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치잡이 배
강은경
나는 낚시에 열중한 선원들을 내려다보며, 오카얀의 노래를 듣고, 오카얀의 얘기를 들었다.
"벌써 30여 년 전 일인가. 마닐라에서 보컬 콘테스트에 참석했었지... 내가 무대 위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열창을 하고 있었을 때였어... 어느 순간 갑자기 관객들이 사라져버린 거야. 관계자들까지... 도망가기 바빴는지 내겐 어떤 신호도 주지 않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노래에 심취해... 무대 뒤쪽에서 큰 불이 난지도 모르고... "그녀의 얘기는 끝이 없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 순회공연을 다닌 일화며, 인신매매로 팔려온 아가씨들을 탈출시킨 모험담까지. 그녀는 화려했던 청춘무대로 돌아가 있었다. 출렁출렁 흔들리는 열대바다의 방카 위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그녀의 눈빛이 어쩐지 애잔해 보였다. 내가 카메라를 들자 그녀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외로 빼며, 손을 저었다.
오후 8시, 슬슬 배가 고파왔다. 비쩍 마른 노인이 숯을 지펴 화덕 위에 밥을 하고 생선을 구워 놓았다. 선원들은 아무 때고 각자 알아서 접시에 밥과 생선을 담아갔다. 다 같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위계질서를 잡으려고 어깃장을 부리거나 큰소리를 치는 사람도 없었다. 본격적으로 멸치잡이 조업에 들어가기 전까지 각자 알아서 밥을 먹거나, 그물을 수선하거나, 낚시를 하거나, 졸거나... 얼굴에 표정도 별로 없고, 참 조용한 어부들이다.
화장실 없는 배에서 신호가 오다오카얀과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오카얀이 솥째 쪄온 카사바(cassava) 그리고 밥과 구운 생선, 아주 비싸다는 생선 '라푸라푸' 한 마리까지.(물 빠진 빨간색 셔츠를 입은 사내가 잡아 구워준 것이다.) 성찬이었다. 고구마처럼 생긴 카사바는 처음 먹어보는 열대식용작물이었다. 담백한 맛에 끌려 자꾸 손이 갔다. 녹말, 칼슘, 비타민 C가 풍부하다니.
식곤증이었나? 어쩌다가 나도 모르게 일찍 잠이 들었나보다. 잠에서 깨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오카얀이 옆에 누워 자고 있었고... 선원들도 모두 방카 여기저기 누워 자고 있었다. 밤바다는 쥐 죽은 고요했다. 손목시계를 보니 밤 11시 10분. 노을이 가신 검푸른 서쪽 하늘에 붉은 초승달이 떠 있었다.
으으... 으... 어쩌지? 방관이 터질 것 같았다. 걷잡을 수 없이 끓어오르는 요의. 나는 조심조심 엔진실 지붕 위에서 내려서 방카 날개 끝으로 나아갔다. 누워있는 선원들을 피해가며. 자칫 뻥뻥 뚫린 나무 사이로 발이 빠질 수 있으니... 아, 젠장! 잠에선 깬 누군가가 눈을 번쩍 뜨고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도 할 수 없지... 긴 치마처럼 허리에 사롱을 두르고 묶었다. 사롱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간신히 바지를 내렸다. 아슬아슬 바다를 향해 날개 끝에 앉았다. 바다로 떨어지는 오줌줄기소리를 누가 들을까, 신경 쓰였다. 정신 차리자. 이러다가 내가 바다로 떨어지겠다. 어쨌든 곡예를 하듯 방광을 비우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제자리로 돌아와 또 깜빡 잠들었다. 내가 다시 잠에서 깼을 땐 오전 4시였다. 오카얀까지 모두 깨어있었다. 3시, 5시 두 번 그물을 투하한다고 했는데... 선원들이 벌써 선미 쪽에서 한참 조업 중이었다. 너비 한 팔 쯤 벌어진 나무 틈 사이를 두고 양쪽에서 사내들이 온힘을 다해 그물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나도 거기 끼고 싶었지만 한 발 들어설 틈도 없어 보였다.

▲ 멸치잡이
강은경

▲ 멸치잡이
강은경
그물을 끌어올리는 바다사내들의 팔뚝 근육이 불뚝불뚝... 마침내 그물 속에서 반짝반짝 튀어 오르는 은빛 멸치 떼. 나는 문득, 그동안 팔라완 여행을 하며 스킨스쿠버다이빙을 하거나 스노클링을 하며 봤던, 바다 속에서 유영하던 그 물고기 떼를 떠올렸다. 보는 눈이 황홀하도록 찬란한 은빛으로 반짝이던 아름다운 생명체들. 이제 어부의 손에 낚여 다른 세상에서 팔딱팔딱 운명을 다 해 가는 생명체들을 바라봐야 했다.
5시쯤, 두 번째 그물을 올렸다. 날이 밝아져가는 시각이었다. 싱글벙글, 바다사내들의 낯빛이 환해졌다. 조업이 끝나서 그런가. 여전히 말들은 별로 없지만 분위기가 훨씬 밝아졌다.
"오늘 물고기를 많이 잡았대! 공치는 날도 많은데... 어제는 살라이살라이만 한 바구니 잡았고. 그런데 오늘은... 우리가 따라와서 그런가봐!"오카얀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물고기 100킬로그램을 담는 바구니 ('라딴'이라 불리는 등나무 바구니)에 살라이살라이(아이 손바닥만 한 납작한 은빛 물고기) 네 바구니, 멸치 두 바구니를 잡았다. 수확이 좋은 거란다. 바다사내들의 미소가 행복한 아침이었다. 한 달 수입이 한국 돈으로 20여만 원인 어부들이지만. (3월 달부터 7월 달까지, 보름달이 뜨는 전후 며칠 빼고는 매일 밤바다에서 멸치를 잡는단다.)
방카는 속도를 최고로 높여 푸르른 아침 바다를 가르며 북쪽으로 달렸다. 한 척, 두 척 나타난 다른 멸치잡이 배들도 달렸다. 나는 일을 전혀 거들지 못하고 구경만 해서 그런지, 그렇게 돌아가는 길이 좀 머쓱했다.

▲ 조업 끝내고 돌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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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내일도 같이 가자는데.""네? 정말요?""오늘 강이랑 같이 나가 운이 좋았다고, 내일도 또 같이 가자는 거지."오카얀이 어부들의 말을 전해주는데,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기분이 좀 가벼워졌다. 오전 8시께 비아비아 마을에 도착했다. 빙빙과 마을 사람들이 마중나왔다.
웃는 얼굴로 돌아온 '참 조용한 어부들'

▲ 만선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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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잡은 생선을 뭍으로 옮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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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바구니가 뭍으로 올라갔다. 곧바로 어른 아이 달려들어 손길 바쁘게 종류별로 선별작업에 들어갔다.(멸치는 빨리 죽고 빨리 상한단다.) 빛깔, 모양, 크기에 따라 다른 종류의 멸치들이 현지어로 남남, 딜리스, 또리속, 수사이드. 이렇게 네 종류라며 설명을 들었지만 나는 그 작은 물고기들을 잘 분간할 수가 없었다. 똑같아 보이는데... 아, 이건 등이 더 푸르고 덩치가 크네!

▲ 멸치 종류별로 분류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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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멸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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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된 멸치는 그 즉시 옆에서 소금물에 삶아졌다. 이때는 불 조정과 삶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했다. 아무튼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일련의 작업속도가 아주 빨랐다. 삶아진 멸치는 덕장으로 옮겨져 펼쳐졌다. 자글자글 열대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하루면 바싹 마른단다.

▲ 멸치 삶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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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멸치 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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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잡이 사업이 2년째라는 안 사장은 한국에 판로를 뚫고 싶어 했지만, 쉽지 않은 것 같았다. 한국인이 먹는 멸치 종류도 다르고, 가격설정도 그렇고... 한 시간 반 만에 작업이 다 끝나자 아침밥이 나왔다. 나는 마른 멸치를 머리까지 통째로 고추장에 찍어먹었다. 칼슘과 단백질이 풍부한 그 영양덩어리를 쫄깃쫄깃 씹으며.
그 작은 물고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장용철 시인의 <멸치의 열반>이라는 시를 가물가물 떠올리며.
눈이 꼭 클 필요 있겠는가 검은 점 한개 콕 찍어 놓은 멸치의 눈 눈은 비록 작아도 살아서는 바다를 다 보았고 이제 플랑크톤 넘실대는 국그릇에 이르러 눈 어둔 그대들을 위하여 안구마저 기증하는 짭짤한 생 검은 빛 다 빠진 하얀 눈 멸치의 눈은 지금 죽음까지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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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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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떠났다가 멸치잡이 배를 타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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