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에서 바라본 오극성 고택 전경.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498호인 조선 시대 건물이다.
정만진
문월당 오극성(吳克成)은 1559년 경북 영양읍 대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본래 선비였지만, 1594년 선조가 무예를 숭상하려고 실시한 권무과(勸武科)에 합격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세운 공로로 1598년 3등 공신에 올랐고, 1617년 타계헸다.
그로부터 250여 년 후, 오극성 가문의 고택에 큰 불이 났다. 화재를 진압한 뒤 정리를 하던 후손들은 불길에 그을린 작은 궤짝 하나를 발견했다. 궤짝 안에는 오극성의 일기 등이 들어 있었다. 1845년, 후손 오정협(1791∼1871)이 일기를 책으로 펴냈다. 책 이름은 <문월당 선조 임진일기>. 이 일기를 통해 후손들은 자신들의 선조인 오극성이 역사에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를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
250년 뒤 발견된 오극성의 임진왜란 일기오극성은 무인인 할아버지 오필과 선비인 아버지 오민수를 반반씩 닮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또래들보다 체격이 커서 외모로는 할아버지를 빼닮은 듯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잔병치레를 많이 했고, 학문을 힘쓰는 데 더 큰 흥미를 가졌다. 그래도 책 읽고 글 쓰는 틈틈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허약한 몸을 단련하는 데에 열성을 쏟았다. 고구려는 '자제들이 결혼할 때까지(子弟未婚之前) 밤낮으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晝夜於此讀書習射)'라는 구당서(舊唐書)의 기록을 연상하게 해주는 오극성의 이같은 마음가짐은 임진왜란을 맞아 크게 빛을 드러내었다.
특히 오극성은 병서(兵書)도 많이 읽어 영천 의병장 정세아로부터 "그대는 선비인데 어째서 군사와 관련되는 책을 그리 많이 읽는가?" 하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때 오극성은 "제가 비록 선비이지만 병법(兵法)을 잘 안다면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실제로 그 이듬해인 1592년, 일본이 대군을 일으켜 쳐들어오자 조선은 온통 쑥대밭이 되었다. 4월 13일 전쟁이 시작되고 불과 12일만인 4월 25일에 상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영양으로 날아들었다. 개국 이래 200년 동안 평화를 누리며 전쟁 없이 살아온 탓에, 거리는 온통 도망가려는 인파로 들끓었다. 오극성은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시 한 수를 썼다.
國事那堪言 나라의 일을 어찌 감히 말할 수 있으랴만孤城己絶援 외로운 고을에 이미 원군은 못 온다네 南州無義士 서울 남쪽 영양땅 의로운 선비가 없는가誰餘作忠魂 누구와 함께 충성을 실천할 수 있으려나! 선비들을 향해 의병을 일으키자고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병환이 심해 당장 전쟁터로 달려갈 수 있는 처지도 못 되었고, 군사들이 모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본래 선비였으므로 우선은 문장으로 나라에 도움이 되기로 했다.
병약했던 오극성, 임진왜란 극복 위해 글 써서 많은 방안 제시
오극성은 선조를 호위하고 있는 윤두수(1533∼1601), 예천에서 창의를 준비하고 있는 류복기(1555∼1617), 이미 의병군을 일으켜 낙동강 일원에서 활약 중인 곽재우(1552∼1617)에게 서신을 띄웠다. 윤두수에게는 병사의 모집과 군량미 비축, 그리고 무기 제작 방법에 대해 썼고, 류복기에게는 모두가 그대를 따를 터인즉 하루라도 빨리 군사를 일으켜 달라고 당부했다. 곽재우에게는 기습 공격이 아군에게 유리한 전술일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그 외 정곤수(1538∼1602)와 김성일(1538∼1593)에게도 서신을 보냈다. 평양성 탈환 이후 일본군을 얕잡아 본 명군이 벽제관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곤수에게 두 나라 군대의 협조 체제 유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뜻을 글로 써서 보냈다. 김성일에게는 경상도를 잘 지키지 못하면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가 저절로 무너질 것이므로 경상도 방어에 큰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