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시인인 내가 등단 제도 폐지를 말하는 이유

[불생사회 한국 / 문화-문학] 사회의 반영이라는 문학, '성폭력'까지 닮았나

등록 2016.11.08 15:09수정 2016.11.08 16:43
0
원고료로 응원
自由(자유)! 

너 永遠(영원)한 活火山(활화산)이여!

邪惡(사악)과 不義(불의)에 抗拒(항거)하여

압제의 사슬을 끊고 憤怒(분노)의 불길을 터뜨린

아! 1960년 4월 18일!

天地(천지)를 뒤흔든 正義(정의)의 喊聲(함성)을 새겨

그날의 噴火口(분화구) 여기에 돌을 새긴다.


조지훈 시인의 시(詩)다. 고려대학교가 1960년 4월 18일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4.18기념탑'에 새겨놓았다. 4월 18일은 이 학교를 다니거나 나온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특별하게 기억되는 날이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3.15부정선거를 저지른 불의하고 부도덕한 이승만 정권을 응징하기 위해 분연히 거리로 뛰쳐나갔다.

스크럼을 짜고 데모에 나선 학생들의 숫자는 무려 3000여 명에 이르렀다. 구속학생의 석방과 학원의 자유보장 등을 요구하며 평화롭게 시위하며 서울시 도심을 행진했다. 지금 서울시의회로 쓰이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 데모를 벌이던 학생들은 당시 유진오 총장의 만류로 오후 4시쯤 데모를 중단, 귀교를 결정한다.

하지만 학교로 돌아가던 학생들은 정치 깡패에게 백색테러 습격을 당한다. 종로 4가 천일백화점에서 이승만 정권의 사주를 받은 대한반공청년단의 소속 폭력배들이 데모대를 덮친 것이다. 학생 6명이 길에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이 뉴스를 접한 국민들은 분노했다. 그 다음날인 4월 19일 모두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학생들이 4.19 시민혁명의 결정적인 도화선으로 작용한 것이다.

a

4.18혁명 조지훈시인의 ‘고려대학교 4.18혁명 기념탑’ 비문 ⓒ 정기석


문학은, 사람을 위로하고 세상을 치유할 수 있어야

지금도 고려대학교에서는 그날을 기려 '4.18의거'라 부르며 특별히 기념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국민 대부분은 4월 19일을 혁명일로 기억하고 있지만 이 학교를 다닌 사람들만큼은 4월 18일을 더욱 사무치게 기억한다. 개인적으로도, 평소 이 학교를 다닌 이유로 4월 18일과 조지훈 시인의 헌시를 다시 꺼내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이런 게 바로 '시(詩)'라고 거듭 감탄하고 전율하곤 한다. 단 글 몇줄로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는 전의를 다시 다지곤 한다. 시가 사람에게 주는 힘과 에너지, 문학의 효용과 작가의 책무는 바로 이런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가 강해진다. 모름지기 '시'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당당히 세상에 들이밀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래야 시를 통해 고된 삶과 힘겨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치유받고 위로받을 수 있을테니까. 다시 용기와 지혜를 회복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꿔나갈 수 있을테니까. 그런데 요즘 사람을 위로하고 세상을 치유해야 마땅할 시나, 문학마저 정치나 경제 꼴을 점점 닮아가고 있다. 오히려 사람을 해치고 세상을 망가뜨리는 일에 앞장 서고 있다.

지금 우리 문단은 등단 부정에 이어 성추문, 성폭력으로 정치판 못지 않은 난장판이 되고 있다. 문학은 결국 그 사회의 반영이거나 물증이라 그런 것인가. 심지어 유력한 문예지나 권위있는 출판사마저 문학을 정치적 도구로 삼아 문단 권력을 독과점한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어쩌면  문학이 아니라 사실상 문학 사업이나 문학 장사를 해온 것은 아니냐는 합리적인 의심을 받고있다.

a

4.19혁명 서울시의회 의사당(전 국회의사당) 앞에 세워진 4.19혁명 기념비 ⓒ 정기석


'문단권력의 등단 로또'가 성폭력과 등단 부정의 병인 

특히 그간 '문학은 문학으로서 평가되고, 작가에 대한 평가는 작품 자체로 이뤄져야 한다'는 태도를 보여왔던 한 출판사는 최근 문단 내 성폭력 문제가 불거지자 시인들의 출판 계약 체결 중단, 원고 청탁 중단, 기 출간 도서 절판 등의 조치를 내놓았다. 하지만 이 또한 미봉책에 불과해보인다.

성폭력, 등단 부정의 고리이자 현장이 되었던 특정 문예지 출신 문인들이 유독 많이 연루되었다고 한다. 우연이라고 넘어가기에는 석연치 않다. 수상하다. 범법 작가와 연루된 출판사는 "이제 남성 작가들과 계약을 할 땐 성폭력 전력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할 정도"라는 참담한 자조와 탄식을 내뱉는 지경이다. 대통령이 부끄러운 나라의 국민으로서, 문단마저 부끄러운 이중고가 힘겹다.

문단의 문제를 파고들어가면 곧 '등단 제도'라는 고질적인 문제와 직면한다. 그게 거의 모든 문제의 발단이자 원인이라는 비난을 또 받고 있다. 한국의 등단제도는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이제 무엇이든 세계에서 한국에서만 유일하게 시행하고 있는 제도는 뭔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들린다. 일단 '개천에서 용이되는 로또' 같은 고시제도부터 그렇지 않은가.

역시 세계 유일의 한국 고시제도는 한방에 미꾸라지나 지렁이 마저 권력의 정점으로 수직상승시킬 수 있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같은 자는 그 표본으로 보인다. 고시제도는 이런 범부나 시정잡배에게 초능력을 부여한다. 합격하는 순간,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마치 호랑이나 용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고시 출신들의 관료사회는 가히 겉으로는 합법적이지만 속으로는 초법적 탐욕의 해방구로서 기능한다. 이런 고시 제도의 메커니즘은 이른바 문단 권력의 등단 제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a

세월호 추모 리본 세월호 희생자 추모 노란리본에 새긴 글자마다 모두 ‘詩’다. 이런게 바로 ‘진짜 詩’다. ⓒ 정기석


문학은 공유재로, 시인 조차 공익적 직업인이 될 수 있도록 

한국은 등단한 시인이 수만 명이 넘는다는 '시인공화국'이다. 역시 세계에서 시민이 가장 많은 나라라고 한다. 노벨문학상도 아직 받지 못한 나라로서 이건 자랑이 아니라 조롱처럼 들린다. 시인을 제품 찍어내듯 마구 양산하는 마치 '시인공장' 같은 문예지들도 적지 않은 게 우리 문단의 비정상적인 현주소다.

그런 '시인공장' 같은 문예지의 사정은 알고 보면 사실 딱하다. 전혀 인간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매달 1천여 부 정도 문예지를 발간하려면 편집, 인쇄, 제본, 운영비, 인건비 등 적어도 1000만 원 이상 경비가 들어간다. 그래서 가난한 문예지 처지로 문단의 오랜 미풍양속 관행처럼 굳어온 정신과 원칙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등단자들끼리 십시일반 하는 방법이다.

즉, 등단한 신인 당선자가 책을 어느 정도 구입해줘야 그나마 제작비, 운영비를 맞출 수 있다다. 물론 소수의 시인이 그 많은 책을 다 구매할 수는 없으니 '다수 시인의 양산'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물론 돈 많고 권위 있는 특정 문예지처럼 엄격한 심사기준과 높은 장벽을 치고 일 년에 두서너 명의 시인만 등단시키고 싶지만 그게 어렵다. 그래서는 수지가 맞지 않아 당장 문을 닫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문예지도, 시집도 돈 주고 사보지 않는 데 '시인공장'은 다른 도리가 없는 필요악이라는 것이다.

나도 '시인(詩人)'이다. 10여 년 전 어느 지방의 신생 문예지에서 얼떨결에 등단을 당했다. 여기서 당했다는 표현은 자의가 반, 타의가 반이었다는 뜻이다. 그때 고단하고 가난한 유목형 귀농인의 불우한 신세로서 당장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이 절박했다. 남의 글이라도 대신 쓰는 유령작가로나마 품을 팔아야 했다. 그래서 제대로 글 값을 받으려면 문인 등단증이 긴급히 필요했다. 그러나 욕심이 지나쳐 그때 순간적으로 사리분별력을 상실했다. 제 주제와 분수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사실상 문턱이 하나도 없는 '시인공장' 같은 지방 문예지에서 '시인 완장'을 납품받은 것이다. 후회했을 때, 주문 취소나 반품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최근 다시 두 번째 등단을 했다. 일 년에 서너 명 밖에 시인을 생산하지 않는 '시인 농장' 같은 지방 문예지다. 그렇게 생산성이 낮아서 어떻게 운영하는지 좀 걱정되는 곳이다. '시인의 직업화 연구용역 보고서'로 당선 소감을 대신했다. 추문의 유혹이나 생계의 위협이나 휘말리지 않고 문학을 제대로 하려면, 문학은 공유재가 되고, 문인은 공익요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그래야 '시인'조차 당당한 직업이 될 수 있을테니까. 그래야 조지훈 시인의 4.18의거 기념시 같은 총이나 칼같은 시를 세상에 당당히 타전할 수 있을테니까. 

a

당선 소감 문학이 공유재인, 시인도 직업이 될 수 있는 ‘사람 사는 세상’을 염원하는 어떤 당선 소감 ⓒ 정기석


<시인의 직업화 연구용역 보고서>

詩를 쓰고 싶어 쓴 게 아니다
사실은 사는 게 지겨울 때마다
아니꼽고 더럽고 치사할 때마다
결국 두렵고 무서울 때마다
아무 짓도 안 하고 싶었다

아무 짓도 안 하고 싶은데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으면
부끄러우니까, 욕 먹으니까, 굶어 죽으니까
억지로 어떤 짓이라도 하면
아무 짓도 안 하는 것 처럼 뭐라도 하면
그게 詩가 되었다
앞으로도 천재지변이나 횡재가 없는 한
이승은 이토록 지겹거나 무서울 예정이다
재수도 은총도 없는 詩人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죽지 않으려면 죽도록 詩나 쓰며 살아야 한다
그래도 도둑질이나 정치 보다는 나을 것이다

다만 詩의 쓸 모는 해도 너무한 수준이다
환금성이나 상품성을 좀 갖출 필요가 있다
나아가 詩人이 일종의 직업이었으면 좋겠다
만의 하나 詩人이 직업으로 분류된다면
표준적인 업무공정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하루에 한편씩 詩를 써서 상부의 어딘가로 결재를 올린다
그 상부는 詩의 품질을 철두철미하게 검사한다
그 상부가 심사숙고 끝에 마침내 詩로 판정을 내리면
그날의 詩 쓰는 업무는 비로소 쓸 모 있는 노동으로 공인받는다
늦어도 익일 정오까지는 편당 십만원쯤 입금된다

하루에 詩 한편 끼적거린다면 일당 십만원
주당 오일, 한달에 이십일 쯤 일하면 월급 이백만원
그 정도면 됐다, 그 정도면
욕심 부릴 근력도 없는 늙은 부부 입장에서
죽을 병은 걸릴지언정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누가 詩를 사겠냐는 것
그런 고가에, 지속적으로 구매하고 소비하겠냐는 것
그건 모르겠다, 詩人이 알 바 아니다
용역詩人은 상부에서 시키는대로 詩를 제조하고 납품할 뿐

詩를, 지하철 승강장 안전문에 광고처럼 새겨놓든
詩를, 국립공원 등산로마다 서낭당 부적처럼 널어놓든
詩를, 한국화장실협회에서 일괄 대량구매해 전국의 공중화장실 문짝마다 붙여놓든
詩를, 오피스나 아파트 엘리베이터마다 오늘의 유언처럼 조심스레 끼워놓든
詩를, 동시라 하든, 산문이라 하든, 낙서라 하든, 술주정이라 하든,
잠꼬대라 하든, 방언이라 하든, 소음이라 하든, 최후의 비명이라 하든

詩나 詩人을 삶든 굽든 튀기든 데치든, 욕 하든 때리든, 살리든 죽이든
그건 다 시인공화국 상부의 공무원들과 최고위층 원로회에서
적당히 알아서 대충 조치해주기를
덧붙이는 글 ※ 불행사회, 한국 : 한국인은 불행하다. 한국인은 태어나고 자라고 먹고사는 조국에서 사는 게 불안하고 불쾌하다. 위험하다. 주관적인 기분이나 감정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처해있는 현실이다.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는 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다. 자살률은 부동의 1위다.
한국인은 서로 믿지 않는다. 협동하거나 공유하지 않는다. 사회적, 정치적 연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좌와 우, 보수와 진보가 자꾸 편을 가른다. 남과 북, 경상도와 전라도, 강남과 강북이 자꾸 금을 긋고 벽을 쌓는다. 사용자와 노동자, 선생과 학생, 갑과 을이 서로 반목하고 질시한다. 그래야 겨우 나 혼자라도 먹고살 수 있다.
그렇게 살다보니 한국인은 힘들 때 의지할 친구나 동료 하나 없다. 국가와 정부의 책임과 의무는 개인과 가계가 온통 짊어지고 있다. 대의정치와 민주주의는 조롱당하고 능멸당하고 있다. 일상 생활에서 불법과 반칙이 얼마든지 승소한다. 조폭도 언론과 방송을 소유하고 활용한다. 전문가와 현자는 없고 사이비와 양아치만 난무한다. 친일파와 독재자의 후손이 되려 도덕과 정의를 정의하고 노래한다. 거짓말과 모함도 우기면 진실로 인정된다.
한국 사회에서 정신은 잿빛으로 타락하고 물질만 금빛 찬란하다. 공공성과 공동체는 소멸하고 이기주의와 패거리만 득세한다. 무기력증과 모멸감과 복수심이 일상을 지배한다. 신자유주의 천민자본주의의 완전무결한 표본이다. 불량한 한국은‘불행사회’다. 참‘나쁜 나라’다. 한국, 한국인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않다. 공멸 직전이다.
#불행사회 한국 #문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2. 2 "어버이날 오지 말라고 해야..." 삼중고 시달리는 농민
  3. 3 오스트리아 현지인 집에 갔는데... 엄청난 걸 봤습니다
  4. 4 "김건희 특검하면, 반나절 만에 다 까발려질 것"
  5. 5 '아디다스 신발 2700원'?... 이거 사기입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