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주사거배 28,2×35.6㎝ 지본채색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미술관
'주사거배'(酒肆擧盃)는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국보 제135호다. 국보로 지정된 그림이 이 한 장만이 아니라 혜원 신윤복이 남긴 풍속화 30장면을 엮은 도첩이며 '주사거배'는 그 중 하나의 그림이다.
주사거배라는 이름은 혜원 신윤복이 붙인 이름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됐던 그림이 돌아오자 후대 사람들이 그림에 붙여준 이름이다. 거배요호월 포옹 대청풍이라는 화제와 그림의 분위기를 파악해 이러한 이름을 지었을 진데, 작자 자신이 지은 이름이 아니라면 합리적 의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거배요호월 포옹 대청풍(擧盃邀皓月 抱瓮 對淸風)을 '술잔을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술항아리 끌어안고 맑은 바람 대하다'라고 소극적으로 해석하기보다 '술잔을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술항아리 끌어안고 맑은 바람 대하려거든'이라고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싶다.
녹봉을 먹는 자들은 한 잔의 술을 마시더라도 하늘이 부끄럽지 않게 마시라는 뜻이다. 궁중화원이 됐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민중 속으로 뛰어든 혜원 신윤복의 비판 정신이 번뜩인다. 김영란법이 발효된 이 시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뇌물수수 현장을 혜원이 순간포착한 것지금부터 확대경을 들이대고 그림을 살펴보자. 확대경이 없다면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자.
때는 바야흐로 꽃피는 춘삼월. 양지에 있는 진달래는 시들어가고 응달에 있던 꽃이 화사하게 핀 것으로 보아 하순이다. 헌데, 화기애애해야 할 술자리가 경직돼 있다. 에로티시즘의 귀재 혜원 신윤복 특유의 기생을 희롱하는 장면도 없고, 풍악과 가무가 질펀한 술자리도 아니다. 화명(畫名)처럼 '거하게 술잔을 들어라'가 아니라 뭐 집어먹은 얼굴들이다. 딱 걸린 것이다.
"꼼짝하지 마라"는 불호령에 국자를 든 주모의 손도 멈췄고, 왼손으로 젓가락을 들고 안주를 집은 척 하던 붉은색 단령에 노란 초립을 쓴 무예청 별감의 손도 멈춰 섰다. 별감의 오른손에 봉투를 쥐어주던 운종가 장사치의 손도 얼어붙었고 무릎이 꺾어졌다. 의금부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할 일을 생각하면 지릴만도 하다. 장사치라 표현했지만 산업혁명 이전 농업이 주산업이었던 그 시대. 운종가의 국전을 쥐락펴락했던 장사꾼이라면 오늘날 IT업계 CEO 못지않다.
영문을 모르는 중노미는 놀란 토끼처럼 등채(지휘봉)를 든 사람을 쳐다보고 있다. 진한 청색 바탕에 흰줄 무늬가 있는 까치등거리를 입은 의금부 나장이 낮술에 불콰한 얼굴로 변명을 해보지만 현장을 급습한 사나이는 들은 체도 안한다. 임금이 밀파한 감찰관이 사령을 대동하고 뇌물 수수현장을 급습한 것이다. 혜원이 감찰관의 얼굴은 안 보여줬지만 그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신표(信標)는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뇌물수수 현장을 혜원이 순간포착한 것이다. 그림의 배경이 되고 있는 영조시대는 어사 박문수와 같은 강직한 인물들이 활약하던 때다.
장안의 술집 대명사 군칠이집트래머리를 한 주모의 폼새가 나그네가 허기를 달래고 부보상이 쉬어가는 봉놋방 수준의 주막이 아니다. 대청마루에 3단 장이 있고 교방 탁자에는 연적과 도자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혜원이 활약했던 18세기 후반 한양의 술청이다.
무수리 몸에서 태어나 왕의 자리에 오른 영조의 시대.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한국을 거치며 궁녀출신 숙원 장씨가 희빈을 거쳐 왕비에 올랐다가 사사를 당하고 인현왕후가 폐서인 됐다가 환궁하고 송시열, 김수항 등 많은 선비들이 희생되는 아버지 숙종 시대의 격변기를 거치며 정치는 혐오의 대상이 됐다.
정치꾼들은 '상대를 밟아야 내가 올라간다'를 넘어 '너를 죽여야 내가 산다'고 양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리고 그들의 주구노릇하며 악역을 전담하던 중하위급 관리들은 배불리 먹고, 즐겁게 살며, 재물이나 긁어모으자면서 부정부패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특히 술집 골목 건너편에 있는 의금부 나장이나 별장들이 심했다. 사헌부하고는 다르지만 오늘날 '떡검' '섹검' '스폰검' '벤츠검'과 별로 다르지 않다.
영조시대. 종루를 중심으로 운종가 뒷골목에는 술집이 즐비했다. 그 중에서도 전옥서 남서쪽에 있던 '군칠이집'이 단연 으뜸이었다. '군칠이집' 술맛은 장안 주당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군칠이집'은 주막이나 작은 술집이 아니었다. 직접 술을 빚는 양조장이었으며 술청이었다. 이 집에서 안주로 내놓는 장국과 어육은 천하일미였다.
군칠이 집은 장안 술꾼들의 로망이었다. 이 집은 세조시대 홍일동의 집터로 알려졌다. 호방한 성격의 그는 대단한 애주가로서 매일같이 친지를 초대하여 그의 집 우물물로 빚은 가양주를 한 동이씩 마셨다. 술을 잘 마셔 선위사로 발탁된 그는 세조와 함께 지방유람 중 홍주에서 술 2말을 먹고 대취하여 쓰러지자 임금이 어의로 하여금 구료하게 하였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 주당으로서 이 얼마나 영광인가?
또한 그의 딸 숙의홍씨는 폐비윤씨의 시새움 속에 성종의 총애를 받아 아들 7명, 딸 3명, 합 10명을 낳았으니 임금이 빠진 우물은 무슨 맛일까? 상상하며 장안의 술꾼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그가 낳은 아들이 견선군, 영원군 등 왕자가 일곱이므로 군칠(君七)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기둥서방 노릇을 하고 업주의 바람막이 역할어느 시대 어디에나 '짝퉁'은 있게 마련, '군칠이집'이 대박을 터뜨리자 여기저기 '군칠이집'이 생겨났다. 그래도 술집이 번창했다. 다른 업종을 영위하던 가가들이 속속 술집으로 전업했다. 모두가 한결같이 주등을 내걸고 '군칠이집'이라 했다. 오늘날 '호프집'하듯이 '군칠이집'은 술집의 대명사가 되었다. 혜원 신윤복이 활약했던 시기. 한양 도성에 '군칠이집'은 100여 개가 넘었다.
동시대를 살았던 이익은 그의 <성호사설>에서 운종가 전방(廛房) 절반이 술집이라고 개탄하고 있다. 이들의 뒷배를 봐주고 이익을 취하는 부류가 있었으니 중하위권 관리들이었다. 그들은 기생의 기둥서방 노릇을 했으며 업주의 바람막이 역할을 했다. 오늘날 조폭과 별로 다르지 않았으며 술집 직업여성 계좌로 송금 받고 그에게 방을 얻어주는 부장검사와도 도진개진이다.
영조가 우의정 김상로에게 시중 여론을 물었다. "추조와 경조(京兆)의 관리들이 술집에서 날마다 돈을 징수하며 당연한 법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 밖의 명목으로 돈을 갈취하는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28년 12월 20일. 추조(秋曹)는 오늘날 검사천국 법무부다. 이에 영조는 형판을 불러들여 밀명을 내렸다.
돈 되는 곳엔 밀수와 밀주가 성행한다술집이 번성하자 문제가 생겼다. 누룩이다. 당시 운종가에는 은국전(銀麯廛)이라는 특이한 전포가 있었다. 일반 소비자를 상대하는 가게가 아니라 도가에 누룩을 공급하는 원료 공급처였다. 전(廛)이 말해주듯이 육의전처럼 조정에 역을 지고 누룩 공급의 독점권을 행사하는 전포(廛布)다. 오늘날 희석식 소주 생산업체에 주정(酒精)을 공급하는 회사와 비슷하다.
헌데, 수요와 공급에 차질이 생겼다. 수요는 늘어 가는데 공급이 딸렸다. 밀국(密麯)이 생길 수밖에…. 잇권이 있는 곳에 밀(密)이 기생한다. 밀수, 밀주처럼. 여기저기 누룩 난전이 생겨나고 누룩 밀제조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중하위 관리들의 시장이 커진 것이다. 그들은 술집 뒷배도 봐주고 누룩 밀제조자들의 바람막이 역할도 했다.
이것을 바로 잡아보려고 탕평정책도 펼쳐보고 금주령도 발동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에 영조는 감찰관을 밀행시켜 힘 있는 기관 즉, 사헌부와 사간원, 의금부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색출했다. 김영란법이 발효된 이 시대 새삼스러워진다.
색주가 유곽에 기생을 끼고 술 마시다간 걸리기 십상이니까 백주대낮에 술청마루에서 간단하게 한잔하면서 뇌물을 수수하다가 딱 걸린 것이다. 육의전 장사치의 부탁을 받은 무예청 별감이 평소에 알아 모시던 의금부 나장을 모시고 나와 작업하다가 딱 걸린 것이다. 하여, 현장포착이라 명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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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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