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회] 사흘 남았다, '위험한' 탑에 가야 한다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85회]

등록 2016.08.10 10:54수정 2016.08.10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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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공양식이 끝나자 네 사람이 요사채에 모였다.

"정운수좌, 허산선사의 건탑 과정을 잘 아시나요?"


혁련지가 정운을 향해 물었다.

"아뇨, 탑을 만드는 건 속세의 장인에게 맡깁니다."
"그럼 탑은 언제 보셨나요?"
"사리 봉인식 때 참석했습니다."
"탑은 어떤 형식인가요? 석탑인가 전탑(塼塔: 벽돌로 지은 탑)인가요?"
"소림의 탑은 모두 전탑입니다."
"몇 층 탑인가요? 사방형인가요 아니면 팔각형인가요?"
"3층 탑신에 팔각형입니다."
"오…, 알 것 같아요!"

혁련지가 무릎을 '탁' 치며 탄성을 내질었다. 이 명민한 사매가 또 무슨 비밀을 풀었을까, 관조운은 싱긋 웃는 표정으로 혁련지를 바라보았다. 정운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고, 기승모는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사운첩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면수는 2, 6, 8, 44, 53이에요. 6과 8은 구궁에서 방향을 가리키고, 44와 53은 팔괘의 숫자에요. 6은 구궁에서 건(乾) 서북방을 뜻하고, 8은 간(艮) 동북방을 가리켜요. 6면에 있는 시 '억허산(憶虛山)'의 1구에서 세(歲)라는 글자가 나와요, 이는 하늘과 통하니 곧 건(乾)을 가리키고, 8면에 있는 시 '사이제(思二弟)'에는 간(艮) 자가 나와요. 이 역시 구궁의 방위를 나타내죠. 즉 팔각에서 동북과 서북을 가리키는 것이죠. 그렇다면 44와 53은 주역 64괘 중의 숫자를 지칭한다고 봐야 해요.

제 생각엔 탑신(塔身)의 서북면과 동북면에 무언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현장에 직접 가봐야 알 것 같구요. 그런데 저를 밤새 괴롭힌 게 2라는 숫자였어요. 2면의 시에서는 어떤 연상도 떠오르지 않았거든요.


이 문제는 내일 고민해보자 하고 잠들었는데, 잠결에 문득 떠올랐어요. 구궁이 방위, 팔괘가 면이라면 맨 앞의 숫자는 위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보니 숫자 2는 탑신의 이층을 가리키는 것이었어요. 어떤 위치를 지정할 때 큰 범주에서 작은 범주로 좁혀나가는 게 상식적이고 당연한데 제가 너무 깊게 생각한 거죠." 

혁련지는 머릿속의 생각이 흐트러질까봐 급류처럼 빠르게 말했다.


"사형, 주역의 괘사에서 44와 53은 무엇을 뜻해요?"

관조운이 생각에 잠겨 주역의 괘사를 떠올렸다.

"음…, 44는 '천풍구(天風姤)'이고 53은 '풍산점(風山漸)'이야."
"무슨 의미죠?"
"천풍구(天風姤)는 하늘을 뜻하는 건괘(乾卦:☰)와 바람을 뜻하는 손괘(巽卦:☴)가 만났으니, 바람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온갖 사물을 만나는 것을 구(姤)라고 일컫고, 이는 곧 우연한 만남을 의미해. 풍산점(風山漸)에선 상괘 손(巽)이 나무를 뜻하고, 하괘 간(艮:☶)이 산을 일컬으니 산에서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걸 의미하지."

"사형, 의미상 맞아떨어지는 것 같지 않아요? 우연히 만나되 서두르지 말라는……"

"사매 말이 맞아. 천풍구의 우연한 만남과 풍산점의 점진적인 나아감. 주역 64괘에서 나아간다는 의미로는 진(晉)·승(升)·점(漸) 삼진괘(三進掛)가 있는데, 진(晉)은 하룻밤 사이에 만개하는 꽃처럼 급격히 성대해지는 것이고, 승(升)은 초목이 봄에 생동했다가 가을에 조락하는 기간의 성장을 말하고, 점(漸)은 나무가 자라듯 오랜 세월 동안 나아감을 뜻하는데 사부님은 점(漸)괘를 택했어. 결국 진경을 행방을 알려고 하는 자는 서두르지 말라고 충고하는 거였어."

"그럼, 이제 허산스님 탑에 가보는 것밖에 안 남았군요.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생겼어요."

조용히 있던 정운수좌가 한마디 했다. 그는 기승모를 한번 돌아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소림에서 허산 큰스님의 탑을 파(破)하기로 했어요."
"아니!"
"어째서?"

관조운과 혁련지가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원철대사께서 허산스님의 탑을 폐(廢)하라고 고언했고, 이를 장문인 광혜대사께서 받아들이셨답니다."
"이유가 뭔지 아시나요?"

"원철스님과 원희스님(허산스님의 애초 법명입니다)은 사미 시절부터 큰 스님이 될 도량을 타고난 수재라고 노스님들로부터 주목을 받아왔답니다. 그런데 공부가 깊어질수록 원희스님의 기량이 훨씬 뛰어나자 원철스님이 심적으로 무척 시기심이 일었다고 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원희스님은 원자 배 항렬을 뛰어넘어 백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소림의 보물이라며 칭송이 자자하자 원철스님은 속으로 더욱 분했겠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원희스님이 허산으로 법명을 바꾸고는 수행의 방편을 바꿨습니다. 무를 버리고 화두선을 취하신 겁니다.

스님은 본산으로 돌아가시지 않고 묘적암에서 무문 수행에 들어가셨습니다. 육년 만에 문을 열고 나오셔서는 제자를 받되 무승이 아닌 선승을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본산에서는 말들이 구구했습니다. 소림의 줄기에서 벗어났으니 승적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었는데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신 분이 바로 원철스님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선 소림은 임제종으로써 육조 혜능의 선맥을 잇는 점에서 크게 다를 바 없으니 이를 묵인해야 한다고 의견도 많았습니다. 겉으로는 소림을 배반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허산스님이 강호을 주유하고 돌아오셔서 소림 무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슨 무공이었나요?"

관조운이 조급한 나머지 중간에 말을 잘랐다.

"자세한 건 저도 모릅니다. 아무튼 허산스님은 이곳 묘적암에서 십칠 년 동안 계시다가 삼 년 전 입적하셨는데, 스님의 사리 보관을 놓고 탑을 세울 것이냐 말 것이냐 또 설왕설래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방장(方丈)스님께서 미봉책으로 일단 삼 년을 보관하고 추후에 논의하기로 했는데 올해가 바로 삼 년 되는 해입니다."

"비록 탑을 세울 당시엔 말들이 많았어도, 일단 탑이 세워지면 그냥 넘어가는 게 인지상정일 텐데 굳이 파해야 할 정도로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나요?"

혁련지가 물었다. 

"현 장문인은 원철대사의 의발(衣鉢)을 전수 받은 수제자입니다. 따라서 원철대사의 묶은 사감(私憾)이 작용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럼, 언제 탑을 파합니까?"
"다가오는 보름에 흥법희(興法會)가 열립니다. 장문인에겐 재직 동안 가장 큰 행사입니다. 아마 이 행사가 끝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탑을 해체하지 싶습니다."
"보름이 얼마 남았죠?"

관조운이 물었다.

"사흘 남았어요."
"그럼 그 안에 탑에 가봐야겠군요."
"저어…, 탑림에 가실 적엔 조심해야 합니다."
"소림이 어차피 속인들에게 개방되지 않으니 몰래 가보겠지만, 스님들이 탑림을 경계하나요?"
"평소에 탑림을 순찰하진 않지만 허산스님 탑에 접근하는 건 조심해야 합니다. 어쩌면 소림의 호법원 승려들이 감시할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혁련지가 정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척…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정운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하더니 "저는…"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정운이 입술을 깨물며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그런 정운수좌를 보며 관조운과 혁련지는 말없이 기다렸다.

"저는 실은 허산스님의 정식 제자가 아닙니다. 허산스님 말년에 수발을 든 행자였을 뿐이고 큰스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으셨던 비구스님은 따로 계셨습니다. 두 분이신데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큰 제자였던 정법스님은 허산스님이 입적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 사고를 당해 돌아가셨고, 둘째 제자였던 정각스님은 바로 얼마 전에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사고라니? 어떤 사고였나요?"

관조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법스님은 삼 년 전 장경각의 비급을 노리고 침투한 흑도의 무리들이 호법원 스님들에게 쫓겨 도주하다가 정법스님과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들이 살수를 펼치는 바람에 운명하셨습니다. 정각스님은 한 달 전 태실봉 큰 바위에서 실족하시는 바람에 돌아가셨고요."

정운이 말을 하며 기승모를 돌아보자,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나마나 두 분 다 허산스님의 건탑(建塔)과 파탑(破塔)에 관련이 있겠지요"

혁련지가 조용히 말했다.

"…."

정운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럼 정운수좌의 신변도 위험한 거 아닌가요?"

관조운이 말했다. 여태까지 잠자코 있던 기사숙이 돌연 정운을 지그시 바라보자 정운이 알아차리고 지필묵을 가져왔다.

"정운은 내가 보호하겠네."

기승모가 종이에 글을 적었다.

"내가 옛 시절의 무공을 되돌릴 순 없지만 그 식(識)은 알고 있다네. 아니 허산선사 덕분에 오히려 예전과 다른 경지에 다다랐다고 해야겠지. 정운에게 급박한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몇 가지 수(手)를 가르쳐 주고 있다네. 물론 소림은 눈치 못 채고 있지."
"허산스님의 탑에 가봐야 하는데 어떡하죠?"

관조운이 적었다.

"흥법회."

기사숙이 적자 정운이 말을 이었다.

"흥법회는 삼 년에 한번 씩 열리는 대중법회로 사흘 동안 계속됩니다. 소림이 사부대중에게 완전히 개방되는 유일한 기간입니다. 속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니 그때 탑림에 가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하늘이 내려준 기회일세."

관조운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그런데 허산스님의 탑은 탑림 어디쯤 있나요?"

혁련지가 물었다.

"탑림은 달마원 뒤의 너른 터에 조성되어 있는데 스님들의 입적 순서대로 세워졌기 때문에 비교적 찾기 쉽습니다. 허산스님의 탑은 맨 뒷줄에 있고, 탑좌에 원희라는 법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좋아요, 흥법회가 열리는 날 소림사에 가기로 해요."

혁련지가 마무리를 지었다. 대화를 끝내자 일행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덧붙이는 글 월, 수, 금 연재합니다.
#무위도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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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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