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밑에 숨은 굴뚝, 특별한 이유 있었다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⑩] 청송·영덕·영양 마을(5) 영덕 영해 원구마을 옛집굴뚝

등록 2016.08.11 09:41수정 2016.08.11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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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 말

a 난고정 굴뚝 난고정은 난고거사, 남경훈이 처음 지은 후, 현재 자리에 후손들이 다시 지은 정자다. 굴뚝은 아궁이와 굴뚝이 같은 쪽에 있어 특이하고 마루 밑에 숨어 있다.

난고정 굴뚝 난고정은 난고거사, 남경훈이 처음 지은 후, 현재 자리에 후손들이 다시 지은 정자다. 굴뚝은 아궁이와 굴뚝이 같은 쪽에 있어 특이하고 마루 밑에 숨어 있다. ⓒ 김정봉


볼 게 많고 들를 데 많은 영덕 영해, 나는 아직도 영해를 헤매고 있다. 영해에서 세 번째 들른 마을은 원구(元邱)마을. 인량마을 앞마을이다. 송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영양남씨, 무안박씨, 대흥박씨, 세 성씨가 시대를 달리해 들어선 집성반촌이다. 종택으로 영양남씨 난고종택, 무안박씨 경수당종택이 있고 대흥백씨 상의당 정자가 전한다.  


난고거사, 만취헌, 해안만은... 말맛 나는 난고종택

난고종택은 난고(蘭皐) 남경훈(1572-1612)의 종가로 원구마을 마을 숲을 살짝 비켜서 있다. 마을 보다 오래된 아름드리 느티나무 수십 그루가 마을을 보호하겠다고 나선 숲이다. 종택에는 정침과 만취헌, 사당, 별묘, 난고정이 있다.

정침(正寢)은 임란 때 영해의병장으로 활동한 남경훈을 기려 1624년, 아들 남길(1595-1654)이 지은 것이다. 남경훈의 호는 난고(蘭皐) 혹은 난고거사(蘭皐居士)다. 난향(蘭香) 가득한 언덕에 숨어 벼슬하지 않는 선비라는 뜻이다. 그는 호(號)처럼 살았다.

의병활동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집 뒤 동산에 있는 연못가에 난고정을 지었다. 35세, 1606년 일이다. 아버지를 대신해 옥고를 치른 후, 병을 얻어 41세에 벼락죽음을 맞이하였으니, 35세라 해도 그에게는 그리 젊은 나이가 아니었다. 현재 남아있는 난고정은 이름뿐, 후손들이 그를 생각하며 1868년에 복원하여 새로 세운 것이다. 난고정에 걸려있는 척암 김도화(1825-1912)가 쓴 <난고정기>에 이런 얘기가 담겨 있다. 

a 만취헌   고향으로 돌아온 만취헌 남노명이 은둔하며 살고자 정침 옆에 지은 집이다. 늦게까지 푸른, 늙어서도 지조를 바꾸지 않는 ‘만취’에 만취헌 남노명의 의지를 듬뿍 담았다.

만취헌 고향으로 돌아온 만취헌 남노명이 은둔하며 살고자 정침 옆에 지은 집이다. 늦게까지 푸른, 늙어서도 지조를 바꾸지 않는 ‘만취’에 만취헌 남노명의 의지를 듬뿍 담았다. ⓒ 김정봉


남경훈의 증손 만취헌 남노명(1642-1721)은 정침 옆에 만취헌(晩翠軒)을 지었다. 남노명은 거창부사로 있다가 1698년 임기를 마치고 고향, 영해로 돌아와 말년까지 은둔하였다. 만취헌은 늦겨울 혹은 늦게까지 푸른 집이라는 뜻이다.


<소학>의 글을 빌릴 것 없이, 세상의 이치가 만물이 성하면 쇠하고, 일찍 핀 꽃은 일찍 시드니, 만취의 뜻이 그렇다. 더딘 것이 오래가고 대접 받는 법이다. 한여름이 돼서야 붉은 꽃을 피워 뭇 사람들에게 사랑을 독차지 하는 배롱나무는 '만취'의 뜻을 알기라도 한 걸까? 남노명이 마당 앞에 심은 370년 묵은 배롱나무는 현란한 봄꽃에 흔들리지 않고 수더분하게 늦여름(晩夏)을 기다리고 있다.

a 해안만은(海岸晩隱)  느지막하게 영해로 돌아와 은둔한 만취헌 자신을 표현한듯하다. 은둔자나 거사가 되어 당호를 걸고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는 일상을 누구나 한번쯤 꿈꿔보지는 않았는지....

해안만은(海岸晩隱) 느지막하게 영해로 돌아와 은둔한 만취헌 자신을 표현한듯하다. 은둔자나 거사가 되어 당호를 걸고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는 일상을 누구나 한번쯤 꿈꿔보지는 않았는지.... ⓒ 김정봉


만취헌 귀퉁이에 '해안만은(海岸晩隱)' 현판이 달려 있다. 느지막하게(晩) 고향, 영해(寧海)에 돌아와 은둔한 자신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누구나 한 번쯤 은둔자나 거사(居士)가 되어 당호(堂號)를 걸고 군불 지피는 일상을 꿈꾸지는 않았는지, 남노명은 이미 이것이 행복인 것을 알고 있었다. 
  
경복궁 안으로 들어간 '오촌댁'


난고종택 옆으로 영양남씨 후손 집들이 이어진다. 마을 밭 앞에 서 있는 푯말이 아렴풋하다. '오촌댁'이 원래 이 밭에 있다가 서울로 옮겨갔다는 내용이다. 10년간 사람이 살지 않아 스러져가던 중, 주인(남병혁씨)으로부터 기증을 받아 2010년 경복궁 안 국립민속박물관 앞뜰로 옮겨간 것이다. 1848년에 지어진 오촌댁은 영양남씨 난고종파 남용진(1887-1912)이 영해 오촌리에 살고 있던 재령이씨와 혼인하면서 오촌댁으로 불렸다.

a 오촌댁 터 영양남씨 후손 집, 오촌댁이 있던 집터. 2010년 1000리 떨어진 서울로 시집가듯 서글피 떠나버렸다.

오촌댁 터 영양남씨 후손 집, 오촌댁이 있던 집터. 2010년 1000리 떨어진 서울로 시집가듯 서글피 떠나버렸다. ⓒ 김정봉


a 오촌댁  경복궁 안 국립민속박물관 앞뜰로 옮겨온 오촌댁. 관광객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으나 내 눈에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나만의 생각인가?

오촌댁 경복궁 안 국립민속박물관 앞뜰로 옮겨온 오촌댁. 관광객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으나 내 눈에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나만의 생각인가? ⓒ 김정봉


마을사람들을 설득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하나 마을에 다른 집들과 함께 있는 오촌댁만 하겠는가? 당시 마을사람들은 '왕이 살던 궁 안으로 들어갔으니 출세한 것 아니겠냐며' 농을 던졌다고 한다. 서운한 감정을 이렇게라도 녹이려 한 거겠지.

오촌댁 바로 옆집은 광계정고택. 할머니 한 분이 밭 매느라 손이 바쁘다. "할머니, 이 댁 집 이름이 뭐예요?" 풀을 한 움큼 쥔 손으로 처마 밑에 달려있는 현판, 광계정(光溪亭)을 가리키며 그게 이 집 이름이란다. 찌그러진 대야를 들고 있는 손은 난고종택을 가리키며 저 집 후손집이라며, 문화재로 신청하지 않아 문화재로 등록은 안 되었다고 하였다.

서글피 떠난 오촌댁을 뒤로하고 흙담 따라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오촌댁의 운명'을 기다리는 듯 두서너 채 골기와집이 스러져가고 흙으로 된 마을담은 푸석거리는데 이런 마을 분위기와 달리 기운찬 솟을대문집이 보였다. 무안박씨 경수당종택이다. 

a 경수당  현판 퇴계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빈틈없고 반듯하여 경수당종택의 일면이 엿보인다.

경수당 현판 퇴계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빈틈없고 반듯하여 경수당종택의 일면이 엿보인다. ⓒ 김정봉


a 경수당종택 향나무 700년 묵은 향나무. 울릉도에서 300살 되었을 때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향나무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종택의 기운이 느껴진다.

경수당종택 향나무 700년 묵은 향나무. 울릉도에서 300살 되었을 때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향나무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종택의 기운이 느껴진다. ⓒ 김정봉


임진왜란 때 장수로 활약한 경수당 박세순(1539-1612)이 지은 집이다. 1570년에 99칸으로 지었으나 증손자 박문약의 실수로 불에 탔다고 한다. 실수였지만 집이 불타버렸으니 얼마나 애가 탔을까? 박문약은 3일간 소복을 입고 통곡한 후, 1713년 이 집을 지었다. 퇴계가 썼다는 '경수당(慶壽堂)' 글씨는 군더더기 없이 반듯하고 뒤꼍에 400년 전 울릉도에서 가져와 심었다는 700년 묵은 향나무는 용이 막 승천하려는 듯 꿈틀대고 있었다.

원구마을의 굴뚝들

임란 때 장수로 활약한 경수당을 닮은 걸까? 경수당종택 정침 양쪽에 있는 두 기의 굴뚝은 꼿꼿하여 장수 같다. 경수당 옆 낮은 굴뚝은 선비 같아서 이 굴뚝에서 키는 작고 살집은 없어도 얼굴색이 맑고 깐깐한 조선 선비가 보인다.

a 경수당종택 정침 굴뚝 장수처럼 꼿꼿하게 서있다. 군더더기 없는 경수당 글씨와 꿈틀대는 향나무, 힘찬 솟을대문에 잘 어울리는 꼿꼿한 굴뚝이다.

경수당종택 정침 굴뚝 장수처럼 꼿꼿하게 서있다. 군더더기 없는 경수당 글씨와 꿈틀대는 향나무, 힘찬 솟을대문에 잘 어울리는 꼿꼿한 굴뚝이다. ⓒ 김정봉


a 경수당 굴뚝 경수당 옆에 있는 굴뚝으로 깐깐해 뵈는 조선 선비 같다.

경수당 굴뚝 경수당 옆에 있는 굴뚝으로 깐깐해 뵈는 조선 선비 같다. ⓒ 김정봉


난고종택 굴뚝은 경수당 굴뚝과 모양새와 생각이 다르다. 우선 난고종택 난고정 굴뚝은 마루 밑에 숨었다. 현존하는 난고정은 난고거사, 남경훈이 지은 것은 아니더라도 예전 난고정의 생각이 담긴 정자다. 스스로 거사라 했던 난고의 난고정이기에 굴뚝도 그의 생각이 담길 수밖에 없다. 괴시마을 괴정굴뚝처럼 아궁이와 굴뚝이 같은 쪽에 있어 특이하다.

연도를 길게 빼서 마당에 세운 만취헌 낮은 굴뚝에서 희미한 연기가 모락거린다. 더디게 살고 은둔을 원했던 만취헌의 일상이 아른거린다. 안채 굴뚝은 처마위로 솟았다. 다른 굴뚝은 모두 낮게 해도 경주 최부자집 안채굴뚝과 여주 김영구가옥 안채굴뚝, 안동 의성김씨종택 안뜰 굴뚝처럼 안채굴뚝은 높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 굴뚝도 높게 만들었다. 작고 사방이 막혀 있는 안채만은 연기가 잘 빠지게 한 것. 안주인을 배려한 거겠지.

a 만취헌 굴뚝  연도를 길게 빼서 마당에 세웠다. 새로 만든 것이지만 군불연기가 나오고 있어 기분을 좋게 한다.

만취헌 굴뚝 연도를 길게 빼서 마당에 세웠다. 새로 만든 것이지만 군불연기가 나오고 있어 기분을 좋게 한다. ⓒ 김정봉


a 난고종택 안채굴뚝 종택의 다른 굴뚝은 낮아도 안채굴뚝은 높게 하였다. 이렇다 할 장식물이 없는 안채에서 훌륭한 장식역할을 한다.

난고종택 안채굴뚝 종택의 다른 굴뚝은 낮아도 안채굴뚝은 높게 하였다. 이렇다 할 장식물이 없는 안채에서 훌륭한 장식역할을 한다. ⓒ 김정봉


원구마을을 나오면서 아주 잘 삭은 골기와지붕을 보았다. 아주 곱게 늙어가는 한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어떻게 살아갈까? 어떻게 나이 들어갈까? 영해에서 만난 몇 가지 단상들이 스쳐지나간다. 괴시마을의 물소와(勿小窩), 지암(遲庵), 미재(未齋), 마감 질하지 않은 인량마을 충효당 서까래, 원구마을의 난고거사, 만취헌, 해안만은까지....

아주 작은 것조차 소중하게 여기며 더디게, 늦게, 완벽하게보다는 뭔가 부족한 듯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그럼 못 살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게야.
덧붙이는 글 6/27~29에 청송, 영덕, 영덕(영해)에 다녀와 쓴 글입니다
#굴뚝 #원구마을 #영해 #난고종택 #경수당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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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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