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3년에 정경세가 지은 계정으로, 방 1칸 마루 1칸의 작고 소박한 초가집이다.
정만진
그런데 이일을 변명하는 기록이 보기 드물게 남아 있으니 읽어보지 않을 수 없다. <선조실록> 1595년 7월 24일 정경세는 선조에게 "근일 서울과 지방 사람들이 이일을 많이 헐뜯고 있습니다만 상주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이일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라며 "사변 초기에 영남 사람들은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왕사(王師, 왕이 보낸 장수)를 크게 기다렸고, 열군(列郡, 여러 고을)의 군졸들은 소속이 없었는데 이일이 상주에 이르러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군사를 먹이고 성의 있는 말로 일깨움으로써 하루 사이에 장사 3천 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고 칭찬한다.
이어 그는 "이에 (상주 군사들이) 평야로 나아가 진 치는 법을 배워 익힐 무렵에 왜적의 선봉이 이미 앞 시내에 도착하여 넓은 들판에 가득 차 있었는데도 이일은 안색이 변하지 않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하고 재차 이일의 대담무쌍한 성품을 높여 세운다.
모두들 이일을 비난하는 중에 정경세는 그를 옹호정경세는 "한동안 힘을 다해 싸우던 중 윤섬과 박호가 모두 전사하자 이일이 단기로 탈출하여 충주에 물러나 있다가 신립과 같은 날 패배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산에서 한 번 패배한 뒤로 왜적과 대항하여 싸운 자가 한 사람도 없었는데, 유독 이일만이 군졸을 규합하여 왜적과 접전했으니, 끝내 비록 패전하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사람을 쉽게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고 아뢴다.
정경세의 말은, 부산에서 송상현, 정발, 윤흥신이 맞서 싸우다 전사한 이후 변변하게 왜적에 대항한 장수가 없었는데 이일이 비록 공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당당히 대적하여 전투를 펼쳤으니 그만하면 비난만 할 일은 아니라는 논지이다. 정경세의 발언에 대해 선조는 어떤 대답을 하였을까? 당일 실록에는 선조의 말이 실려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다만 류성룡이 선조 대신 <징비록>에 한 마디를 남겼다. '한 곳에서도 적들을 막아 기세를 누그러뜨린 자가 없으니 열흘도 지나지 않아 상주에 이르렀다. 이일은 (중략) 수하에 군대가 없었는데 갑가지 싸우게 되니 당연히 적과 맞설 수 없었다.'
이일을 기리는 공간이나 유적은 없는 북천전적지북천전적지 경내에서 이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은 기념관이다. 기념관은 게시물의 일부를 이일에 대한 해설로 할애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외 이일과 관련되는 비석이나 추모 시설은 전혀 없다. 그가 순절하지도 않았고, 적과 싸워 공을 이룬 것도 없기 때문이다.
북천에서 다들 죽어갈 때 그는 대장이면서도 가장 먼저 도망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정경세와 류성룡이 비록 옹호하고 있지만, 만약 저 세상이 있다면 그는 후세 사람들이 원망스러워 뭔가 넋두리를 늘어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경세의 말에 대한 선조의 반응이 전해지지 않듯, 이일의 넋두리 역시 우리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많은 선조들이 죽어갔지만 지금은 찾아오는 이도 별로 없는 북천전적지, 그저 바람소리와 저물어가는 햇살 뿐이다.
(상주 북천전투에 대해서는
'명장 이일은 왜 일본군 피해 달아 났을까'와
'임란 때 불타고, 식민지 때 철거 위기 맞은 두 건물'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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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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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졌지만 왜적과 맞서 싸운 것만 해도 대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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