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에 경운기, 오토바이, 개... 시장까지?

경운기 탈탈탈 들어서는 영화 <리틀 붓다> 촬영지 박타루르 고궁에서 젊은 싯다르타를 떠올리며...

등록 2016.10.13 16:22수정 2016.10.13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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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타푸르 고궁의 또다른 광장, 중세시대의 문화재로 가득한 타오마디 광장으로 경운기가 탈탈탈 거리며 들어서고 있다. ⓒ 송성영


네팔 사내 모한의 농막에서 사흘째. 이른 아침부터 다친 무릎에서 통증이 몰려왔다. 무릎을 구부린 상태로 어제 내내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제 모한과 가보기로 약속한 네팔과 중국 사이의 국경마을을 포기할 수 없었다.

국경을 향해 모터사이클 뒷자리에 앉아 마을을 빠져 나오는데 모한에게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모한의 딸 씨라파가 등교 길에서 발바닥에 못이 박혀 병원에 갔다는 것이다. 외동딸, 시라파를 애지중지 하는 모한은 아무래도 박타푸르(Baktapur)에서 며칠을 머물러야 할 것이라 한다.


"송! 당신은 농막에 머물러 있어요. 며칠 내로 돌아오겠습니다."
"아닙니다. 나도 씨라파 상처가 걱정됩니다. 함께 박타푸르로 갑시다."

박타푸르에서 우연히 만난 네팔 소녀 씨라파. 자신의 침대까지 내주었던 한없이 친절하고 유쾌 발랄한 씨라파와 인연이 닿지 않았다면 모한의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나모붓다 사원이며 네팔 시골 깊숙이 둘러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농막으로 돌아가 배낭을 챙겨 박타푸르로 향했다.

모한은 박타푸르에 도착하자마자 씨라파 엄마가 꾸려나가는 옷 가게를 찾아갔다. 조금 전에 병원에 다녀왔다는 씨라파 엄마 말로는 씨라파가 다행히 큰 상처를 입지 않아 치료를 받고 곧장 학교에 갔다고 한다. 아내의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모한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고궁은 둘러봤습니까?"
"고궁 안으로 들어가 보긴 했는데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습니다."

박타푸르에 도착해 씨라파의 안내에 따라 한국인 여성 정성미씨와 네팔 변호사 사치트씨가 함께 운영하는 NGO 단체, '비욘드 네팔'를 찾아다니는 도중에 주마간산으로 둘러본 것이 전부였다.


모한의 안내에 따라 고궁으로 들어섰다. 1500루피나 되는 고궁 입장권을 다시 끊어야 하나싶었는데 나흘 전 박타푸르 도착 첫 날 끊었던 입장권이 유효하다고 한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박타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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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왕궁이 들어서 있는 달발 광장은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영화 <리틀 붓다>의 촬영장이기도 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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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타푸르 고궁의 또 다른 광장, 타오마다카 광장에는 높이 30미터의 5층탑, 네팔에서 가장 규모가 큰 힌두 사원 나타폴리사원(Nyatapola temple)이 들어서 있다. ⓒ 송성영


카트만두, 파탄과 함께 네팔의 3대 중세도시 중 하나인 박타루르는 고대 네와르 왕국의 도시로 15세기 후반에서 1769년까지 말라 왕조의 수도였다. 키아누 리브스 주연 영화 <리틀 붓다>의 촬영장이기도 했던 박타푸르의 고궁은 '달발 광장'(Durbar Square) 이라 부른다.

달발은 왕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여 '달발 광장'은 네팔의 중세 왕국의 궁전과 광장 일대를 말한다. 광장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나무창과 창틀로 치장한 왕궁을 중심으로 사원, 조각상, 정원, 분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대 인도어로 '신앙심 있는 자(신에게 귀의한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박타푸르는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난 네와르족이 건설한 힌두교 색채가 강한 도시다. 벽돌 건축과 나무조각이 독특한 네와르족의 고유한 건축양식을 네와 건축양식(Newa Architecture)이라 부른다. 이들은 사리탑, 기도처, 정원, 주택 등에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조각을 새겼다. 이 네와건축 양식은 중국에 전파되기도 했다.

중세도시 박타푸르의 향취는 달발 광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시 골목골목에서도 중세 건축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여 박타루르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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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타푸르 고궁의 또 다른 광장, 타오마디 광장. 곳곳에 오래된 힌두사원이 들어서 있는 광장에 상점은 물론이고 자동차, 물차, 경운기까지 오락가락하고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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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세계문화유산이 아닌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중세도시 박타푸르의 고궁 주변 풍경 ⓒ 송성영


중세도시 박타푸르 고궁에서의 문화적 충격은 따로 있었다. 고궁에는 두 군데의 광장이 있다. 왕궁이 들어서 있는 달발 광장은 한적하다. 하지만 달발 광장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타오마디 광장은 전혀 다른 분위기다. 타오마디 광장 안으로 들어서자 경운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가며 탈탈탈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간다.

왕실 사원이라 할 수 있는 나타폴라 사원이 버젓이 들어서 있는 문화유적지에 경운기라니, 출입금지 딱지가 곳곳에 나붙어 있는 한국의 문화재 관리 기준으로 놓고 보면 전혀 낯선 풍경일 수밖에 없다. 박제된 세계문화유산이 아닌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광장 안에는 경운기뿐만 아니라 모터사이클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고 개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아무렇게나 자빠져 있다. 왕궁 건물에서도 그랬듯이 사람들 또한 네팔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는 건축물 곳곳에 걸터앉아 있거나 팔자 좋게 늘어져 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이다. 박제된 문화유산은 생기가 없다. 향취가 없다. 박제된 고궁에서 느낄 수 없는 중세의 향취, 박타푸르 고궁은 왕처럼 떠받드는 문화유산이 아니라 네팔 사람들의 일상생활 한복판에서 공존하고 있다. 박타푸르 고궁이 아름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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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타푸르 고궁 주변에 들어선 도기 광장. 도공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도기가 하루에 수천개 팔려 나간다고 한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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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마니 광장 주변에는 골동품 상점이며 기념품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 송성영


타오마디 광장 한옆에는 매일같이 도기 수천 개가 만들어져 팔려 나간다는 도기 광장(Potter's Square)이 있다. 광장은 도공들의 손끝을 거쳐 나온 도기들로 어지럽게 널려 있다.

광장 주변에는 기념품가게며 골동품 가게가 줄지어 들어서 있고 골동품 가게 주변에는 전통 악기점도 보인다. 거기서 레게 머리를 한 청년이 한가롭게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노래하는 큰 아들 송인효가 떠올랐다. 세상의 아픔을 노래하겠다는 녀석은 지금쯤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우쿨렐레를 사다주고 싶었는데 아직 여행길이 멀었다. 가지고 다니다가는 파손되기 십상이다.

전통 악기점 근처에는 히말라야 설산 풍경들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 화랑이 있고 또 그 옆에는 화실도 있다. 화실에서는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만다라를 그리고 있었다.

"모한, 내 아내가 만다라 그림을 배우고 싶어 했어요."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만다라 그림을 배우고 싶어 했다. 그녀가 결혼 전 나와 함께 인도에 가고자했던 것 또한 만다라 그림을 배우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큰 아들 송인효가 그녀의 뱃속에서 자라면서 우리는 인도를 포기했다. 그리고 나는 20년 전 작심했던 그 길, 인도와 네팔을 떠돌고 있다. 수백년을 이어오고 있는 중세 도시, 박타푸르에서의 20년 세월은 한순간이다.

모한 말대로 그녀와 함께 왔더라면 참 좋았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다가 만다라 그림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돌려 화실을 빠져 나왔다. 나는 이혼을 요구하는 그녀에 대한 분노심과 함께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혼을 요구하는 그녀에 대한 애착은 고통만 가중시키게 된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문화 유적지에서 시장이 열린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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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악기점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네팔 청년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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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화실에서 만다라를 배우고 있는 학생들. 타오마니 광장 주변에는 화랑이며 화실도 있다. ⓒ 송성영


모한은 타우마디 광장 한 옆에 자리한 '나야폴라'라는 고풍스런 카페로 나를 안내했다. 모한 말로는 이 카페 건물은 과거에 사원이었던 것을 개조한 것이라고 한다.

"대단합니다. 오래된 유적지를 자유롭게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이곳 광장 한옆에서는 이른 아침에 시장이 열리기도 합니다."
"문화 유적지에서 시장이 열린다고요?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혹시 <리틀 붓다>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오래 전에 봤습니다."
"이곳 박타푸르 고궁에서 촬영했다는 것도 알고 있겠네요."
"사실 나는 박타푸르에 오기 전에는 박타푸르가 어떤 도시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옛 왕궁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영화 <리틀 붓다> 촬영지라는 사실도 당신의 딸, 씨라파가 알려줘서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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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폴라 카페에 앉아 있으면 타우마디 광장 표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카페에 앉아 영화 '리틀붓다'에 나오는 젊은 싯다르타를 떠올렸다. ⓒ 송성영


간단하게 점심을 먹자고 했더니 모한이 이곳 음식 값이 비싸다며 집에 가서 먹자고 한다. 나는 인도에서부터 즐겨 마시던 라씨, 모한은 사이다를 시켰다. 우리는 라씨와 사이다를 마시며 말없이 광장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나는 영화 <리틀 붓다>와 함께 싯다르타의 아버지 슈도다나 왕의 뜻에 따라 세상 물정 모르고 안락한 왕궁에 갇혀 살았던 싯다르타의 출가를 떠올렸다.

카필라 성의 왕자였던 싯다르타는 어느 날 사대문 밖으로 나서 사람들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접한다. 동문 밖에서는 늙은 노인을, 남문 밖에서는 병자를, 서문 밖에서는 장례식을 치루는 것을 본다. 또한 북문 밖으로 나갔다가 수행승을 만나 출가를 결심하고 아버지, 슈도다나 왕에게 묻는다.(싯다르타와 국왕과의 대화 내용은 훗날 다시보고 참고한 <리틀 붓다>에 나오는 내용임)

"아버님, 왜 저에게 그동안 진실을 숨기셨죠? 왜 고통의 존재를 숨기셨나요? 가난, 질병, 늙음, 죽음의 고통을..."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은 널 사랑했기 때문이다."
"아버님의 사랑은 감옥입니다. 그토록 많은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저는 예전처럼 살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제 고통의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네 아내와 새로 태어난 어기는 어쩔 것이냐, 너에겐 가장의 의무가 있다. 넌 지금 떠나서는 안 된다."
"내가 아내와 아들을 아무리 사랑해도 제가 느낀 이 고통은 지울 수 없습니다. 그들 또한 고통을 느껴야 할 것이고 늙어 죽을 것입니다. 아버님과 저처럼 우리 모두가 죽을 것입니다."
"그래, 우리 모두는 죽는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고 또 죽는다. 태어나서 죽고 다시 태어나서 또 죽지... 그건 인간으로서 벗어날 수 없는 굴레다."
"그것이 바로 제가 할 일입니다. 제가 고통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겠습니다."

싯다르타는 그렇게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고통이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깨달음의 길을 향해 떠난다.

중세도시의 건축물의 밑바탕에는 고대 건축 기술이 스며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싯다르타가 부귀영화를 누렸던 왕궁이나 사원들의 일정 부분은 이곳 중세 도시 박타푸르를 닮았을 것이다. 나는 젊은 싯다르타가 살았던 카필라 왕국을 상상하며 싯다르타의 아내와 갓 태어난 자식과 아버지, 사랑하는 사람들을 등지고 길 떠나는 싯다르타의 뒷모습을 상상해 봤다.

만약 싯다르타의 아내 야소다라가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 뒷모습은 당당해 보였을까 아니면 냉정해 보였을까. 갓 태어난 라훌라를 품에 안고 몇날 며칠, 수없이 많은 나날을 눈물로 지새웠을 야소다라를 상상하고 있는데 모한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제 집으로 가볼까요?"
"아, 그러시죠."

나는 좀 더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모한에게는 일상처럼 마주대하는 고궁의 풍경들이라서 나처럼 큰 감흥이 없었을 것이었다. 모한의 뒤를 따라 고궁을 빠져 나오면서도 여전히 싯다르타와 야소다라를 떠올렸다. 고행을 수행 방편으로 삼는 사문들을 만나 6년간의 고행 길로 들어선 깨달은 자 붓다가 아닌 인간, 싯다르타의 고통은 어떠했을까. 왕궁에 남겨진 아내, 야소다라의 고통은 또 어떠했을까.

싯다르타는 '악기의 줄이 너무 팽팽해도 너무 느슨해도 음악을 연주할 수 없다'는 지나가는 악사의 얘기를 듣고 너무 팽팽하기만 했던 고행의 어리석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깨닫게 된다. 고행이 어리석은 일이라 했지만 싯다르타는 6년간의 고행이 있었기에 그 고행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래전 부터 부처님의 근본 핵심 사상인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 사성제(四聖渧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와 팔정도를 경전을 통해 알고 있었다. 사성제와 팔정도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고집멸도(苦集滅道), 즉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의 원인이 있으며 그 고통을 멸할 수 있다. 아울러 고통을 멸하는 방법이 있고 그 고통을 멸하는 방법인 여덟 가지의 도를 팔정도라 한다.

하지만 나는 단지 경전에 적힌 내용을 알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내 안의 고통조차 제대로 마주대하지 못하고 있다. 나를 괴롭히는 고통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고통을 멸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인도와 네팔을 떠돌고 있는 것은 당장 눈앞에 닥친 아내의 이혼 요구에 대한 고통과 제대로 마주대하고 싶어서 인지도 모른다. 고통과 제대로 마주대하려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이 뒤따른다. 고행이다. 내 몸은 인도와 네팔을 떠돌고 있지만 내 마음은 고통스러워 하는 내안의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 나도 떠나야 한다.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정들면 떠나기가 쉽지 않다. 모한과 닷새를 함께 하면서 정이 많이 들었다. 여행길은 만남과 이별의 반복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배낭을 챙겼다. 모한이 며칠 더 머물다 가라는 손길을 내려놓게 했다. 내게 한없이 자비를 베풀어 준 모한의 딸 씨라파와 작별 인사라도 나눠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버스 주차장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그동안 친절하게 대해준 것에 대한 작은 성의라는 말과 함께 과일이며 몇몇 부식거리를 모한에게 건네주고 싯다르타의 탄생지 룸비니로 가기 위해 카투만두행 버스에 올랐다. 모한은 버스가 시동을 걸 때까지 말없이 내 옆 좌석에 앉아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차장 밖에서 아쉬운 표정으로 모한이 손을 흔든다. 언제 다시 만날 기약도 할 수 없는 사람들, 나는 열린 차장 틈으로 고개를 빼들고 우리말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모한이 대충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활짝 웃는다. 버스에서 모한이 멀어지고 있다. 나는 벌써부터 모한 가족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2015년 네팔 대지진이 일어나기 10개월 전쯤의 기록입니다. 대지진으로 박타푸르 또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한에게 전화를 했지만 전화 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모한과 통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가족 모두가 무사하다는.
#박타푸르 #고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영화 '리틀붓다'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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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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