950년 7월 5일부터 8일까지 건국대 충주캠퍼스 인근 싸리고개 산골짜기에서 벌어졌던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 유문철


6.25 개전 초기, 북한군에 동조할 가능성 있다며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이 만화책은 단편소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을 박건웅 화가가 그림으로 시각화한 만화다. 몹시 무겁고 비극적인 한국현대사의 대사건인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창주 산골 어린 물푸레나무의 눈으로 바라본 독특한 이야기이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6월 5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며 이승만 정권이 만든 반공단체다. 1949년 말에 연맹 가입자가 30만 명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권의 독려에 따라 무리하게 머리수 채우기를 한 탓에 평범한 농민들이 많이 가입되었다. 심지어 어린 학생들까지 연맹원이 되거나 자신도 모른 채 가입되는 경우도 많았다.

6.25 한국전쟁 개전 초기 이승만 정권은 남하하는 북한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며 국민보도연맹원을 전원 처형하라는 명령을 전국 군대, 경찰, 교도소로 내려 보냈다. 명령을 받은 이들은 국민보도연맹원을 체계적으로 학살했다.

강제규 감독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는 장동건의 여자친구인 영신이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총살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a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 극 중 영신(이은주 분)은 전쟁 중 끼니를 해결하고자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그 대가로 죽음을 맞는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 극 중 영신(이은주 분)은 전쟁 중 끼니를 해결하고자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그 대가로 죽음을 맞는다.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전쟁 시기 학살된 국민보도연맹원들 20여만 명

영화장면보다 실제는 더 끔찍했다. 만화에는 처참한 장면이 가득하다. 국민보도연맹원들은 굴비두름 엮이듯이 엮여서, 소가 도살장에 가듯이 끌려갔다. 그리고는 산골짜기, 광산, 교도소 또는 창고나 공터에서 총살되었다.

며칠 사이에 수십만 명의 생떼 같은 농투산이와 민초들이 이승을 떠났다. 전국적으로 그 수가 20여만 명이라고도 하고 그보다 더 많다고도 한다.

a  외공리 '민간인 학살지'에서 나온 유골의 모습.

외공리 '민간인 학살지'에서 나온 유골의 모습. ⓒ ⓒ윤성효

국민보도연맹원 자료가 허술해서 희생자와 학살과정을 밝히기가 지금도 어렵다. 희생자도 대부분 나서지 않았고 가해자 측은 더더욱 꽁꽁 숨었다.

그나마 4.19 혁명의 열기를 타고 결성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유족회'와 제2공화국 제4대 국회 시절 구성된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조사특위'의 노력으로 국민보도연맹과 민간인학살 희생자 수가 대략적으로 밝혀졌다. 그 숫자가 무려 국민보도연맹은 20~30만 명, 민간인학살자 수는 백만에서 백이십만명이다.

만화에서는 어린 물푸레나무가 사는 창주라는 마을의 한 산골짜기가 무대다. 창주는 실제는 충주다. 지난 1월 작고한 신영복 선생의 한학 스승인 노촌 이구영 선생에 따르면 최용탁 선배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처럼 충주 12개면에서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한 이들이 7백 명에 이른다.

노촌 이구영 선생은 제천 한수면에 살면서 국민보도연맹 희생자들을 파악했다. 이들은 어린 물푸레나무가 내려다보는 싸리고개 산골짜기에서 1950년 7월 5일에서 8일 동안 사흘 사이에 총살되었다. 이들 중 단 두 사람만이 살아남았다고 구전으로 전해진다.

3년 동안 벌어진 비극적인 전쟁이 끝나고 이후 수십 년 세월이 흐르도록 희생자의 가족은 숨죽여 눈물을 흘려야 했다. 1960년 4월 3.15 부정선거의 후폭풍으로 죽을 때까지 대통령 자리에 눌러 앉고 싶었던 이승만은 4.19 혁명의 거센 파도에 밀려 하와이로 도망갔다.

국민보도연맹원과 한국전쟁 전후 무수한 민간인 학살의 책임이 있는 이승만은 자연사 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백이십만명에 이른다는 민간인 학살 원혼들이 구천을 떠돌았다. 살아남은 가족들은 숨죽여 피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이어갔다. 그런데 희대의 전범 이승만은 자연사한 것이다.

잠시 하늘이 열렸다가 닫히고 이승만보다 더한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로 국가를 탈취한 후에 국민보도연맹사건은 더욱 더 꽁꽁 숨겨졌다. 게다가 희생자 가족은 빨갱이 가족이라며 국가의 사과와 배상은커녕 감시와 차별의 대상이 되었다.

a  2005년 12월 1일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가 2006년 10월 17일 국민보도연맹 사건 직권조사 결정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05년 12월 1일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가 2006년 10월 17일 국민보도연맹 사건 직권조사 결정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 진실화해위


진실화해위원회가 인정한 희생자 4934명

김대중, 노무현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2005년 12월 1일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국민보도연맹사건에 대해 부족하나마 진실을 밝혔다. 55년 동안 억울하단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한 마음으로 제사상을 차리던 가족들 한이 조금이나마 풀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를 기대하며 충주에서도 2007년 유족회가 결성되었다. 노촌 이구영 선생의 조사에 따르면 700명에 이른다는 희생자 중 피해 조사를 신청한 건수는 16가족이 신청한 18명이 전부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 11월 26일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보도연맹원 희생자가 4934명이라고 인정했다. 이 숫자에는 충주 피해자로 신청된 18명이 모두 들어있다. 전체 추정 피해자 20여만 명 중 고작 2.5 퍼센트다. 충주만 따지면 700명 중 18명으로 2.5퍼센트다. 기막히리만큼 추정 희생자 수와 인정 비율이 일치한다.

2010년 7월 23일 충주시 호암예술관에서 공식 인정된 18명의 희생자를 위한 합동위령제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희생자 가족과 진실규명을 위해 연대한 시민사회단체, 가해자 측을 대표해서 군인과 시청 공무원이 모였다. 충주 주둔군 책임자인 대령이 피해자 영정에 절하고 유족에게 사과를 하면서 행사장은 한바탕 울음바다가 되었다.

a  2014년 11월 1일 충남 태안에서 '한국전쟁 태안민간인희생자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태안에서는 1041명이 희생됐다.

2014년 11월 1일 충남 태안에서 '한국전쟁 태안민간인희생자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태안에서는 1041명이 희생됐다. ⓒ ⓒ 심규상


여기에 더해 유족회 총무를 맡고 있던 최용탁 선배는 어릴 때 자신을 업어 키운 막내고모의 입을 빌려 할아버지에게 전하는 위령시를 지어 호곡했다. 희생자의 원혼과 가족이 피맺힌 시를 함께 읊조리면서 행사장은 또다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이제야 60년의 응어리가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아픈 세월 육십 년                               

      최용탁(유족, 작가)

      아버지!
      그 날, 음력으로 오월 열아흐레 저녁
      다음 날 모를 심는다며 아버지는 논물을 보고 오셨지요
      그리고는 여럿이 함께 갈 데가 있다며
      휑하니 다녀오시겠다고 흙물 밴 무명고의 그대로
      사립문을 나서셨지요.

      우리는 모깃불을 피워놓고 아버지를 기다렸어요
      금방 돌아와 모를 심고
      그 모가 자라 흰 쌀이 되면
      보름달처럼 배부를 추석 이야기를 했어요     
      멀리서 쿵쿵 거리며 대포소리가 들려와 
      불안하고 무서웠지만 다시 아버지를 보지 못한다고는
      아무도,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것이 이승에서 마지막이었네요, 아버지
      그 세월이 육십년이네요.

      얼마나 가슴 아프셨어요. 남은 식구들, 어린 자식들
      눈에 밟혀 먼먼 황천길 어찌 발길 떨어지셨나요.

      다들 힘들고 아픈 세월을 보냈어요.
      소리 죽여 울고 가슴 속으로만 삭이고 삭이며
      마음껏 아버지를 불러보지도 못했어요. 
      그 세월이 육십 년, 아아, 육십 년이었어요.

      이제야 밝은 대낮에 
      그 날 함께 가신 영령들 모두 모이셨습니다.
      억울해 차마 감지 못했던 눈

최 선배에 따르면 원체 말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아버지께서 제1회 합동위령제가 끝나고 나서 아들에게 말했다.

"용탁아, 고맙다."

이 짧은 한마디엔 열두 살 어린 나이에 한여름 뙤약볕을 받으며 총 맞아 죽은 아버지가 실린 지게를 따라 수십리 길을 걷던 아이의 마음과 평생의 한이 응축되어 있다. 또한 최 선배의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는 아들의 입을 빌려 손자에게 이 말을 전했으리라.

최 선배는 원혼과 유족을 위해 위령시와 더불어 한 가지를 더 마련했다. 철들기 전부터 한날한시에 차려지는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 제사상 앞에서 아버지와 고모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사연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이 피 맺힌 가족사를 사흘 동안 눈물과 탄식으로 써 내려갔다. 그렇게 쓴 단편소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을 행사 팸플릿에 실어 유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소설은 이렇게 탄생했다.

사실과 미술적 상상이 뒤섞인 학살장면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은 짧은 단편소설이다. 하지만 그 사연은 이렇게 길고도 무겁다. 너무나 무겁다 보니 사람의 눈으로 쓸 수 없었다. 이 비극을 시인을 꿈꾸던 어린 시절부터 어떻게 문학으로 형상화할까 최 선배는 수십 년 고민했다.

사과 농사짓는 농부의 감수성이었을까? 비극을 바라다본 어린 물푸레나무의 시선을 빌렸다. 사람이 아닌 물푸레나무의 시선을 통한 묘사가 이 소설의 백미이자 문학적 가치를 높인다. 담담한 듯, 무심한 듯한 물푸레나무의 시선이 학살사건의 비극을 더하기 때문이다.

박건웅 화가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김근태 선생을 매개로 최용탁 선배와 인연을 맺었다. 최 선배는 김근태 평전을 썼고 박건웅 화가는 김근태 만화를 그린 경험이 있다. 박건웅 화가는 우연히 역사테마소설집 <벌레들>에 실린 최용탁 선배의 소설을 읽고는 만화로 그리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다.

참담하면서도 충격적인 개인사이자 우리 현대사인 소설 문장을 만화체로 바꾸지 않고 소설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그대로 쓰면서 만화를 덧붙였다. 그래서 이 만화책은 한 권이자 두 권의 책이다.

첫 몇 쪽은 그림이 엉성해 보여 고개가 갸웃했지만 최 선배의 말에 따르면 이는 작가의 의도라 한다. 쪽을 넘길수록 그림에 빨려 들어갔다. 산골짜기로 끌려가는 농민들을 묘사한 그림들, 죽음을 마주한 희생자들의 표정은 압권이다. 학살장면들을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다. 사실과 미술적 상상이 뒤섞이며 소설의 비극은 더욱더 깊어진다. 오랜만에 미술의 힘, 만화의 힘을 느꼈다.

만화를 보고 읽는 데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한번 보고 끝낼 책이 아니다. 비극의 내용이 떠오르고 만화의 이미지들이 머릿속을 떠돌아 다녀 다시 펴들게 된다. 어스름 새벽 깨어 밭에 나가기 전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이 책을 펼쳐 보았다가 글과 그림에 충격을 받으며 보고 또 보았다.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국민보도연맹사건에 대해 최용탁 선배의 가족사를 듣고 나서 만화를 통해 눈으로 체험했다. 그러고 나니 이 학살사건은 역사책의 한 순간이 아니라 내 옆의 현실로 다가왔다.

문득 싸리고개 골짜기에 서 있는 말 없는 물푸레나무를 보고 싶었다. 그것도 여느 날이 아닌 학살이 시작되었던 7월 5일에. 그 날로부터 꼭 66년 만이다. 이것이 장맛비가 쏟아지는 날, 단양 후배 농부가 충주 선배 농부를 만나러 간 이유다.

산골짜기를 먹먹히 바라 본 두 사람은 평소 책읽기 모임 때처럼 농부끼리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웃고 떠들 수 없었다. 소설에서는 650명, 노촌 이구영 선생의 추정으로 700명이 66년 전 이승을 비참하게 떠난 오늘 숙연한 마음으로 찻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소설이 아닌 진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a 장마비 내리는 날 선후배 농부의 충주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 인터뷰 선후배 농부들이 충주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 66주기를 맞아 비오는 날 막걸리 대신 카페에서 학살사건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장마비 내리는 날 선후배 농부의 충주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 인터뷰 선후배 농부들이 충주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 66주기를 맞아 비오는 날 막걸리 대신 카페에서 학살사건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 유문철


"바른 말 하는 사람, 대가 센 사람들이 우선 보도연맹 가입대상"

- 지난밤 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 제사는 잘 지내셨어요?
"아니오. 합동위령제는 역사적 사건이라 양력에 맞춰 지냈지만 제사는 풍속에 따라 음력을 따르거든요. 당시 두 분이 끌려가신 날이 양력으로 7월 5일이었어요. 음력으로 5월 20일이죠. 충주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이 일어난 사흘 사이에 어느 날에 돌아가셨는지 모르잖아요. 끌려가신 날에 돌아가신 걸로 보았죠. 전날인 자시에 제사를 지내니까 지난달 23일에 제사를 지내 드렸어요."

- 먼저 충주 지역 국민보도연맹사건 발생 경위를 설명해 주시겠어요?
"1949년에 보도연맹이 생기고 나서 다른 지역 상황과 같아요. 충주 엄정면이 좌익이 강하긴 했지만요. 할당이 떨어진 거죠. 좌익이 있긴 있었는데 이미 북으로 넘어갔고요. 마구잡이로 농민들을 가입시켰어요. 살미면 우리 마을이 아주 작았는데 30명 정도가 연맹에 가입되었죠. 그 중 스무 명 정도가 학살이 일어나던 때 끌려갔어요. 두 분은 미리 도망쳤다고 하고, 두 분은 끌려가던 날 마침 집에 없어서 화를 피했다고 해요."

- 할당량을 맞추기 위해 마구잡이로 농민들을 가입시켰다고 하셨는데요. 반드시 그랬기만 할까요? <태백산맥>에 잘 묘사되어 있지만 해방공간에서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거나 동조한 농민들이 많았잖아요. 이런 분들을 보도연맹원으로 우선 가입시켰다가 결국 학살하는 가능성은 없을까요?
"그럴 가능성도 높죠. 바른 말 하는 사람, 대가 센 사람들이 우선 가입대상이었다고 볼 수 있죠. 실제로 그런 분들이 많이 끌려가서 돌아가셨고요. 입증할 순 없지만 그런 추정이 가능하지요."

- 소설에는 희생자가 650명으로 나오는데요. 직접 마을마다 취재 하신 건가요?
"직접 다 취재한 건 아니고요. 당시 진실화해위원회 충북 조사관인 박만순씨가 있었어요. 그 분과 함께 많이 다녔어요. 제천 한수면 동소리에 사셨던 노촌 이구영 선생의 책을 보면 당시 피해자가 700명이라는 숫자가 나와요. 그리고 우리 작은 마을에서 스무 명이 넘게 죽었으니 충주만 따져도 700명이라는 숫자가 과장이 아니죠."

- 당시 충주경찰서가 규모가 꽤 컸나 보죠? 650~700명을 다 수용할 수 있었다고 본다면요.
"그건 경찰서에 다 수용을 못하니 근처에 있는 수리조합과 관공서 건물에 가뒀던 거죠."

- 소설에는 보도연맹 학살이 7월 5일부터 8일까지 사흘 동안이라고 나오던데요.
"7월 5일에 충주경찰서로 각 면에서 소집을 시켰어요. 그 날부터 바로 싸리고개 산골짜기로 줄줄이 끌고 가서 죽이기 시작한 거죠. 국군이 후퇴하던 시기에 보도연맹학살이 시작되는 게 충주부터예요. 6월 28일에 원주에 있던 헌병사령부가 명령을 최초로 받은 걸로 알고 있어요.

원주쪽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고 아래로 내려 오면서 7월 초부터 국군의 후퇴 경로인 충북부터 피해가 커졌죠. 오마이뉴스에도 기사가 있어요. 당시 원주에 주둔하던 헌병대 하사 김만식씨가 2007년에 충북도청에서 증언을 했거든요. 심규상 오마이뉴스 기자가 당시 기사를 썼죠(관련 기사 : "보도연맹 학살은 이승만 특명에 의한 것").

4.19 이후 피해신고에서 민간인학살 백만 명 집계

- 충주만 해도 700명이라는 희생자 숫자가 과장이라고 볼 수 없다면요. 진실화해위원회의 공식 희생자 발표와 달리 보도연맹사건 희생자가 20만명이 넘는다는 숫자는 어디에 근거한 거죠?
"그건 1960년에 4.19 혁명이 나고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유족회'가 결성돼요. 전국에서 신고를 받았는데 이승만에게 억눌려 있다가 당시 분위기에서 피해 신고가 대규모로 들어 왔어요. 그 때 나온 민간인학살 희생자 수가 백만명입니다. 이 중에서 국민보도연맹사건 희생자가 20만명이고요."

- 5.16 박정희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이런 분위기는 곧바로 가라앉았고 피해자와 가족은 오랜 세월 숨죽이면서 살아야 했지요. 김대중-노무현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2천년대 들어서야 겨우 진상조사 요구가 활발해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문경 석달리 채의진 선생이 앞장 선 민간인 학살 유족회원들이 김대중 정부 때 국회를 쫓아다니면서 시위도 하고 청원도 하면서 애를 많이 썼어요. 500일 시위를 하기도 했지요. 채의진 선생께서 초기부터 정말 애를 많이 쓰셨지요."

- 채의진 선생 경우는 일가족 아홉 명과 끌려가셔서 모두 돌아가시고 시체더미에서 혼자만 살아나신 경우지요.
"예. 석달리는 전쟁도 터지기 전에 그리 당하셨으니요."

- 충주 유족회 이야기 좀 해보지요.
"충주에서는 2007년에 도법스님께서 탁발순례를 오신 것이 유족회 결성의 첫 계기가 되었어요. 충주에 오신 도법스님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싸리고개에 가서 보도연맹희생자 위령제를 하자고 제안하셨어요. 희생자 가족 몇 분과 함께 위령제를 드렸지요. 그러고 나서 우선 살미면 희생자 가족들을 찾아 연락을 하고 유족회의 틀을 갖춰 나갔어요. 제가 총무일을 첫 해부터 보면서 이 일을 했죠."

- 유족회를 꾸리고 이끌어 오셨는데요. 구체적인 성과가 난 건 언제였지요?
"총무를 맡아서 우선 피해자 가족들을 찾는 것이 어려웠어요. 피해자 가족이 여전히 신고를 하지 않아서 결국 열여섯 가족으로부터 18명의 희생자를 확인하고 조사 신청을 했어요. 2009년에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최종 4934명의 희생자를 확정지어서 발표했고요. 그 중에서 충주에서 신고한 18명 모두 희생자로 인정해서 조사결정문을 보내 주었어요. 하지만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었을 뿐 3년 소멸시효를 내세우며 배상은 안 된다는 거였어요.

그래도 국가가 잘못을 인정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에는 기뻤죠. 배상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배상 문제는 나중 얘기지만 이런 것이 있어요. 민간인학살 사건이 여러 사례가 있잖아요. 그런데 보도연맹사건이 단일 사건으로는 희생자 수가 가장 많아요. 그렇다보니 배상 판결을 하는데 배상금액이 똑같았어요."

- 정찰제처럼요.
"그래요. 정찰제처럼. 국가와 사법부가 짜고서 나이, 성별, 직업 상관없이 전국 어디서나 동일한 액수로 배상판결을 한 겁니다. 희생자 한 사람당 8천만 원. 채의진 선생이 계시던 석달리는 사건 9억, 금정굴 사건은 3억인가 됩니다. 재판이란 건 판사가 보고서 자유롭게 판결을 해야 맞지 정찰제가 말이 되나요?"

군 최고책임자가 한 사과, 희생자 아버지의 눈물

- 2010년 합동위령제 이야기 좀 나눠 볼까요.
"그 때 사람들이 참 많이 왔어요. 처음으로 하는 거니까 지역언론이 다 왔고요. 시의회 의장도 오고, 지역주둔군 대장이 왔어요. 군에서는 합동위령제에 50만 원을 냈어요. 시청에서는 2011년부터 300만 원씩 위령제 행사비를 지원했어요. 호암예술관에서 위령제를 열었는데 유족들도 많이 오셨고요. 제가 다 연락을 드렸지요. 250석 규모의 행사장에 150석이 찼어요. 그 때는 배상도 아직 못받은 상태라 예산도 없었는데 두레예술단이 와서 공연을 해주었구요. 저도 시를 써서 읽었는데요. 다들 눈물바다가 되었어요.

저를 업어 키운 막내고모가 제 손을 잡고 고맙다고 눈물을 흘렸어요. 위령시를 고모의 관점에서 썼거든요. 아버지도 마찬가지였고요. 아버지는 충주 주둔 군대 책임자인 대대장이 와서 무릎 꿇고 희생자에게 절하는 순간이 가장 감격스러웠다고 하세요. 아버지는 국가라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를 죽인 군 최고책임자가 와서 잘못을 빌었다고 생각하신 거죠. 그것을 보고 평생 응어리진 한을 풀어 내신 겁니다."

-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에 대해서 얘기해 보죠. 이 소설은 650명의 희생자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최 선배님의 가족 이야기잖아요. 소설 첫머리에 나오는 두 형제가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고요. 이 소설은 오래전부터 창작을 생각했으리라 생각합니니다. 녹색평론과 <아들아, 넌 어떻게 살래?>에 실린 '겨울밤, 아버지하고'에 보면 언젠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가슴이 저려서 못쓴다는 얘기가 나오던데요.
"예, 맞아요. 어린 시절 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 제삿날이면 아버지 5남매가 소리죽여 이야기 하시는 걸 듣고 자랐어요. 모이기만 하면 밤새 끝없이 이어지던 그런 얘기요. 2006년에 등단하고 명색이 소설가가 되었는데요. 늘 생각하다 2010년 겨울에 펜을 들었어요.

그런데 막상 쓰려니 한 줄도 쓸 수가 없었어요. 화자를 설정하기 어려웠어요. 피해자 가족의 입장에서 쓰려니 도저히 쓸 수가 없더라고요. 오래도록 고심에 고심을 하다가 문득 그 골짜기에 있던 나무를 화자로 하면 감정 개입 없이 냉철하게 쓸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게 되니까 사흘 만에 써내려 갔죠. 쓰면서 감정이 북받쳐서 많이 울었어요. 몸이 덜덜 떨리기도 했구요. 소설 쓰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 해보았습니다."


- 소설에서는 학살당한 아버지를 찾으러 가는 가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2살 어린 아들이 아버지 시신을 찾아 수십 리 길을 걸어오는 이야기를 산문에 쓰시기도 하셨어요.
"만화에 나오지만 당시 동네에 사는 아저씨 한 분을 모셔 갔어요. 아버지는 할머니, 어머니와 시체더미에서 시신을 찾았고요. 아버지는 어려서 지게를 질 수는 없었고요. 지게 따라 수십리 길을 돌아온 거죠. 그 장면을 떠올리면 정말 머리가 하얘집니다.


우리 작은할아버지가 육손이었어요. 소설과 만화에 나오듯이요. 작은할아버지는 육손인 걸 부끄러워해서 늘 감추고 다녔는데 증조할머니가 아들 시신이 너무 부패해서 찾지 못하니까 손을 보라고 한 것이 그 얘기입니다. 작은 할아버지는 미혼이었는데 당시 장가를 가지 않은 아들은 죽어도 집에 들이지 않는 풍속이 있었어요. 그래서 작은할아버지는 집으로 모시지 못하고 산골짜기에 그대로 묻히셨습니다.


우리 가족이 할아버지를 모셔다 준 아저씨에게 평생 고마워 했어요. 아저씨 존함이 김진택인데요. 평생 그 때 일을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어요. 그런데 15년 전쯤 팔순 넘어 치매에 걸리셔서는 그 때 일을 막 이야기하고 다니신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지금 살아계시면 백 살이 다 되셨을 텐데 돌아가셨겠지요. 그 때 기억이 얼마나 충격이었으면 그랬을까 싶어서 마음이 너무도 아프고 죄송스럽습니다. 그 분도 역시 보도연맹사건의 희생자인 거죠."


학살하는 방식은 다 비슷, 두려움으로 '이승만 만세'를 외치던 이도


- 소설에서 당시 산골짜기로 끌려간 사람이 650명이고 그 중에서 단 한 분이 시체더미에서 생존해서 살아 나오신 걸로 묘사되어 있어요. 당시 목격자가 없는데 이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한 건가요, 창작인가요?
"아, 이건 충주보도연맹사건과 관련해서 구전으로 떠도는 이야기를 넣은 겁니다. 공개적 증언이 거의 없고 숨어서 하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떠돌게 되는 거죠.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는데요. 당시 경찰서에 끌려갔던 사람 중에서 한 분이 숨으려고 변소에 똥더미 속으로 들어가셨대요. 그러다가 발각이 되었죠. 그런데 경찰이 보기에 너무 더럽고 냄새 나고 하니까 그냥 집으로 돌려보냈답니다."


- 학살 장면 묘사도 궁금하군요. 생존자 증언이나 당시 학살에 참여한 경찰의 증언은 없으니까요.
"그건 증언 취재도 다녔지만 다른 지역에서 나온 증언을 많이 참고 했습니다. 어느 곳이나 끌고 가서 학살하는 방식은 비슷했으니까요. 증언들 중에서 제가 소설을 쓰면서 가장 끔찍했던 건요. 죽음을 앞에 둔 두려움으로 희생자들이 '이승만 만세'를 외치던 모습입니다. 그걸 떠올릴 때마다 몸서리쳐집니다.


우리 지역에서도 떠도는 구전이 있어요. 아버지와 고모들이 주위에서 떠도는 이야기들을 많이 이야기 하셨어요. 그런 것들이 다 학살 장면을 묘사할 때 영향을 미쳤죠. 가해자 측 증언은요. 2007년에 충북도청에서 기자회견을 한 김만식씨 증언이 있어요. 김만식씨는 헌병대 상사였는데 학살 경로와 상황을 증언했죠. 얼마 전인가는 당시 책임자들이었던 선우종원과 오재도가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이 이승만 정권의 잘못이라는 증언을 하기도 했죠(관련 기사 : "보도연맹 학살은 이승만 특명에 의한 것").


- 소설이 역사테마소설집 <벌레들>에 실렸는데 그 소설집에 실으시려고 쓰신 건가요?
"그건 아니고요. 첫 위령제가 열리기 전 겨울에 앞서 말한 대로 고민 끝에 결국 사흘 만에 써두었어요. 원고지 90매 분량의 짧은 소설인데요. 첫 유족들에게 드리려고 행사 팸플릿에 넣었어요. 책으로 낼 생각은 없던 거예요. 그냥 쓴 거죠. 그랬는데 <벌레들>을 펴낸 출판사 편집장이 위령제에 마침 왔다가 읽게 된 거죠.


당시 <벌레들> 편집기획이 현대사 사건 10가지를 골라서 단편소설을 하나씩 쓰는 거였다고 해요. 마침 제 소설이 국민보도연맹사건을 다룬 것이다 보니 출판기획에 맞았다고 출판사 편집장이 판단한 겁니다. 그래서 10편의 소설 중 하나로 제 소설이 실리게 되었어요."


- 그럼, 이번에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이 만화책으로 나오게 된 과정은요.
"제가 <벌레들>을 펴낸 출판사에서 김근태 평전을 냈거든요. 그런데 그 평전에 그림으로 참여했던 박건웅 화가가 제 소설을 읽고는 '이렇게 강렬한 소설을 읽어보기는 처음이다'라면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박건웅 화가가 <노근리 이야기>, 김근태 선생이 남영동 대공분소에서 고문 받았던 <짐승의 시간>이란 만화들도 그렸거든요. 박 화가가 제안하기를 만화를 그리면서 원문을 그대로 살리기를 원했어요. 단, 도입부에 두 형제가 산골짜기에서 땔감 하면서 이야기 나누는 장면만 말풍선을 넣었어요."


20여 명의 피해자 유족, 미신청유족회 결성


- 소설집 <벌레들>은 2013년 10월에, 그리고 만화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은 2015년에 출간되었는데요. 이 소설이 소설가의 상상력에 의한 창작소설이라기보다는 가족사의 성격이 강해서 애착이 크실 텐데요.
"글쎄요. 확인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어요. 다만 단편소설집의 한 단편으로 묻혀 버리지 않고 만화로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이 뜻 깊다고 생각해요. 제가 알기로는 서울문화콘텐츠재단에서 해마다 프랑스 국제만화제 출품을 위해 우리나라 만화 세 권을 선정하거든요. 그 중 한 권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 저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선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문학으로 볼 때 화자를 나무로 선택했다는 점이 색다르면서도 좋았어요. 최 선배께서는 사람의 눈이 아닌 나무의 눈으로 볼 때 더 냉철하겠다는 착안을 하셨다고 말씀을 하셨는데요. 문학으로 볼 때는 그 냉철함이 비극을 더 강렬하게 느끼게 한다는 거죠. 또 하나는 시골에 사는 입장에서 충주만이 아니라 제가 사는 단양이나 옆 동네인 제천도 이런 희생자들이 많았으리라 생각하는데요. 충주의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읽혀서 지역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는 고장의 역사적 사건들을 살펴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요. 아직 알려지지 않은 현대사의 비극이 너무도 많으니까요.
"그래요. 사실 지역에 보면 숨은 인재들이 있어요. 충주만 해도 세상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역사를 조사하고 연구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지금도 마을 곳곳을 다니면서 증언을 채록하고 다녀요. 제가 도움을 받고 있는데요. 그 분이 이번에 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지역사를 연구하면 외지에서 손님들이 오셨을 때 이미 알려진 관광지만 가는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요."


- 마지막으로 2006년에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고 나서 아버님께서 가문에 끊어진 문집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고 기뻐하셨다는 글을 쓰신 적이 있지요.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은 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의 이야기잖아요. 아들이 말 못하고 평생 괴로워하면서 쌓아두었던 한을 다룬 글을 쓴 건대요. 그것도 2010년 제1회 합동유령제에서 팸플릿 형태로 만들었다가 단행본으로 나오게 되었는데요. 만화를 덧붙여 시각적으로 형상화 했고요. 아버님께 특히 뜻 깊었으리라 짐작해요.
"아버지께 이 만화책을 드렸는데요. 꼼꼼히 다 읽어 보시더라고요. 아버지께서 원래 말씀을 잘 하지 않는 분이시지만요. 책을 좋아하시는 데다 제가 문학상을 타고, 합동위령제에서 군인의 사죄, 정부 차원의 배상까지 이끌어내는 모습을 다 보셨으니까요. 이제는 보도연맹사건에 대해 한이 풀리셨으리라 봐요. 그나저나 아버지는 열렬한 새누리당 지지자입니다. 저와 정치에 관해서는 합의가 안 됩니다. 사실 그 쪽 사람들은 아버지에게는 가해자 집단인데요. 해결 안되는 문제입니다. 허허.


한 시간 동안 장대비 소리를 들으며 막걸리 대신 커피를 앞에 놓고 충주 21년차 선배농부와 단양 9년차 후배농부는 국민보도연맹사건이라는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를 한 시간 가까이 두런두런 나눴다. 멀게는 지난 66년, 가깝게는 유족회를 꾸리고 진실 규명과 배상까지 이끌어 내던 지난 10년 남짓한 세월 동안 겪어온 이야기들이다.


충주에서 조사를 신청했던 18명의 희생자 가족은 배상까지 받고는 대분분 위령제 참가를 그만 두었다. 이 사건을 이제는 지나간 사건으로 여기고 세월 강물에 떠나 보냈기 때문이다. 이후 20여 명의 피해자 가족이 '미신청유족회'를 꾸려 입법청원을 하고 있다.


이 분들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싸움을 하고 있다. 배상을 받은 희생자 가족과 미신청유족회 희생자 가족을 다 합쳐 봐야 겨우 40명이 되지 않는다. 700여 명 중 겨우 5퍼센트가 조금 넘는다. 청탁 받은 원고를 쓰기 위해 칩거에 들어가는 최용탁 선배의 마지막 말이 긴 여운으로 남는다.


"국가폭력은 소멸시효가 없습니다."
#충주 국민보도연맹사건 #최용탁 #민간인학살 #사시사철 #아들아, 넌 어떻게 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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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에서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는 단양한결농원 농민이자 한결이를 키우고 있는 아이 아빠입니다. 농사와 아이 키우기를 늘 한결같이 하고 있어요. 시골 작은학교와 시골마을 살리기, 생명농업, 생태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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