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짐한 밥이 낯선 독일인 남편과 정주영의 절밥

한끼의 밥에서 '평등'과 '존업성'을 말하는 이유

등록 2016.08.09 13:59수정 2016.08.0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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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지구별을 떠난, 전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에게 들은 이야기 한 토막이 생각난다. 그가 불교계 행사에서 간혹 절집 인연을 소개한 사연을 들려준 적이 있었다. 가난하게 살았던 소년 시절에 그는 간 큰 일을 도모한다. 부친이 황소를 판 목돈을 가지고 친구와 집을 나선 것이다.


돈을 아끼려고 주린 배를 참으며 서울로 가는 길목에 멀리서 들려오는 목탁 소리를 듣고 산사를 찾아 한 끼 밥을 청했다. 마침 그 날은 절에서 큰 제를 올리는 날이어서 밥상이 푸짐했다. 지치고 허기지고 목마른 나그네 길이었으니 얼마나 꿀맛이었으랴!

너끈하게 배불리 밥을 먹고 감사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나려는데, 그 절 주지스님이 길 가다가 먹으라고 호박잎에 떡과 과일을 푸짐하게 싸주었다. 그 때 소년 정주영은 그만 가슴이 먹먹하더란다. 절집을 생각하면 그 때의 절밥과 주지스님의 백설기 떡이 생각난다고 했다.

예부터 절집 인심은 공양간 밥에서 나온다고 했다. 누구나 절밥에 얽힌 아름다운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금도 절밥 인심은 인색하지 않다. 관악산 연주암은 등산객에게 내어주는 비빔밥 공양으로 유명하다. 국수 공양을 하는 절도 많다.

 여러분은 넉넉한 시간, 여유있게 밥을 먹고 있나요? 아니라면 왜 그럴까요?
여러분은 넉넉한 시간, 여유있게 밥을 먹고 있나요? 아니라면 왜 그럴까요?참여사회

밥에 얽힌 또 하나의 추억이 있다. 작년 여름, 평소 친하게 지내는 지인의 여동생이 독일인 남편 그리고 딸과 함께 내가 살고 있는 일지암에 찾아왔다. 그 가족은 밝고 활기가 넘쳤다. 그런데 다소의 문화적 차이가 있다고 부인은 말했다. 차를 마시면서 말을 들어보니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독일인은 예의와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문화에 익숙하다. 그것이 사회 질서에는 좋은데 서로의 감정 교감에는 장애가 된다. 머리는 냉철하고 몸짓은 엄정한데 가슴이 허전하다. 그래서 부인은 인간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덕목이 '정情'이라고 생각하고, 이해관계와 규칙을 넘어 소소한 배려와 친절을 나누며 살고자 한다는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그런데 이런 정을 남편과 독일인들은 매우 낯설어하고 때로는 불편해 한다고 한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독일인 남편은 정의 개념이 잡히지 않는 눈치였다.

다음 날, 두륜산을 등산하고 일지암 건너편에 있는 진불암에 들렀다. 그 날은 마침 칠월칠석이어서 시골 할머니들이 많이 오셨다. 진불암 주지스님은 반갑게 맞이하며 "밥 먹고 가라"고 방으로 안내했다. 할머니들이 우리 일행을 보고 밥상을 차려 주었다. 외국인과 예쁜 딸을 보고 좋아하며 이것저것 밥상에 얹는다.


독일인 남편과 딸은 특히 냉미역국이 맛있는지 잘 먹었다. 할머니들은 자기들끼리 밥을 먹으면서 이쪽 밥상에 반찬이 떨어지면 다시 가져다주었다. 미역국도 한 그릇 듬뿍 가져다주었다. 후식으로 수박과 참외도 푸짐하게 내왔다. 시원하고 상큼한 매실차도 나왔다.

얼핏 곁눈으로 보니 독일인 남편의 표정이 다소 복잡하다. 상대방 식사량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막 퍼주는 이 상황이 생경한 모양이다. 다 먹고 마당에 나왔는데, 어느 할머니 보살님이 떡과 과일을 잔뜩 안겨준다.

몇 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소년 정주영이 받은 밥과 떡은 무엇이라도 '먹이고자' 하는 인심과 인정이었다. 그 날 밤 내가 독일인 남편에게 말했다. 오늘 진불암에서 할머니들이 우리에게 건넨 밥이 바로 '정'이라고. 사람의 자존감을 높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튼튼하게 이어주는 것에 진심과 사랑이 담긴 밥 이상의 것이 있을까 싶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명대사를 기억하시는지? 북한군 장교가 재미있고 화목하게 지내는 두메산골 사람들을 신기해하며 촌장에게 묻는다. "영감님! 대체 이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이 뭡네까?" 촌장이 답한다. "뭘 자꾸 많이 멕이는 것이제."

볼 일이 있어 서울에 가는데 아침 출근 시간대에 편의점 한 편에 서서 컵라면과 삼각 김밥을 먹는 청년들을 보면 심란하다. 씁쓸하고 애처로운 마음이 스며온다. 밥은 곧 평등이고 존엄이고 즐거움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밥은 여럿이 먹어야 하고 넉넉한 시간에 여유롭게 먹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밥 먹는 행위가 밥을 벌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내려앉았다. 구의역에서 세상을 떠난 젊은 청년이 남기고 간 컵라면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금수저, 흙수저, 헬조선이라는 말의 출현이 몹시도 우울하다. '밥'의 존엄성을 위하여 우리 시대의 '법'은 어떤 길을 찾아야 하는가? 밥과 법이 사이가 좋은 날은 언제 올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법인스님은 참여연대 공동대표입니다. 16세인 중학교 3학년 때 광주 향림사에서 천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대흥사 수련원장을 맡아 ‘새벽숲길’이라는 주말 수련회를 시작하면서 오늘날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과 <불교신문> 주필, 조계종 교육부장을 지냈고, 전남 땅끝 해남 일지암 암주로 있습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여유 #밥 #구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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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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