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라온(김유정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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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거사는 지역민의 호응과 지역경제의 파탄이라는 좋은 조건에서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위와 같이 대원수의 리더십 부족이 결정적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해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이 외에도 결정적 요인들은 더 있다. 그중 하나는 1812년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정세다.
한나라가 동아시아 최강으로 등극한 기원전 2세기 이후로, 한민족의 정세는 어떤 형태로든 중국 대륙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한반도나 만주의 왕조교체 혹은 정치변동은 중국대륙이 불안정해진 상태에서 일어났다. 중국 대륙이 안정적일 때는 한반도나 만주의 급변 사태가 잘 발생하지 않었던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나라를 꺾고 동아시아 최강으로 등극할 때까지는 이 법칙이 유효하게 작용했다.
홍경래가 혁명을 일으킨 1812년은 동아시아가 비교적 평화로울 때였다. 조선에서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서민경제가 어려워지고 체제에 대한 불만도 커져가고 있었지만, 그에 비해 국제관계는 안정성을 보이고 있었다. 청나라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국제적으로 별다른 혼란이 없었다.
동아시아가 혼란스러워진 것은 홍경래가 거사를 일으킨 지 28년 뒤인 1840년이다. 17·18세기에 과학기술과 군사기술을 업그레이드시킨 서유럽이 이를 기반으로 중국 시장을 개방하고 경제 패권을 빼앗을 목적으로 아편전쟁을 벌여 청나라의 항복을 받아낸 1840년부터 동아시아의 기존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1812년 당시에는 아직은 평화로웠다. 청나라의 국제적 지도력도 안정적이었다. 그 덕분에 청나라와 동맹을 맺은 조선의 국제적 지위도 안정적이었다. 조선은 내부적으로는 불안정했지만, 든든한 동맹국 덕분에 대외적으로는 안정적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1812년이라는 시점은 혁명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국제적 여건이 덜 성숙한 때였다. 물론 국내적 여건은 성숙해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 정세가 한반도 내부보다는 외부의 요인에 의해 보다 더 많이 좌우됐기 때문에, 국내적 여건보다는 국제적 여건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시점은 혁명이 성사되기 어려운 때였다.
이런 시점에서 홍경래의 거사가 터졌다. 만약 국제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황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훨씬 더 많은 조선 백성들이 홍경래를 지지하고 나섰을 것이다. 그랬다면, 중립세력이나 부동층이 홍경래 쪽으로 마음이 끌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홍경래 부대 내부의 결집력도 훨씬 더 단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아시아 패권국인 청나라의 지위가 안정적이고 그런 청나라가 조선 정부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체제 전복을 시도했기 때문에, 홍경래는 보다 더 많은 역량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홍경래 부대 내부에서 의견분열이 쉽게 일어나고 포상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은 홍경래의 리더십이 약한 데도 원인이 있지만 반대편인 조선 정부의 입지가 아직은 든든하게 보였기 때문인 측면도 있었다.
만약 홍경래가 국제·국내적 여건이 무르익은 상태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역사무대에 등장했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이씨의 왕조가 해체되고 홍씨의 나라가 세워졌다면 어땠을까?
그 이후의 역사가 어떻게 됐을까는 차치하고, 당장에 이를 소재로 한 드라마의 스토리 구성부터가 달라졌을 것이다. 홍경래의 신왕조에서 공주가 된 홍라온, 폐주의 아들로서 도망자 신세가 된 폐세자 효명, 반혁명처벌법에 의해 역시 도망자가 된 김윤성. 이렇게 입장이 뒤바뀐 세 인물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쪽으로 드라마 작가들이 상상력을 동원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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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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