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적과 싸우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장군

임진왜란 충주 전투의 현장, 탄금대를 둘러보다

등록 2016.09.20 11:59수정 2016.09.20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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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대에서 내려다 본 왼쪽(중앙탑) 방향의 남한강. 흔히 '중앙탑'이라 부르는 이 탑의 공식 명칭은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忠州塔坪里七層石塔'이다. 국보 제6호. 화강암으로 건립된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에서 가장 크고 높다. 이 탑을 흔히 중앙탑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통일신라 원성왕(785∼798) 때 나라의 중앙 지점을 알아보기 위해 국토의 남쪽과 북쪽 끝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보폭을 가진 잘 걷는 두 사람을 여러 번 출발시켜 보았는데, 그때마다 항상 이곳에서 만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정만진


'탄금대'의 주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 458-1번지(도로명주소 : 탄금대로안길 109-1)이다. 하지만 탄금대는 주소를 몰라도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다. 주소 없이 '탄금대' 세 글자만 입력해도 길찾기 프로그램은 나그네를 남한강 물길 위에 절벽으로 서 있는 탄금대까지 지극히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그만큼 탄금대는 이름난 곳이다. 물론 국가가 지정한 명승(名勝)이다. 이때 명승은 단순히 경치가 뛰어난 곳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명승은 지정 문화재 중 한 가지이다. 문화재청 누리집은 명승을 '기념물 중 경승지(景勝地)로서 중요한 것'으로 정의한다.


신라에 투항한 우륵, 가야금 들고 충주에 와서 살다

문화재청 누리집이 말하는 기념물은 '패총(조개무덤)·고분(옛날 무덤)·성지(성터)·궁지(궁궐터)·요지(도자기 생산터)·유물 포함층 등의 사적지로서 역사상, 학술상 가치가 큰 것, 경승지로서 예술상, 관람상 가치가 큰 것, 동물의 서식지, 번식지, 도래지(찾아오는 곳)와 식물 및 식물 자생지(스스로 자라는 곳), 광물, 동굴로서 학술상 가치가 큰 것'이다. 즉, 명승은 뛰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 중에서 예술상, 관람상 가치가 큰 곳이다.

탄금대는 명승 42호이다. 하지만 탄금대는 경북 예천 회룡포(명승 16호)나 전북 부안 채석강(명승 13호)처럼 단순히 뛰어난 경치만 자랑하는 경승지가 아니다. 많은 국민들이 탄금대를 찾는 것은 대체로 뛰어난 경치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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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 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는 '탄금대 유래' 안내 빗돌. 그러나 서 있는 위치가 공원 입구이기는 하지만 자가용 차량을 타고 온 답사객들은 이 빗돌의 내용을 읽는 이가 거의 없다. 주차장이 이 앞 도로를 따라 250미터가량 더 올라간 곳에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 정만진


이는 탄금대 공원으로 올라가는 도로 입구의 '탄금대의 유래' 표지석이 앞장서서 말해준다. 충주청년회의소가 건립한 이 표지석은 대부분의 답사자들이 차량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읽어보는 이가 드물 성싶지만, 걸어서 공원 안으로 들어서는 나그네로서는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현지 안내판이다.

'탄금대의 유래' 표지석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앞부분은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 신라 진흥왕 치대(治代, 다스리던 시대)에 가야국의 제일가는 악성(樂聖, 음악의 성인) 우륵이 가야국의 멸망을 예견하고 우거지(寓居地, 타향의 거처)를 찾아온 곳이 충주였는데 이곳 대문산의 아름다운 풍치에 감동되어 제자 법지, 계고, 만덕에게 가무(歌舞, 노래와 춤) 음악을 가르치며 가야금을 탄주(彈奏, 연주)하니 그 미묘한 음악소리에 이끌려 모여든 사람들이 부근에 부락을 이루었다고 하며, 이러한 연유로 탄금대로 호칭하게 되었고, 우리나라 국악의 발상지이기도 하다'라는 내용이다. 요약하면, 탄금대는 멸망국 가야의 음악 천재 우륵이 신라로 망명한 뒤 머물면서 가야금을 연주했던 곳이다.


뒷부분은 '그리고 (탄금대는) 임진왜란 때 도순변사 신립 장군이 휘하 8000여 기를 이끌고 이곳에서 배수진을 피고 왜적의 무리를 맞아 사력을 다하여 선전분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전적지이기도 하다'로 되어 있다. 요약하면, 탄금대는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일본군과 싸운 끝에 패전하여 전사한 곳이다. 앞부분에 '우륵이 이곳 대문산의 아름다운 풍치 감동되어' 충주에 살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표현이 나오기는 하지만, 탄금대가 국가 명승이라는 점을 강조한 언급까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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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대에서 내려다 본 오른쪽(목행대교) 방향의 남한강. 열두대는 신립 장군이 1592년 탄금대 전투 중 너무 뜨거워진 활시위를 식히기 위해 강물까지 열두 번 오르내린 바위라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곳 지형은 아주 심한 절벽이기 때문에 사람이 오르내릴 수가 없다. 전설이 낳은 이름인 것이다. ⓒ 정만진


탄금대의 절경에 대한 언급은 공원 내의 공식 안내판 앞에 닿아야 비로소 볼 수 있다. 문화관광해설사의 집 옆에 세워져 있는 공식 안내판의 문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륵 관련, 신립 관련, 그리고 명승 관련이다.

맨 앞 우륵 관련 부분은 '해발 108m 정도의 야트막한 대문산에 위치한 탄금대는 악성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연주한 데서 그 명칭이 유래했다, 우륵 선생은 원래 가야국 사람이었으나 신라 진흥왕이 가야 지역을 합병하고 사민 정책을 실시함에 따라 충주 지역으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가 전문이다. 앞의 '탄금대의 유래' 표지석 중 앞부분보다 짧기는 해도 내용상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다. (우륵에 대해서는 '조국을 배신한 기회주의자도 예술가라면 위대?' 참조)

신립 관련 부분은 '(탄금대는) 또한 조선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장공 신립 장군과 팔천 장병이 탄금대 일대에 배수진을 친 후 북상하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분패하여 자결한 고전장(古戰場, 옛 전투 장소)이기도 하다'로 이루어져 있다. '탄금대의 유래' 중 신립 관련 부분과 길이도 비슷하고 내용도 대동소이하다. 다만 신립 부대는 소서행장의 제1군과 싸웠으므로 본문에 가등청정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신립과 팔천 장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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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 신립 장군과 팔천 고혼 위렵탑, 탄금대공원 중심부에 있다. 이 위령탑 앞에 충혼탑, 뒤에 '감자꽃' 노래비가 있다. ⓒ 정만진


끝 부분은 '탄금대의 유래' 표지석과 아주 다르다. '탄금대는 달천과 남한강의 합수머리에 위치하여 경관이 아름다우며 특히 열두대에서 바라보는 남한강은 절경을 이룬다, 탄금정(탄금대공원 중앙부에 있는 정자) 인근에 토성(土城, 흙성) 흔적이 남아 있으며 충혼탑과 팔천고혼위령탑 등 현충 시설을 갖추고 있다'라는 마지막 부분은 표지석에 비해 탄금대의 절경을 훨씬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토성 흔적이 있다는 사실과 충혼탑 및 팔천고혼위령탑의 존재에 대해서도 안내하고 있다.

관광해설사의 집 옆 안내판에는 '팔천고혼위령탑'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정작 탑 앞 안내판은 그보다 한참 긴 명칭, 즉 '충장공 신립 장군과 팔천 고혼 위령탑'으로 탑을 소개하고 있다. 안내판의 글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은 '이 탑은 음력 1592년 4월 28일 도순변사 신립이 휘하 장졸 8천여 명과 함께 이곳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전적지임을 기리기 위한 위령탑'으로, 탑 건립에 담겨 있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그런가 하면 뒷부분은 '탑 상단에 형상화된 혼불은 산화한 영령들을 추모하는 모습으로, 조국을 지키는 수호신을 의미하고, 아래 부분의 신립 장군과 4인의 군상(群像, 여러 명의 모습)은 죽음으로써 국토를 지키는 불굴의 충정을 나타내고 있다'면서 '바위와 바닥 부분의 원반(둥글고 납작한 접시 형태의 물건) 모양은 탄금대를 싸고도는 남한강과 달천의 물결 모양을 살려 구성한 것이며, 탑 뒷부분의 부조(평평한 면에 그림이나 글씨를 도드라지게 돋을새김한 조각)는 당시의 탄금대 전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탑을 건립한 역사적 의미를 다룬 앞부분에 견줘 뒷부분은 탑에 깃들어 있는 미술적 표현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다. 쉽고 간략하게 해설하고 있어 새삼스러운 보충 설명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안내문을 읽으며, 탑의 실제 모양과 글의 표현을 일치시켜 본다.

신립 장군과 8천 고혼(孤魂, 외로운 혼령)을 기려 세워진 탑 앞에서 아무런 느낌이 없을 수 없다. 두 손을 잡고 잠깐이지만 묵념을 한다. 대장 신립과 그의 장졸들 중 어느 누구인들 왜적과 싸워서 지고, 또 목숨을 잃고 싶었을까. 불가항력으로 패전을 하고, 마침내 죽음의 길을 간 선조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들의 명복을 빈다. 탑 앞에 자라 있는 거대한 소나무 고목도 아마 내 마음과 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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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5월 5일에 건립된 '감자꽃 노래비'는 신립 장군과 팔천 고혼 위령비 바로 앞 오른쪽에 있다. 동시 '감자꽃'의 작가 권태응은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던 중 항일운동을 한 혐의로 1년도 못 되어 퇴학당한다. 그는 그 후에도 일본 유학생들을 모아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9년 스가모(巢鴨)감옥에 갇힌다. 폐병이 심해진 그는 1940년 출옥하여 귀국한다. 그러나 1951년 6.25전쟁 중 약을 구하지 못해 결국 타계한다. 이러한 권태응의 이력은 동시 '감자꽃'이 창씨개명에 맞서는 속뜻을 지닌 노래로 해석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권태응은 2005년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되었다. ⓒ 정만진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소나무 옆에는 1968년 5월 5일 건립된 '감자꽃 노래비'가 있다. 동시 '감자꽃'의 작가 권태응은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던 중 항일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채 1년도 못 되어 퇴학당한다. 그래도 그는 독립운동을 계속했고, 1939년 스가모(巢鴨) 감옥에 갇힌다.

폐병이 심해진 그는 1940년 출옥하여 귀국한다. 그러나 1951년 6.25전쟁 중 약을 구하지 못해 타계한다. 이러한 권태응의 이력은 '감자꽃'이 창씨개명(創氏改名)에 맞서는 속뜻을 지닌 노래로 해석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우리 이름을 쓰는 사람과 일본식 이름을 쓰는 사람은 그 이름만 보고도 사람됨을 헤아릴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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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정(근래에 세운 정자)에서 내려다 본 열두대 방면의 풍경. 계단 끝에 신립 장군 등 조선군 장졸들이 강물에 몸을 던진 바위(열두대)가 있고, 중간쯤 오른쪽에 '신립 장군 순국지지殉國之址(순국하신 땅)'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 정만진


노래비에서 길을 따라 내려가면 이내 작은 삼거리가 나온다. 오른쪽으로 가면 정자 탄금정에 닿고, 왼쪽으로 가면 대흥사에 당도한다. 정자와 대흥사 중간 쯤에 신립 장군 순절비가 있다.

탄금정에서 남한강으로 내려가는 절벽길이 탄금대 공원 답사의 절정 지점이다. '신립 장군 순국지지(殉國之地, 순국 장소)' 표지석이 서 있는 이곳은 대장 신립과 종사관 김여물 등 장졸들이 마지막 순간에 뛰어내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비극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자에서 강물 쪽으로 내려가는 절벽에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누구나 어렵지 않게 거닐 수 있다.

신립이 강물에 투신한 열두대, 탄금대 답사의 핵심 장소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벼랑길 끝까지 가보면 커다란 바위 하나가 곧장 물속으로 떨어질 듯 위태로운 모습으로 버티고 있다. 바위 일원은 '열두대'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열두대에는 신립 장군이 적과 싸우면서 시위를 너무 많이 당긴 탓에 대궁(大弓, 큰 활)이 열을 받아 작동하지 않자 열두 번이나 벼랑을 내려가 강물에 활을 식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물론 열두대는 전설이 낳은 이름이다. 이곳 벼랑길은 사람이, 아니 아무리 당대 최고의 명장 신립 장군이라고 해도 걸어서 오르내릴 수 있는 벼랑이 아니었다. 열두대는, 신립 장군을 안타까워 한 후대인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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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 장군 순절비가 들어 있는 비각 ⓒ 정만진


신립 장군 순절비 앞에 서서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안내판도 없다. 비각도 비석도 모양과 빛깔이 제법 고색창연하고, 크기도 상당히 우람한데, 어째서 이렇듯 쓸쓸하게 서 있는 것일까?

그 궁금증은 순절비가 제작, 건립된 때를 알게 되면 순식간에 풀어진다. 1981년, 지금으로부터 불과 30여 년 전에 빗돌과 비각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정식 문화재로 지정이 되려면 최소한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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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 장군 순절비는 탄금대공원 안에서 신립 장군 및 우륵 관련 유적을 둘러보는 답사자가 가장 마지막에 만날 수 있는 볼거리이다. 대흥사라는 사찰 왼쪽에 있다. ⓒ 정만진

비각 안으로 들어가 본다. 보기 드물게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비각이다. 하지만 비의 받침돌은 평범해서 흔히 보는 거북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화강암 돌거북은 앞뒤 260㎝, 폭 147㎝ 크기이다.

빗돌은 높이 197㎝, 너비 79.5㎝, 두께 28.5㎝로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개석(蓋石, 뚜껑돌)은 앞뒷면 모두 이수(螭首, 뿔 없는 용)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너비 100㎝, 두께 51㎝, 높이 100㎝의 화강암으로 조성되었다.

비석 앞면에는 '忠壯公申砬將軍殉節碑(충장공신립장군순절비)' 10자가 새겨져 있다. 특이한 점은 비석 뒷면의 글들이 한글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정말 보기 드문 일이다. 전문을 한글로 쓰고, 한자가 필요하면 괄호로 묶어서 뒤에 병기했다. 이렇게 해야 누구나 읽을 수 있다.

물론 신립 장군 순절비인 만큼 앞에서 본 '탄금대의 유래' 표지석이나 탄금대 공원 공식 안내판과 달리 우륵에 관한 언급은 없다. 오로지 신립 장군에 대한 관한 내용뿐이다. 비는 '(전략) 민족의 한(恨)이 서린 이 자리에 비를 세워 순국충의(殉國忠義)를 천추만대(千秋萬代, 영원한 후대)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는 말로 마감을 하고 있다.

옆면에는 비문을 지은 박재륜, 글씨를 쓴 김성규, 그리고 비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 김태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의미있는 일에 앞장섰으니 응당 그렇게 기림을 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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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대 바위, 신립 장군과 그 수하 장졸들이 최후를 맞이한 곳이다. 절벽 아래로는 아득한 남한강이 흐른다. ⓒ 정만진


#탄금대 #신립 #김여물 #임진왜란 #우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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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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