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 지휘권을 넘겼다... 권력의 습성을 깨달았다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Ⅰ부 초록색 견장 (21)

등록 2016.10.27 21:19수정 2016.10.27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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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중부대


겨울 산중 낮 시간은 매우 짧았다. 소대 땅굴 막사는 발랑리 613고지 7부 능선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짧았다. 오전 9시 30분 무렵에야 막사 언저리에 살짝 비친 햇살은 오후 4시 무렵이면 산마루를 슬며시 넘어가 버렸다.

나머지 시간은 긴 밤이었다. 계곡의 물소리, 바람소리, 산새와 들짐승들이 한데 어울린 대자연의 교향악이 밤낮으로 울렸다. 낮 시간 산새 울음은 운치가 있지만 한밤중 피를 토하는 듯한 멧새 울음에는 소름이 돋았다. 그보다 더 공포를 주는 것은 언제 출현할지 모르는 무장공비들의 기습이었다.

날이 갈수록 소대원들은 산중부대생활에 익어갔다. 우리 소대는 흡사 빨치산부대를 연상케 했다. 소대 막사는 난로를 땠지만, 내 BOQ 막사는 온돌을 사용했다. 하지만 군불을 지피는 시간에는 연기가 온돌 틈새로 올라와 막사 안을 가득 메워 그 시간은 바깥을 산책하거나 소대 막사에서 지내야 했다.

1971년 1월 중순 한밤중이었다. 제2초소로부터 괴물체가 나타났다는 비상 연락을 받고 잔류병들을 깨워 출동시켰다. 수류탄 등 군장을 다 갖춘 뒤 초소로 가자고 명령했으나 소대원들은 멈칫거렸다. 아마도 그들은 앞장을 서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내가 거총 사격자세로 앞장서서 초소로 향하자 그제야 뒤따랐다. 그것은 계급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머리카락을 주뼛 세우고, 사주를 경계하며 잔뜩 긴장을 한 채 초소에 이르자 초병은 전방을 가리켰다. 그는 우리 소대로 전입한 지 한 달 정도 지난 신병이었다. 그가 가리킨 물체는 자세히 보니 바위였다. 그런데 그의 눈에는 사람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나와 몇 명이 그곳에 다가가 직접 확인하자 바위덩이였다. 그런데 초병에겐 그게 사람이 웅크린 걸로 보이는 것은 일종의 착시현상 또는 신기루 현상이었다. 한밤중 경계 근무를 설 때 공포감에 젖으면 헛것이 보이고, 좀 심할 경우는 그 헛것이 다가오는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와 같이 근무했던 최 상병도 잠결에 깨어 보니까 공포감에 둘은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2초소에서 한 시간 남짓 머물며 공포감을 씻어준 뒤 부대로 철수했다.


부대교체 명령

 마지막 근무부대인 비암리 Cap 소대 위병초소 앞에서(1971. 3.)
마지막 근무부대인 비암리 Cap 소대 위병초소 앞에서(1971. 3.)박도
발랑리 땅굴부대 근무 3개월이 지나자 또 부대교체 명령이 떨어졌다. 아마도 상급부대에서는 3개월마다 각 CAP 소대를 뺑뺑이 돌리듯 교체시키는 모양이었다.  

이는 대민사고 예방과 경계근무에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보였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3CAP 근무지였던 비암리 지역이었다.

두 지역 간 거리는 4km 정도였다. 비암리 부대는 산 들머리로 근무 여건이 한결 좋았다. 하지만 그곳도 임시막사로 산비탈을 깎아 세운 움집 막사였다.

비암리 부대에서도 똑같은 산중 경계근무 연속이었다. 그새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을 맞았다. 그때부터 나도 전역병을 시름시름 앓았다.

그동안 전역을 앞둔 고참병들을 지켜봤지만, 그들의 시름을 속속들이 이해하자면 내가 겪어봐야 제대로 알게 되는 모양이다. 밥맛도 없어지고, 밤잠도 설친 적이 잦았다. 전역 후의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불안 초조의 연속이다. 그 무렵도 대졸 실업자가 지천이라고 했다. 서울 시내 교사자리는 엄청 어려운 모양이다.

차라리 눈 딱 감고 장기복무를 지원해 버릴까? 나라에서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군인이란 명령에 따라 움직이면 된다. 참 단순하고 편한 직업이다. 하지만 내 꿈은 그게 아니지 않는가?

나는 이런저런 시름을 달래고자 틈틈이 부대 환경미화작업을 했다. 부대 어귀 초소에 돌멩이를 주워 다가 '공격'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진달래 철쭉을 캐다 부대 뜰에 심고, 마을에서 화초와 산수유나무를 얻어다가 심었다. 그러자 당번병 최 병장이 물었다.

"이제 곧 전역하시잖아요."
"그래. 나는 곧 떠날 테지만 너희들은 남을 테고, 또 다른 후배들이 이 부대로 올 게 아냐?" 

 부대 내 조경한 진달래 앞에서(1971. 4.)
부대 내 조경한 진달래 앞에서(1971. 4.)박도

대민 지원

어느 하루 비상 전화가 가설된 마을 이장댁에 인사를 갔다. 이장에게 발랑리에서 온 부대라고 말하자 대환영이었다. 그의 말인즉, 발랑리에 사는 사돈이 지난겨울 멍석이 없어져 뒷산 군인들의 소행으로 알고 찾으러 가려다가 얼마나 추웠으면 그랬을까 찾기를 포기했는데, 부대이동을 하면서 제자리에 가져다 두고 간 양심적인 부대라고 극구 칭찬을 했다.

"마침 부대로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요즘 농촌에는 일손이 매우 부족합니다. 특히 모내기철에는 '고양이 손도 빌린다'고 할 만큼…. 대민지원 좀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아마도 상부에서도 그런 지시가 있을 겁니다."

곧 상부에서 전통이 내려왔다. 단 병력의 1/2 이내로 대민 지원을 하라고 했다. 그 지시에 따라 모내기 대민지원을 나갔다.

인수인계

전역식 사흘 전에야 대대장은 내 후임으로 유 소위를 보냈다. 부대 장비 및 비품을 그에게 인수인계한 뒤 사흘간 공동 근무하라는 지시였다. 후방에 근무하는 친구들은 전역식 한 달 전부터 편의를 봐준다고 했지만 내게는 단 하루의 특혜도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인수인계서에 서명한 뒤 소대 지휘권도 모두 유 소위에게 넘겼다. 그러자 소대원들은 유 소위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너무나 당연한 일, 하지만 내안에서는 섭섭함이 일어났다.

권력의 속성이란 이런 것일까? 권력을 쥔 자들이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은 권력에서 물러났을 때의 섭섭한 감정, 갑자기 엄습하는 무력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총칼로 정권을 탈취한 자는 그 정권을 놓지 않으려고 헌법을 뜯어고치고 자신에게 도전하는 자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나 보다.

전역식 날이었다. 유 소위가 소대원 전원을 연병장에 집결시킨 후 간소한 환송식을 마련해 줬다. 나는 그들에게 "남은 군대생활 잘하라"는 인사말을 남기자, 그들은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함성으로 화답했다. 

당번병 최 병장이 한사코 내 더플백을 뺏어 메고 비암리 정류장까지 동행해줬다. 도중에 대대장 지프차를 만났다. 나를 사단까지 환송해주고자 왔다고 했다. 거기서 최 병장과는 헤어졌다.

"박 중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장기복무 지원할 생각 없나?"
"감사합니다. 대대장님!"
"나 아무나 장기 복무하라고 붙잡지 않아. 젊고 유능한 장교들이 군에 남아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야 우리 군이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어."
"말씀 감사합니다만, 저는 제 길이 있습니다. 교육자가 될 겁니다."
"그래요? 사실은 2세 교육이 가장 중요한 일이지요."

 마지막 부대 소대원들과 함께 부대 울타리 옆에서(뒷열 왼쪽에서 두 번째 기자. 1971. 3.)
마지막 부대 소대원들과 함께 부대 울타리 옆에서(뒷열 왼쪽에서 두 번째 기자. 1971. 3.) 박도

전역식

1971년 6월 30일 오전 10시 정각, 26사단 연병장에서 학훈단(학군단) 제7기 전역식이 거행됐다. 2년 전 우리 동기생들이 입소할 때는 80여 명이었는데, 그새 두 친구가 희생(전사)했고, 한 친구는 불명예 전역, 두 친구가 장기복무지원을 해서 그날 70여 명이 전역했다.

11시 정각, 사단 군악대의 올드랭 사인 연주를 들으며 전입 때처럼 더플백을 메고 사단 정문을 벗어났다. 정문 앞에는 몇 친구들은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아대 출신 최 중위의 아내가 아이를 업고 트렁크를 곁에 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

"야, 최 중위! 넌 입대할 때는 혼자 하고, 제대할 때는 셋이 하는구나."
"어쩌다 본께 그래 됐다."

그는 씩 웃고는 아내 등에 업힌 아이에게 뽀뽀를 했다. 막 도착한 의정부행 시외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군부대와 멀어졌다. 임관에서 전역까지 24개월이 후딱 지난 듯했다. 곰곰 되새기자 사연도 많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안대수 대대장, 강철 중대장, 김학수 일병, 신천식 중대장, 박한진 소위, 박영삼 중사, 안 하사, 유 하사, 임 영규 상병, 이두식 이병, ….

멀어져가는 부대를 뒤돌아보는데 내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였다. 아찔한 고비도 많았지만 용케 잘 견디거나 피했기에 무사히 군 복무를 마칠 수 있었다. 나는 내 손으로 소대장 부임 후 어깨에 늘 달고 있었던 초록색 견장을 뗐다. 의정부에서 서울행 버스를 탔다.

안녕! 푸른 제복 시절이여….

(다음 회로 '제Ⅰ부 초록색 견장'은 끝날 예정입니다.)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전역 #군생활 #군인 #26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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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전국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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