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원증사원신분증
박만순
66년 전인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며칠 후. 충북지역 보도연맹원들이 경찰서와 지서의 소집연락을 받았다. 이웅찬도 그중 한사람이었다.
그해 7월 7일, 이웅찬은 수동 육군병원 뒤편에 있던 자취방에서 앰프소리에 귀를 귀울였다. 방송에서는 "보도연맹원들은 청주상과대학으로 모이라"는 목소리가 반복되었다. 점심을 먹은 후 청주상과대학 운동장으로 간 그는 잠시 후 청주경찰서 무덕전으로 이송되었다. 무덕전은 경찰들의 체력 단련장으로, 주로 유도를 배우던 곳이다. 무덕전에는 수 백 명의 보도연맹원들이 있었고, 이웅찬이 아는 얼굴도 더러 있었다.
평소 그를 알고 있던 경찰이 형사들과 수군거렸다. 좌익활동과는 무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웅찬이 자네, 담배 좀 사 갖고 오게!"라며 담배 값을 주었다. 사복형사와 이야기를 나눈 경찰은 상업학교 축구부 출신인 이웅찬을 알아보고 그를 살려 줄 셈으로 담배 심부름을 시킨 것이다. '내놓고 도망가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알아서 도망가겠지'라는 마음으로. 하지만 눈치를 채지 못한 그는 담배를 사 들고 다시 무덕전을 찾았다. 자신이 특별히 지은 죄도 없고, 죽으러 끌려 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낮엔 화물기사, 밤엔 청주상과대학생경찰은 돌아온 그에게 다시 심부름을 시켰다. "왜 이렇게 빨리 왔냐? 천천히 사 와라. 다른 볼 일도 있으면 보고 오라. 친구도 만나고 오라"고 이야기 했으나, 순진한 이웅찬은 번번히 무덕전으로 돌아 왔다. 이렇게 한 것이 세 번이나 되었고, 결국 그는 다른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미원·보은 방향으로 끌려가 학살되었다.
66년 전 그날, 그렇게 끌려간 그는 여태 돌아오지 않고, 가족들의 가슴 속은 새카맣게 타기만 했다. 당시 4살이던 꼬마 이능원은 칠순 노인이 되어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길 기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의 손에는 아버지의 체취가 남아 있는 사원증이 들려 있었다. 1949년에 만들어진 '사원신분증'은 이웅찬이 충북화물자동차회사(사장 손해광) 직원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능원(청주시 사창동)은 자신의 아버지가 전형적인 주경야독형의 인물이었음을 회고한다. "아버지는 낮에는 충북화물에서 기사로 일하셨고, 밤에는 청주상과대학에서 공부를 하셨죠", "축구선수로도 유명해서 충북 도내 뿐만 아니라 전국을 다니며 시합 했다"고 한다.
당시 청원군 북일면 주중리가 고향이었던 그는 수동에서 여동생과 자취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고향에서는 아내가 시부모와 시조부모를 층층시하로 모시고 있었다. 이렇게 평범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하던 그가 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끌려갔을까?
"민청에 가입하라고 해 도장 찍은 게 그 이유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