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넥슨 성우 교체 사태를 촉발시킨 메갈리아4의 티셔츠. 'girls do not need a prince'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메갈리아4
반메갈리아 여론은 메갈리아를 '반사회적 혐오 사이트'라 호명하며 주변화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특이한 점은 반메갈리아 여론의 주축이 '삼일한' '김치녀' 같은 적나라한 여성 혐오를 배설하는 일베가 아닌, 일베와 불구대천 원수인 야권 성향 남초 커뮤니티라는 거다. 설왕설래에도 불구하고, 메갈리아가 페미니즘에 걸맞은 실천을 다수 해왔다는 사실은 '팩트 폭격'이다. 성차별에 대항하는 노력을 지지하는 건 진보적 태도의 기본이다. 그런데 왜 진보를 지지하는 이들이 자신의 이념을 배반하는 걸까.
가장 쉬운 대답은 저들이 사회경제적으로는 진보주의자지만 정치문화적으로는 보수주의자이며, 사회에 구조화된 불평등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들이 왜 메갈리아를 미워하는지, 좀 더 세밀하게 해부하며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우선 메갈리아가 한국 남자를 비하하기 때문이다. '한남충' '실좆' 같은 비하 표현 말이다. 남성들은 주먹을 쥔 상태에서 엄지와 검지를 나란히 펼친 모양의 메갈리아 트레이드마크가 한국 남자 성기 사이즈를 폄하한다며 화를 낸다.
반대로 남초 커뮤니티에선 된장녀 같은 표현이 유행했고,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언사가 빈번하고, 한국 여자 가슴이 '절벽'이라는 농담이 넘쳐난다. 그렇다고 자신들을 반사회적 사이트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이 불평등한 담론지형은 남성들이 '반사회적 사이트' 메갈리아로부터 보호하려는 '사회적 가치'가 가부장 질서임을 암시한다.
다음은 메갈리아가 일베와 같은 말버릇을 쓴다는 점이다. 메갈리아는 일베를 미러링 했지만, 진보 커뮤니티 안에서 일베가 반사회적 사이트라는 인식이 불변의 진실인 상황에서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거부반응이다. 여기서 일베에 대한 진보진영의 일관된 대응논리였던 '타자화'와 '낙인찍기'가 초래한 부작용을 알 수 있다. 낙인의 논리가 위험한 건 무언가를 배제한단 사실이 아니다. 무엇을 왜 배제해야 하는지 질문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낙인찍기는 재론의 여지없는 절대악을 배출한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무엇이 악인지 사유하지 않는 상투적 정의감, 악의 평범성을 사산한다. 이렇게 배출된 절대악은 대상이 아닌 표상이다. 낙인을 붙인 대상에 빗대는 것만으로 다른 대상을 퇴출하는 낙인찍기의 연쇄작용이 일어난다. 보편자에게 타자로 인식되는, 사회의 편견에 노출된 소수자일수록 낙인의 표적이 되기 쉽다. 소수가 다수에게 낙인을 찍을 수는 없다. 정의로운 낙인은 꼭 대가를 지불한다. 일베를 왜 추방하는지 토론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낱장의 유사성으로 메갈리아를 일베에 빗대 추방하려는 건 예정된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메갈리아가 인의 도덕을 월장한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메갈리아는 도덕적 통념을 필요 이상으로 모욕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령 '한남충들이 위안부 문제에 열 내는 건 자기들이 학대할 여자를 외국 놈에게 뺏겼기 때문'이라는 게시물은 훨씬 정제된 방식으로 취지를 전달할 수 있다. '애비충' 같은 말도 가족주의에 익숙한 많은 사람은 아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집단적 도덕관념은 그만큼 공유하는 사람이 많고 기반이 단단해서 하나의 극단적 사례를 보여주는 것으로 상대를 주변화할 수 있다.
메갈리아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며 반대 여론과 논쟁해온 사람으로서, 메갈리아가 너무 옹호하기 까다로운 방식으로 운동을 한다고 느낀 것도 이런 대목이다. 하지만 이런 도덕관념이 사회적 가치와 꼭 포개지진 않음에 유의해야 한다. 나는 '애비충'이란 비속어로 사람들 앞에서 가족을 욕하는 사람과 사적으로 엮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런 사람을 사회적 차원에서 배제하는 건 다른 문제다. 일베가 고인 드립에 패드립이나 하는 사이트였다면 일베 유저를 KBS 기자 같은 공직에서 탈락시킬 결정적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걸 구분하는 데 진통을 겪는 건 한국이 공과 사를 분간하는 데 뻣뻣하고 도덕이 정치를 압도하는 사회란 뜻이다.
생각하건대 메갈리아는 계륵 같은 점이 있다. 만약 메갈리아 보다 온건한 제스처로 더 왕성하게 대중운동을 이끄는 플랫폼이 있었다면 여성주의 진영에서도 메갈리아에 훨씬 유연한 태도를 가져갔을 것이다. 메갈리아가 여성 혐오 논란의 최전선이 된 또 다른 이유다. 반메갈리아 여론은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과도한 당파적 논리를 취하지 말라고 상대를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뒤집으면 그만큼 한국사회에 페미니즘이 과소했다는 얘기다. 반메갈리아 여론은 메갈리아를 배제하는 데 사활을 걺으로써 현실에서 페미니즘을 과소한 자리로 역진시킨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가해자라고 불리길 거부하는 남자들 현 사태의 근본적 교착점은 다음 명제에 대한 합의가 이뤄질 가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이다.
"혐오란 개념의 사회적 정의상, 권력관계의 비대칭 구도를 전제하므로 '남성 혐오'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 말은 곧 여성이 사회적 약자라는 사실에 남성들이 승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양성 임금격차, 사회 고위직 성비처럼 그걸 뒷받침하는 사회경제적·정치문화적 통계로 '팩트 폭격'할 수 있는데 말이다.
MB 정부 이후 십여 년 간 진보담론은 절대 악에 대한 대항 서사와 2030 세대를 피해자로 호명하는 세대론의 두 축으로 조직됐다. 그것이 집약된 것이 2012년 총선 이전까지 선거를 야당의 승리로 이끈 2030 유권자 동원 전략이다.
세대론은 실업난과 저임금에 직면한 젊은 세대 현실을 의제화했단 의의가 있지만 여러 측면에서 비판받았다. 청년층보다 고령층의 빈곤이 심하다거나, 세대 내부에도 계층이 있다거나, 정작 이 담론을 고학력 중산층 청년이 소비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한편 세대란 단일 범주로는 교차적 권력관계를 담기 힘들 것인데, 젠더 문제도 거기 속한다. 가령 88만 원 세대라고 할 때, 남자 취준생과 여자 취준생의 입장이 얼마나 구분되었고, 젊은 여성이 겪는 특수한 고용차별이 충분히 조명되었는지 물어볼 수 있다.
세대론의 대유행을 이끈 도서 '88만원 세대'의 표지 그림은 한 젊은 남자의 풀 샷이다. 그는 품 큰 양복을 입고 서류 가방을 쥐고 선 채 맥없이 땅을 쳐다본다. 이건 상징적 이미지다. 세대론이 호명하는 '피해자'엔 고개 숙인 취준생, 윗세대처럼 직장과 내 집을 갖고 가정을 꾸리는 사회화에 실패한 '예비 가부장'의 이미지가 깃들어 있었다. 물론 이건 인상평 수준의 논의다. 그러나 현재 2030 남성들만큼 '약자/피해자라는 사회적 호명'을 집중적으로 세례 받은 세대는 없다. 그만큼 진보 진영의 세대론은 젊은 세대 현실을 비극적으로 묘사하고 연민의 논조로 기성세대에 죄의식을 요청하는 면이 있었다.
야권 성향 젊은 남성들이 사회를 인식하는 방식은 '헬조선'을 만든 절대 악(새누리/친일독재 잔당/TK·고령층 유권자·미개한 국민-타자)을 상정하고 사회의 피해자로서 자조하는 것이다. 권력관계를 선과 악으로 단순화하고, 악의 맞은편에 있단 사실 만으로 선함을 자부하며, 피해자라는 자기 연민에 파묻힌 이들은 '가해자로서의 자신'을 상상하지 못한다.
절대 악과 절대 선으로 나뉘는 세계 속에서, 가해자로 분류되는 건 피해자로서 누리던 도덕적 정당성과 담론적 지위를 깡그리 잃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이다. 여성이 약자라면 강자가 있고, 여성이 차별 구조 속에 피해자라면 그 구조의 촉수로 행동하는 가해자가 존재한다. 그것을 자각하는 건 가부장 인습의 수행자요, 성차별 제도의 수혜자로서 함께 구조를 바꾸는 책임을 지는 윤리적 자각이다.
내가 타락했다고 존재를 폐기하는 일이 아니다. 이 '강자/가해자'의 자리를 삭제해버리니까 이항대립이 무너지며 여성이 약자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진다. 얼마 전 정의당 게시판에 한 청년 당원이 써서 화제가 된 글이 있다. '연애도 돈벌이도 넉넉하게 해보지 못한 우리는 사회의 가련한 피해자다. 왜 윗세대가 만든 성차별 사회의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려 하느냐'는 항변이었다. 청년세대를 피해자로 과잉 호명하며 담론을 조직해 온 세대론의 반작용을 이보다 자의식 넘치게 보여줄 수 있을까.
한국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제도적 돌봄이 부실한 나라다. 그런 만큼 스스로가 약자임을 입증하고 호소함으로써 여론과 담론의 후원을 등에 업는 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다르게 요약하면, 메갈리아 사태는 근 10년 간 무대에 있던 '세대론/헬조선'에서 '여성주의/반여성혐오'로 진보진영의 담론이 교체되는 순간이다. 차후의 담론을 이끌고 그 수혜를 입을 사회적 주체를 가리는 힘겨루기, 공인된 '피해자'의 지위를 놓고 벌어지는 싸움이라 할 수 있다.
'가해자로서의 감수성 부재'는 여성 혐오 의제를 특정 국면에서 굴절시키는 요인이다. 삶의 어떤 단락에선 자신이 힘을 가진 가해자일 수 있다고 상상하고 인정할 줄 아는 능력은 사회 구성원 저마다가 배양해야 할 과제다. 이는 메갈리아 진영에도 시사점을 준다.
강자와 약자는 교차적으로 얽힌 상대적 개념이다. 과거 메갈리아에서 성소수자 혐오 표현으로 논란이 있었고, 워마드에선 성소수자 및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이 흘러넘친다. 또한 한국 남성을 '한남충'이라고 악마화/타자화 하는 건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를 떠나 세상을 선과 악, 절대적 가해자와 절대적 피해자의 양 극으로 분리하여 권력관계의 교차성과 유동성을 간과하게 할 수 있다. 피해자, 약자라는 정체성을 운동의 핵심 동력으로 태워 온 메갈리아 또한 이 점을 성찰할 이유가 있다.
공론장을 만들기 위한 조건 미러링의 의의는 뭘까. 내면의 여성 혐오를 꼬집어 보여주며 남성들을 부끄럽게 하는 거? 그렇지 않다는 건 현 상태를 보면 명확하다. 여성들이 찬 '코르셋'(가부장주의 인습)을 깨닫게 하고 서로를 계몽했다는 의의는 있겠다. 내가 볼 땐 그것도 부차적이다.
미러링의 가장 큰 의의는 젠더 이슈를 사회의 갈등축에 올려놓고, 혐오란 키워드를 첨예하게 부상시켰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 여성 혐오와 성차별이 뿌리 뽑힌 적 없다는 사실에 어지간하면 동의할 거다. 그러나 젠더 이슈는 늘 은폐돼있고 부차적이며 보이지 않는 갈등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첨예한 갈등축은 진보와 보수였고, 재벌과 노동으로 호명되었고, 지역갈등으로 전치되었다.
사람들은 '남녀 갈등'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얘기하고, 극단으로 치닫는다며 개탄스러워하지만 진실의 한 면만 본 것이다. 갈등은 정치의 시작이며, 정치는 갈등을 다루며 성립한다. 미러링은 남녀문제를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로 공인한 것으로 의미가 있다.
이것은 가부장 인습을 패러디하여 상대를 도발하는 것은 물론, 피아의 전선을 첨예하게 긋는 미러링의 속성 덕분이다. 미러링은 남용될 한계를 필연적으로 내포한다. 미러링의 타깃과 진의가 발화자의 부연에 따라 규정되는 이현령비현령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상대편'은 미러링을 최대한 악의로 해석할 소지가 있으며, '우리 편'은 미러링을 최대한 선의로 옹호할 동기가 있다는 뜻이다.
'나쁜 혐오'에 맞서 '좋은 혐오'가 출현했을 때, '관전자'들은 혐오와 혐오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받는다. 가령 페이스북 코리아는 김치녀 페이지는 놓아두고 메갈리아 페이지만 삭제하는 '선택'을 내렸다. 기울어진 사회의 젠더 권력지형이 폭로된 것이다. 미러링을 경유한 메갈리아에 관한 논쟁은 청군과 백군이 예비 전력 없이 동원되어 줄다리기를 하는 형세에 비유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미러링의 좋은 점이면서 나쁜 점이다. 이슈를 둘러싼 중간지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미러링은 의의가 분명하지만, 한계와 시효도 명확한 전략이다. 혹자들이 말하듯, 반격의 꼬투리를 주고 소수자를 향한 빗나간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결과 배제만으로 이뤄지는 정치는 없다. 현실에서 이념이 승리하려면 더 많은 동지를 포섭하고, 요구사항을 조율하기 위한 거점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진영과 진영 사이, 총성과 포성이 소거된 중간지대다.
현재 정치 집단이 섣불리 사태에 끼어들지 못하는 건 그들의 무능함도 있겠지만 '성대결 양상'이 극치에 달한 현실적 이유도 있다. 남녀 유권자 수는 50대 50이다. 한쪽을 편드는 순간 나머지 전부를 잃을 수 있다. 당면한 현안에 제도정치가 개입할 유인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적대가 헐거운 중간지대를 마련해주는 게 좋다.
소라넷 폐쇄라든가 맥심 전량 회수라든가, 메갈리아의 운동이 성과를 내며 흐름을 주도하던 때, 미러링을 폐기하고 다른 전략으로 이행하는 것이 가장 승리적인 전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사 체계와 조직계통이 없는 온라인 운동의 특성상 이런 전략적 결단은 이뤄지기 어렵다. 미러링에 대한 시시비비가 끊이지 않고, '혐오에 혐오로 맞서지 말라'는 비난에 수세에 몰리는 상황은 늦든 빠르든 찾아왔을 것이다.
이선옥 작가는 미디어오늘에 기고한 글에서 '혐오에 혐오로 맞서는 것'을 지양하고 "공론장을 만들자"라고 제창했다("메갈리안 해고 논란? 이건 여성 혐오의 문제가 아닙니다.", 미디어오늘, 2016.07.25.). 이건 곧 협상이 가능한 공간을 창출하자는 뜻이다. 협상은 힘이 대등한 사람 사이에 성립한다. 주변부로 밀려나 보이지 않는 자들, 사회에서 몫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대화의 테이블에서 처음부터 배제돼있다.
공론장이 제 기능을 해서 차별을 해소할 수 있는 처지라면 처음부터 주변으로 소외되지도 않았을 거다. 사회 중심부에 선 자들이 은폐와 배제가 더 이상 효과가 없다고 깨달을 때, 상대를 다룰 수 있는 선택지가 대화밖에 남지 않았다고 깨달을 때, 서로를 동등한 상대로 인정하는 대화가 시작된다. 노조가 사측과의 대화 테이블에 앉기 위해 파업을 선행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ize 위근우 기자의 상대를 "제대로 된 논의의 장으로 끌어 앉히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지랄을 해서라도 깨갱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메갈리안, 분노가 이긴다", ize, 2015.09.16.).
메갈리아를 비난하는 여론은 메갈리아에게 반사회적 혐오 성향을 반성하라고 촉구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메갈리아 바깥의 사회에 메갈리아를 배제하라고 명령하는 중이다. 이렇듯 정당한 이유 없이 코너에 몰린 사람들에게 '성찰'을 촉구하는 건 윤리적으로 파산한 어법이다. 그것은 변화가 아니라 퇴장을 요구하는 것이다. 여론은 메갈리아가 이룬 양성평등 성과마저 부인하고, 남녀 대결을 조장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여성차별/여성 혐오라는 젠더 갈등을 사회 갈등의 목록에서 철거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선옥은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공론의 장을 만들자고 권고한다. 지당해 보이지만 무책임한 말이다. 오직 메갈리아를 축출하기 위한 명분으로 반인권적 행위를 하는 건 사회 사안을 합리적으로 논하기 위한 토대, 공론장의 규칙을 무너트리는 행위다. 이선옥처럼 저런 행태를 관용하는 주장은 공론장의 건설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행태가 부당하다고 중지를 모으는 것이 공론장을 건설하기 위해 지금 해야 하는 일이다.
남성들은 메갈리아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고, 그들을 보고 싶지 않다고, 명분과 체면을 내려놓고 실력행사를 하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그들이 느끼는 초조함이 한계 수위에 도달했다는 정황이다. "한겨레가 이럴 줄 몰랐다" "경향마저 이럴 줄 몰랐다" "정의당 너마저" 같은 반응이 튀어나왔던 것도 아군이 줄어들고 있다고 느끼는 고립감의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이 전선은 중요하다.
우리 사회가 미러링 이후의 여성운동을 함께 논의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소리 질러 억압"하는 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것이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존중한 채 진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원본이 된 '혐오'는 불문에 부치고 '혐오에 혐오로 맞서는 것'만 비판하는 게 아니라, '혐오'와 '그 혐오에 맞서는 혐오'를 모두 지양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지금은 메갈리아를 비판할 때가 아니라 메갈리아를 향한 비판에 맞서 더 많은 힘을 실어야 할 때다. 앞서 말한 구구한 비평적 시선을 모두 거두고, 나는 메갈리아를 지지한다. 여기엔 어떠한 조건도 유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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