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리으리한 양반 가문 '항복 선언' 받아낸 노비

조선시대 '하청업체' 사장님의 귀여운 저항

등록 2016.08.21 11:04수정 2016.08.21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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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의 애환 중 하나는 대기업과의 특허 분쟁에서 자기 기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16일 새누리당 김정훈 의원의 발표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벌어진 중소기업 대 대기업의 특허분쟁 14건에서 중소기업들이 전패했다. 14전 14패, 승률 제로인 것이다. 2014년 전적은 59전 30승 29패 승률 51%였고. 2015년엔 30전 5승 25패 승률 17%였다.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의 특허분쟁 속에는 1987년 이후 심화된 경제적 착취구조가 내포돼 있다. 1987년 6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대기업이 예전처럼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이로 인한 이윤 감소를 만회할 목적으로 대기업들이 벌인 일 중 하나가 중소기업 착취다. 중소기업을 협력업체 내지는 하청업체로 끌어들인 뒤 이들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착취 방법은, 하청으로 편입된 중소기업의 핵심 기술을 가로채거나 납품 단가를 후려치는 것 등이다. 주문을 부당하게 취소해 경영을 어렵게 하거나 대기업 간부들이 중소기업 사장한테 뒷돈을 챙기는 것도 착취 방법에 속한다.

2014년 11월 19일 참여연대가 국회에서 발표한 <중소기업 피해사례 발표회 자료집>에 나오는 S텔레콤이란 중소기업도 착취를 당했다. 대기업 L로부터 기술 설명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S텔레콤은 협력관계를 구축할 목적으로 대기업 L을 찾아가 기술을 설명하고 자료까지 건네줬다. 1년 뒤, S텔레콤은 대기업 L이 그 기술을 무단 도용해 신제품을 출시한 것을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S텔레콤은 대기업 L을 상대로 특허분쟁을 제기했다. 

물론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의 특허분쟁 전체가 착취구조를 내포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중 적지 않은 사례가 착취구조를 내포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의 강화로 인해 노동자 착취가 예전처럼 쉽지 않으니까 중소기업이라도 착취하겠다는 대기업들의 탐욕이 특허분쟁을 양산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농사만 짓는 게 끝이 아니었던 소작농의 삶

조선시대 농민들의 모습. 서울시 광화문광장 지하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똑같지는 않지만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착취구조가 과거의 농업경제시대에도 있었다. 농업 대기업이 농업 중소기업을 착취해서 부당 이익을 챙기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농업시대의 지주가문 중에는 수천 명의 노비를 보유한 곳이 많았다. 16세기 중반에 조선에서 13년간 생활한 네덜란드인 하멜은 <하멜표류기>에서 "어떤 양반은 2000~3000명에 달하는 노비를 소유하고 있다"라고 적어놨다. 2000~3000이나 되는 노비가 주인집에 한데 모여 살 수는 없었다. 지주 가문에 예속돼 그 집안 땅을 경작하는 소작농 노비가 2000~3000명이나 됐다는 말이다.

소작농 중에는 노비도 있고 양인(자유인)도 있었지만, 지주 입장에서는 자기한테 예속된 사람한테 소작권을 내주는 게 더 편했다. 그래야 소작농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작농이 되려면 양인 신분을 유지하기보다는 노비가 되는 게 더 유리했다. 이로 인해, 지주 가문에 예속된 노비들이 그렇게 많았던 것이다. 

2000~3000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노비를 많이 보유한 지주 가문 내에는 소작농 노비들을 관리하는 조직 체계가 있었다. 전 의령현감 서유영이 지은 <금계필담> 같은 조선시대 사료에 나오는 수노(首奴, 수석 노비)란 표현과,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마름이란 표현도 거기서 기인한 것이다. 수노나 마름 같은 간부급 직원을 두고 소작농을 관리하는 지주가문은 지금의 대기업에 비유할 수 있다.

반면, 지주가문의 감독을 받으며 그 땅을 경작하는 노비 집안은 지금의 하청업체에 비유할 수 있다. 혼자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 가족 단위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노비 집안은 가족 기업 형태의 농업 소기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소기업들이 지주가문에 예속되었으니, 양자의 관계를 오늘날의 하청관계 혹은 협력관계와 비유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청업체인 소작농 집안의 의무는 열심히 농사를 지어 수확물의 일정 부분을 납부하는 것이었다. 법적으로 따지면 소작농 가문은 그 일만 하면 됐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런 기본 의무 외에도 부가적인 의무가 많았다. 명절이 되면 선물을 싸들고 지주 가문에 인사를 해야 했다. 지주 가문의 제사 때는 제사 준비를 거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날의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착취하는 것과 양상이 다소 다르기는 했지만, 조선시대 지주 가문도 이러저러한 명목으로 소작농 집안을 착취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의 중소기업 사장들이 느끼는 애환을 소작농 집안의 가장들도 비슷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 같은 착취에 대해 다소 '귀여운' 방식으로 저항한 소기업 사장님이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는 <금계필담>에서 정광필 가문의 노비로 등장한다. 정광필은 조선 제11대 주상인 중종 임금 때 재상을 지내고 1538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근데 그 노비는 정광필 집에서 사는 노비가 아니었다. 한양 남대문 밖에서 정광필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농 노비였다.

"대감님 혼령을 뵈었습니다"... 한 노비의 '귀여운' 아이디어

남대문의 모습. 구한말에 찍은 사진. ⓒ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정광필이 죽은 뒤에 유족들은 제사 때마다 일을 거들라고 소작농 노비들에게 명령했다. 정광필의 집은 한양 안에 있었기 때문에, 한양 밖에 거주하는 소작농 집안의 입장에서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제사 준비를 거드는 것도 번거로웠지만, 한양까지 갔다 오는 것도 번거로웠다. 이런 일이 잦으면, 몸도 피로하지만 농사에도 지장이 생겼다. 남대문 밖의 그 노비한테도 마찬가지였다.

착취를 견디다 못한 그 노비는 아이디어를 짜냈다. 어떻게 하면 '대기업'의 횡포로부터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하고 머리를 회전시킨 것이다. 돌아가신 '회장님'의 제사 때문에 고초를 겪지 않으면서도 소작권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 것이다. 그가 생각해낸 방법은 죽은 정광필의 권위를 빌려 '제사 불참권'을 얻는 것이었다.

정광필의 제삿날, 그는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밤중에 열리는 제사에 참석하려면, 성문이 닫히는 밤 10시 12분까지는 한양 남대문에 당도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시각이 지난 뒤에도 그냥 집에 있었다. 그러다가 성문이 열리는 새벽 4시 12분 이전에 집을 출발해서 남대문을 통과했다.

제사가 끝난 뒤에 도착했으니 지주가문 '임직원'들의 불호령이 떨어질 게 분명했다. 이를 막고자 그는 그 집에 가자마자 사연을 늘어놨다. "제가 어젯밤에 남대문 밖에 도착해보니 성문이 이미 닫혀 있었습니다"라면서 "밤새 성문 밖에 대기하고 있다가 이제야 들어온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 뒤에 그는 이상한 이야기를 꺼냈다. "성 안에 들어온 뒤에 저는 대감님을 뵈었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가 말한 대감님은 정광필이다. 조금 전에 정광필의 혼령을 보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말을 뒷받침할 증거로 배 하나를 내놨다. 정광필의 혼령이 제사상에 얹어놓으라고 자기한테 배 하나를 줬다는 것이다.

이 말에 '대기업 임직원들'은 대경실색을 했다. 그 직전에 제사상에서 배 하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없어진 배가 그 노비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은 노비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아마. 누군가 그 노비의 부탁을 받고 제사상에서 배를 치웠던 것 같다.

그 일을 계기로 정광필 가문이 내린 결정이 있다. '앞으로는 제삿날에 소작농 노비들이 제사를 거들 필요가 없으며, 집 밖에 설치한 분향소에서 참배만 하고 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문 밖에 설치한 분향소에서 참배하고 갔는지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으므로, 이 결정은 '앞으로는 제사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삿날을 핑계로 하청업체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항복 선언이었던 것이다.

제사는 혼령과 인간이 재회하는 기회다. 이 기회는 제사가 열리는 집안 내부에서 주어진다. 그런데 그 노비는 자기는 집 밖에서 혼령을 만났다고 주장했다. 그 증거로 배를 제시했다. 그는 집밖에서 제사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 된다.

이것은 그 노비와 처지와 같은 '하청업체 사장들'의 입장에서는 "집밖에서도 제사의 취지를 달성할 수 있으니 굳이 집에 들어갈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이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제삿날에 집안으로 들어올 필요는 없다'는 결정이 나왔을 수도 있다.

'대기업 임직원들'의 입장에서는, 해괴한 이야기까지 해가며 제사 참석을 피하려는 '하청업체들'을 상대하는 것에 부담을 느껴 전향적인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다. 덕분에 그 노비는 '대기업'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주의할 것이 있다. <금계필담>에서는 그 노비가 제사 참석을 기피할 목적으로 그런 쇼를 벌였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금계필담>에 제시된 객관적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필자가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이다. 정신이 멀쩡할 때인 새벽에 혼령을 받았다는 말 자체가 허황될 뿐만 아니라 그런 말을 통해 그 노비가 얻어낸 게 결국 제사 불참권이었다는 점 등을 보면,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쇼를 벌였을 것이라고 추정해도 무방하다는 판단 하에 그런 결론을 내렸다.

그 노비, 아니 그 하청업체 사장님은 귀여운 방법으로 대기업의 횡포에 저항했지만, 사실 그런 방법으로는 부당한 착취관계를 뜯어고칠 수 없었다. 조금 더 용감했다면, 특허분쟁을 벌이는 오늘날의 중소기업들처럼 관아에라도 뛰어가서 울분을 호소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잘못하다가는 소작권을 잃고 거리에 나앉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 귀엽고 깜찍한 아이디어를 짜냈던 것으로 보인다.
#종소기업 #대기업 #소작농 #착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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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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