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와 신은미, 한때 이웃이었다

[백운동천을 따라 서촌을 걷다 36] 종로구 궁정동

등록 2016.10.20 11:35수정 2018.01.15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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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 가옥 북쪽으로 바로 이어지는 곳은 '무궁화동산'이며, 이 일대의 동명은 종로구 '궁정동(宮井洞)'이다. 동명은 육상궁 주변의 자연마을 온정동, 박정동 등을 합치며 육상궁(毓祥宮)의 '궁(宮)' 자 이들 지명의 '정(井)' 자를 합쳐 궁정동이 된 것이다.

육상궁은 청와대 남서쪽 모퉁이에 위치해 있다. 청와대 경내에 위치해있기에 사전 허락을 받아야 관람이 가능하다. 이곳은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였던 숙빈 최씨의 신위가 모셔 졌던 곳이다. 그 후로 왕을 배출한 여섯 명의 후궁의 신위가 추가되면서 일명 '칠궁'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들은 후궁이란 지위로 인하여 죽어서도 자신의 남편과 아들이 있는 종묘로 가지 못하고 이곳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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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 김상헌의 집터임을 알리는 표석과 그의 시비로 청와대 앞 무궁화공원에 설치되어 있다.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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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동에 위치한 선원 김상용의 집터임을 알리는 ‘백세청풍’ 각자바위 ⓒ 유영호


한편 육상궁이 위치한 이 일대는 조선 최대의 세도가문이었던 안동김씨의 일파인 장동김씨의 세거지이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에게는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조로 널리 알려진, 병자호란 당시 주전파 청음 김상헌이며 바로 이곳 무궁화공원에 이 일대가 그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한편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되자 자폭한 그의 친형 선원 김상용은 바로 옆 동네인 청운동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청운동에는 그의 집터였음을 알아 볼 수 있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고 새겨진 각자바위가 남아 있다. 이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역사인물 김삿갓, 김옥균, 김좌진 등이 모두 장동김씨이며 조선후기 왕비는 거의 장동김씨였다고 할 만큼 세도정치의 최대파벌이기도 했다.

1970년대 '안가'가 있던 곳

한편 이 육상궁 남쪽으로 바로 아래는 또 다른 '현대판 후궁'들의 거처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평범한 공원으로 꾸며져 있지만 이곳은 1979년 10월 26일, 18년간 이어진 박정희 독재정권의 마지막 조총(弔銃)을 울린 '궁정동 안가'가 있던 곳이다. 김영삼 정부 때 이곳을 폐쇄하고 지금은 일반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잠시 우리 현대사의 커다란 획이 되었던 1979년 10월로 되돌아가 보자. 1960~1970년대는 밤의 정치로 알려진 요정정치가 극성을 부린 시기였다. 당시 청운각, 대원각, 삼청각, 오진암, 선운각 등이 그 위세를 크게 떨치고 있었다.


한일협상, 남북적십자회담, 7.4공동성명 등의 막후에 이곳 요정들이 존재했으며, 급기야 선운각 기생 정인숙이 한강변에서 피살된 사건은 아직도 미제로 남았다. 1965년 한일회담의 일본 측 대표였던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외상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썼다.

3공화국 때 외무장관을 역임했던 이동원이 자신의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고려원, 1992)에서 "아마 4공의 비밀을 궁정동이 간직하고 있다면, 3공의 비밀은 청운각의 기둥에 배어있지 않았나 싶다"고 기록했을 정도였으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이처럼 당시의 요정은 단순히 권력가들의 성적 욕구만을 충족시킨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이처럼 음주 가무 속에서 대한민국의 역사가 그려졌을 수도 있다는 슬픈 상상까지 하게 된다.

이에 박정희는 부정부패척결을 강조하며 요정 정치 엄단을 강력히 지시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 또한 관제 비밀요정인 바로 이곳, 궁정동 안가였다. 박정희는 이곳에서 자신의 최측근이었던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피살되었다.

이곳 궁정동 안가를 거쳐 간 여인들은 200명이 넘었으며, 당시 "대행사(측근 3~4명과 함께 즐기는 행사)는 월 2회, 소행사(대통령 혼자 즐기는 행사)는 월 8회 정도 치러졌다고 하니 어쩌면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처럼 권력자들의 음주가무 속에서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슬픈 상상까지 하게 된다.

박근혜와 신은미, 역설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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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신은미씨는 자신의 통일토크쇼가 논란을 일으키자 청와대로 찾아가 박근혜대통령과의 면담을 신청하였다. ⓒ 오마이뉴스


자그마한 동네가 이처럼 커다란 역사를 담고 있는 것도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궁정동 일대는 일반 국민이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에게 호소할 수 있는 마지막 물리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한 역사가 과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 청와대 앞에 서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내게 유독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2014년 12월 '통일토크쇼'를 열었다가, 소위 '종북'이란 마녀사냥을 당해 자신의 조국에서 강제추방 당한 '재미동포 아줌마 신은미'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북한 방문 후 자신의 DNA 속에 내재되어 있던 통일열망을 새롭게 발견한 그는 졸지에 수구언론들에 의하여 종북세력으로 몰렸다. 이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대통령면담을 요구했지만 청와대는 그를 외면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시간적으로 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 청와대에 머물 때 신은미씨 역시 청와대 담장 너머에 살고 있었다. 그러니 결국 둘은 같은 시기, 같은 공간에서 살았던 소위 '이웃 사촌'일 터. 지금은 전혀 다른 공간에서, 전혀 다른 세계관으로 살아가고 있다.

신은미씨는 어린 시절을 보낸 궁정동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기자와 나눈 대화를 옮긴 것이다.

"저는 대구에서 태어났지만 7살 때 서울 종로구 궁정동으로 이사왔어요. 그러다 보니 실제로 생생하게 기억나는 어린 시절은 궁정동에서 살던 초등학교 때에요. 우리 집 뒷문을 열면 바로 앞에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고 근처에 칠궁이 있었답니다. 어린 나는 보초를 서고 있던 군인 아저씨들이 목마를까봐 수시로 물과 음료수와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죠.

또 당시 비어 있던 칠궁을 우리는 '빈 궁'이라 불렀답니다. 학교 갔다 오는 길에 그 빈 궁 앞을 지나오면서 아이들과 귀신 나온다고 급히 뛰어 오던, 아련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문신처럼 박혀있는, 궁정동은 그런 곳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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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동 무궁화공원과 마주보며 청와대 경내의 남서쪽 모퉁이에 위치한 육상궁(칠궁) ⓒ 유영호


이런 추억을 간직하고 있던 그가 종북세력으로 몰려 이곳에 다시 찾아왔을 때 마치 자신이 "흑백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양 초연한 아픔"을 가지고 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난해 신은미씨는 북한 어린이 돕기 평화콘서트 등 북한 주민 생활과 관련한 토크콘서트를 열다가 정부와 보수 언론의 종북 몰이 공격을 받고 강제출국 됐다. "국가보안법은 아니지만 사회 갈등을 야기했다"는 법원의 논리는 황당했다. 반통일세력이 집권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만 연출 가능한 정치코미디였다.

게다가 그의 집안 내력은 '종북'과는 거리가 멀다. 외할아버지는 대구 경북출신에 독실한 기독교 장로교 신자로서 국가보안법제정을 주도한 3선의 국회의원이었고, 아버지는 육사출신이다. 뿐만 아니라 신은미씨는 초등학생 시절 리틀엔젤스로 전세계를 누빈 그야말로 최상류 집안이다.

신은미씨는 이러한 현실에서도 통일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현재 정부는 북한의 수해에 대하여 일체의 인도적 지원을 외면하고 있지만 그는 개인자격으로 수천만 원의 수해지원금을 모금하였고, 직접 쌀을 사서 중국을 통해 가지고 갈 계획이다. 비록 슬픈 역사가 새겨진 궁정동이지만, 이곳에 살던 신은미씨에 의해 새롭게 통일의 역사가 쓰이길 기대한다.
#서촌기행 #궁정동 안가 #육상궁 #백운동천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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