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산관과 사당 사이에 있는 침천정은 1577년(선조 10) 정곤수가 상주목사로 있을 때 읍성 남문 앞에 건립했다. 본래 이름은 연당(蓮堂)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고, 1612년(광해 4) 중건되었다. 1914년 일제의 의해 읍성이 헐릴 때 함께 사라질 위기에 몰렸으나 지역 유지들이 사비를 들여 구입, 현재 위치로 옮겼다. 그때부터 이름도 침천정으로 바뀌었다.
정만진
호장 박걸은 판관 권길을 도와 의병을 모집하러 다녔던 사람이다. 그는 권길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에도 옆을 지키고 있었는데, 주위에서 지금이라도 피신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박걸은 "판관께서 나라를 버리지 않고 죽음을 선택하셨는데 어찌 내가 혼자 구차한 삶을 도모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분연히 떨쳐 일어나 적들에 맞서다가 이윽고 죽음을 맞이했다.
류성룡의 매부인 김종무도 이날 죽었다. 그는 (경남 함양) 사근도 찰방(종6품)이었는데 고향 상주가 적들의 침탈 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을 수백 리를 달려와 참전했다가 장렬히 순절했다.
그는 먼 길을 달려 북천까지 달려왔지만, 그러나 애당초 이길 수 있는 전투가 아니었다. 그것을 모르고 온 것도 아니었다. 이윽고 죽음의 순간을 눈앞에 둔 김종무는 지니고 있던 부채를 종 한룡에게 주면서 "이것을 집에 전해다오." 하고 당부하였다.
하지만 한룡은 전장을 떠날 수 없었다. 주인이 호통을 쳤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인을 지키고자 했다. 한룡은 말고삐를 잡은 채 주인과 함께 적의 칼을 맞고 죽었다. 이날 김종무의 재종질(육촌 형제의 아들) 김겸도 함께 전사했다. (김종무에 대해서는
<천길 낭떠러지 사이로 난 길, 심장이 '쫄깃'> 기사 참조)
김종무, 한룡, 윤섬, 박호... 모두들 비극적 순절순변사 이일의 종사관으로 상주까지 내려와 북천전투에 참전했던 윤섬도 이날 적진에서 죽었다. 그는 본래 종사관이 아니었다. 이일이 처음 종사관으로 선임한 이는 윤섬의 친구였다. 홍문관 교리(정5품)였던 윤섬은 이일을 찾아가 "친구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데 다른 형제도 없습니다. 외아들이 전쟁터에 뽑혀 간다고 하니 홀어머니께서 침식을 잊고 밤낮으로 울고 계십니다." 하면서 "제가 친구를 대신해 종사관으로 가겠습니다." 하고 자청했다.
이일이 허락했지만, 이번에는 윤섬의 어머니가 "왜 스스로 죽을 땅에 가느냐?" 하고 말렸다. 윤섬은 바닥에 엎드려 절하며 "(왜적들이 쳐들어 왔으니) 부모의 은혜와 나라에 대한 의리를 모두 온전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했으니 사사로운 정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일이 도망 직전 윤섬에게 "헛되이 죽느니 뒷날의 쓰일 데를 생각하는 것이 현명하리." 하며 함께 가자고 권했다. 윤섬은 "장차 무슨 낯으로 임금을 뵙겠소? 남아가 오늘 같은 지경에 처했으니 나라를 위해 죽음으로 충성할 뿐이오." 하며 거절했다.
경상감사 김수의 사위는 자살. 그를 데리고 온 순변사는 도망홍문관 부수찬(종6품)으로 윤섬과 함께 일했던 박호도 북천전투에 참전했다. 과거에 장원급제한 박호는 경상감사 김수의 사위였는데 당시 26세로 윤섬보다 여섯 살 아래였다. 박호는 이일이 종사관으로 데려 가겠다고 조정에 강력히 요청한 결과 북천전투에 참전했다.
이일은 박호를 데리고 가면 그의 장인인 경상감사 김수가 전쟁 수행에 적극 협조해 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전투는 대패로 끝났고, 박호는 적들에게 쫓겨 깊은 산골짜기까지 들어갔다. 그때 옆에 함창사람 이언룡이 있었다. 박호가 이언룡을 보며 "나는 순변사의 종사관으로, 전쟁터로 나올 때 임금께서 내리는 술을 받는 은혜를 입었소. 그런데 이렇게 전쟁에서 패망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임금을 다시 뵙겠소, 그대는 내가 죽거든 이 칼을 꼭 나의 집에 전해주고, 내 시신은 적삼으로 싸서 이곳에 두시기 바라오." 하고는 칼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조방장 변기의 종사관으로 전투에 참전했던 이경류도 이날 상주판관 권길과 같은 자리에서 순절했다. 이경류가 전사한 후 그가 타던 말이 주인의 피 묻은 옷과 유서를 물고 상주에서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까지 500리를 달려와 주인의 죽음을 전했다.
죽은 주인의 옷과 유서를 500리 떨어진 집에 전해준 말역관 경응순은 이날 포로가 되었다가 풍신수길의 편지와 공문 한 통을 조선 조정에 전하는 임무를 띠고 풀려났다. 조선 조정은 일본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소서행장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덕형을 회담차 충주로 내려보냈다. 경응순은 회담이 열리기 전에 이미 충주가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일본군에 접근하다가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에 잡혀 살해당했다.
경응순의 이야기는 <선조실록> 1592년 4월 17일자에 실려 있다. 실록은 '적이 상주에 이르러 통사(通事) 경응순 편으로 편지를 보내어 (조선이 우리에게 명으로 가는 길을 빌려주면 전쟁을 할 까닭이 없다는 취지의 말로) 화친을 청했다.'면서 '상(上, 임금)이 이덕형을 보내어 침범한 이유를 물으려 했는데 덕형이 용인에 이르렀을 때 적이 벌써 재(문경 새재)를 넘은 까닭에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라고 전한다.
경응순은 <선조실록> 1592년 8월 27일자에도 등장한다. 경상도 관찰사 한효순이 선조에게 '(일본이) 화친을 청하는 서신을 방어사 김응서에게 보내 왔습니다.'하면서 보고서를 띄웠는데, 한효순의 치계에는 일본이 '상주에서 전투가 있었을 때 통역관 경응순을 사로잡아 강화하자는 보고를 드리라고 했는데 끝내 (우리는) 그 회답도 받지 못했고 대왕께서 서울을 피하여 평양으로 가셨습니다.' 하는 표현이 들어 있다.
이는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자에도 실려 있다. 수정실록에는 '동지중추부사 이덕형을 왜군에 사신으로 보냈다. 상주 패전 때 왜역관(倭譯官) 경응순이 포로로 잡혔는데, 소서행장이 풍신수길의 편지와 예조에 보내는 공문을 경응순에게 주어 내보내면서 말하기를 "(우리 일본군이) 동래에 있을 때에 울산군수(이언함)를 생포하여 서계를 보냈는데 지금까지 회보가 없다. 조선이 강화할 의사가 있으면 이덕형을 보내어 4월 28일 충주에서 나(소서행장)와 만나자."라고 했다.' 등의 기사가 실려 있다.
북천 전투 대패의 세 가지 이유그렇게 상주 북천 전투는 끝이 났다. 비록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중앙군이 최초로 일본군과 맞붙은 싸움에서 조선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임진전란사>의 이형석은 북천 전투를 두고 일단 '몇 백 명의 농민들을 모아놓고 근 2만 명의 적의 진격로를 가로막는다는 사실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적의 정세라도 먼저 알고 보보저항(步步抵抗, 차근차근 저항)할 준비라도 했어야 마땅한데 전연 적정 탐지에는 뜻을 두지 않고 다만 군사 조련을 하고 있었고, 더구나 상주읍성을 이용하지 못한 것은 가석(可惜, 슬픔)하기만 하다.'라는 총평을 내린다.

▲ 상주 북천전적지 내에 있는 상산관(유형문화재 157호). 1328년(충숙왕 15) 중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지어진 건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불탔고 1606년(선조 39) 재건되었으며 1991년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망궈례를 지냈던 곳이자, 중앙 관료들이 내려오면 묵던 객사였다.
정만진
우인수는 논문 '상주 북천 전투의 성격과 그 의미'에서 북천 전투의 패전 원인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약했다. 우인수는 '일본군의 빠른 북상으로 인해 제승방략의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채 약점이 크게 노출된 점'을 첫째 패인으로 들었다.
그는 둘째 원인으로 '군사의 규모 면에서 압도적인 열세였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북전 전투의 경우 조선군이 팔구백 정도에 불과하였던 데 비해 일본군은 그 20배가 넘는 1만8천에 달했던 것'이라면서도 그는 '이 정도 병력의 차이로는 어떤 장군이 지휘를 맡아 어떤 식으로 싸우든지 승산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버티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어 뒤쪽 부대의 대비 태세를 갖추는 데는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내 농성전을 하지 않은 점을 아쉽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셋째 패인을 그는 '가장 뼈아픈' 원인으로 지목했다. '지휘관이 경계에 실패'하여 '진법 훈련 중에 기습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였다, 더구나 하루 전날 일본군의 근접 소식을 전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언비어로 간주하고 말았'으니 필연적으로 대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진단을 내렸다.
전적지 둘러보기 전에 북전 전투에 대해 충분히 학습해야이제 북천 전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자부한다. 북천전적지를 뜻깊게 둘러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정문의 '壬亂北川戰跡地(임란북천전적지)' 현판 아래를 통과한다. 물론 그 전에 정문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임란북천전적지 안내도'는 먼저 보았다.
정문에서 가장 먼 사당에 ①번이 매겨져 있고, 그 뒤로 ②내삼문, ③전시관, ④비각, ⑤재실, ⑥외삼문, ⑦전적비, ⑧침천정, ⑨상산관, ⑩순국비, ⑪태평루, ⑫관리사무실, ⑬화장실, ⑭정문 식이다. 볼 것이 많아 흡족하다. 다만 안내도의 번호는 답사 순서를 말해주는 것은 아닌 듯 여겨져 새로 순서를 정한 다음 출발한다. (원고가 너무 길어 나누어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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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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