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는 없다. 영화 <친구> 중 한 장면.
씨네라인 II
얼마 전, 하마터면 한 아이에게 손찌검을 할 뻔했다. 점심시간 직후인 5교시 수업 때 벌어진 일이다. 시작종이 울리고 출석을 불렀지만, 그는 대답은커녕 책상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자리 옆에 서서 수업하며 부러 흔들어 깨웠지만,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깨워 얼러도 보고 달래도 봤지만, 흡사 기면증 같은 그의 잠 앞에서는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초임 시절, 그때라면 분명 '사달'이 났을 것이다.
"선생님, 저한텐 신경 끄시고, 그냥 하던 수업이나 하세요. 제발 저를 귀찮게 좀 하지 마세요."흔들어 깨우는 걸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고개를 들어 짜증 섞인 말투로 이렇게 쏘아붙였다. 교실 뒤에서 서서 수업을 들으라거나 졸음이 오면 잠시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오라는 지시도, 당최 수업 내용을 모르겠거든 소설책이나 하다못해 만화책이라도 읽으라는 권유도 들은 척조차 하지 않고, 다시 엎드려버렸다. 그의 말에 순간 부아가 치밀었지만, 달리 어쩔 방도가 없었다.
그와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아이들도 외려 깨우려는 나를 탓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부질없는 짓이라고 말했다. 학교에 등교해서 하교할 때까지 하는 거라곤 엎드려 자는 것밖에 없다며, 그가 깨어있을 때는 점심시간뿐이라고 귀띔해줬다. 반 아이들은 어차피 가능하지도 않을 일에 힘을 쏟을 필요가 뭐 있느냐며, 괜한 스트레스 받지 말고 그의 말대로 우리끼리 수업하는 게 상책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체벌만으론 그의 그릇된 행동을 결코 바꿔낼 순 없다지만, 순간 손발이 다 묶여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교육받을 권리가 있고, 그의 부모가 내는 세금으로 봉급을 받는 나는 최선을 다해 그를 가르칠 의무가 있다며 하루에도 몇 번씩 주문을 외지만, 매 시간 엎드려있는 그를 보면서 그 다짐은 무색해져만 간다. 그의 무기력이 고스란히 교사인 내게도 전염되는 것만 같다.
만약 화를 못 참고 손찌검을 했다면 누군가에 의해 촬영되어 폭력 교사로 낙인찍혀 처벌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수업시간에 잠을 자든 말든 내버려두는 건 교사이길 포기하는 일이다. 졸거나 자는 아이들이 있다는 건 교사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뜻일 테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뿐더러, 아이들을 방치한다는 차원에서 엄밀히 말해 학습권 침해라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수업시간 학생들에게 '핀잔'이나 듣는 주제에 아내 앞에선 교사의 사명 운운했으니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초임 시절 적었던 글귀... 만용처럼 느껴기도 하네아내도 나도 잘 알고 있다. 무릇 참교사라면 '막장' 아이들과도 스스럼없이 소통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고, 그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얻어낼 능력이 있어야 한다. 아울러 수업 개선을 통해 아이들이 쉽게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 또한 기본이다. 그들과의 불통을 아이들 탓으로 돌리고 그저 세대차이 탓이려니 자위하는 건, 교사로서의 무능을 숨기고 스스로 합리화하는 짓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실이 너무 힘들다. 고해성사하듯 정훈이가 당장 내일 다른 학교로 전학 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아내 앞에서, 앞으로 더 이상 '교육은 성직'이라는 등의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줄 순 없을 것 같다. 아내와 함께 교직에 첫발을 내디뎠던 그때, 교무실 책상 위에 좌우명처럼 적어뒀던 이 글귀들이 만용처럼 느껴지는 요즘이다.
"'문제아'란 없다. '문제 어른'이 있을 뿐. 아이들을 탓하는 '찌질한' 교사는 되지 말자."
"아이들은 교육을 통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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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전국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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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아..." 학생 때문에 퇴직 생각하는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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