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재북인사묘'의 춘원 이광수 묘비.
신은미
지난 7월 26일, 한국문인협회에서는 '육당문학상'과 '춘원문학상'을 제정하기로 했다가 민족문제연구소를 위시한 역사·학술·진보·예술·노동·시민단체들의 항의로 친일문학상 제정을 철회했습니다.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큽니다. 우리 문학계에서 친일 문학인에 대한 평가와 반성이 전혀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어찌 문학뿐만의 일이겠습니까마는 '친일역사 청산'이라는 구호가 해마다 반복되고 있는 실정에서 유독 친일문학인들에게 만큼은 작가들이 참으로 관대하고 유명작가들이 앞다퉈 '친일'문학상을 수상하는 현실이야말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깨우치고 우리 역사를 배우는 어린 학생들과 후손들에게 친일작가를 기리는 '성대한 문학의 잔치'를 과연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뼈아픈 반성이 없는 이들의 상찬 앞에서, 그 누구보다도 올바른 말과 글을 지켜내야 할 언어의 주관자인 작가들의 입이 가당치 않습니다. 올바른 생각과 뜻을 세워 글을 쓰는 작가라는 사람의 손이 무색하게 느껴질 따름입니다.
논란이 됐던 육당과 춘원문학상은 문인협회에서 추진 계획을 취소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일각의 분별없는 사람들이 다시 제정했다고 합니다. '동서문화사'라는 출판사에서 '육당학술상'과 '춘원문학상'을 제정해 오는 12월 1일, 시상식을 한다고 합니다. <중앙일보>에서 주관하는 제16회 미당문학상(수상자 김행숙 시인) 시상일은 12월 2일입니다.
누가 더 악질적이고 적극적이었느냐 하는 친일 행적의 경중을 따지는 것은 자의적 판단이며 객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친일인사들을 법정에 세워 민족사의 죄인으로 처벌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다시 반민특위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거의 대다수의 친일 범죄자들이 죽고 없는 마당에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에겐 친일역사 청산이라는 미해결 숙제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누가 봐도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친일부역행적이 뚜렷한 육당과 춘원, 미당과 동인문학상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친일'문학상이 바로 한국문단의 작가들에게 남겨진 역사적 과제이며 미해결 숙제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민족을 배반한 자를 두둔하는 나라가 어디 있나작가들이 나서서 친일문인들을 어떻게 벌할 도리는 없지만, 최소한의 상식과 정의에 따른 작가정신을 바로 세워야 하는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친일문학과 친일문학상 문제는 우리에게 과거사가 아니고 현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논쟁거리가 될 수 없으며 친일의 역사를 마감하는 작가들의 응당한 책무이기도 합니다.
미당 서정주와 김동인은 대표적인 친일작가였습니다. 2002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문인 42명의 명단에는 이광수, 최남선 등과 함께 서정주와 김동인의 명단이 들어있었고, 친일인명사전에도 올라있는 인물들입니다.
그들의 친일이 강요된 부역인가, 내재된 신념인가 하는 성격 규정을 두고 그들이 끼친 '문학의 업적'으로 사람과 문학에 대한 평가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했습니다. 실제로 그러한 주장이 미당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의 면죄부가 됐는데, 이것은 실로 문학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관을 전도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제 나라와 제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를 두둔하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나라는 친일파와 그 잔존세력들이 반세기가 넘게 권력을 잡아온 대한민국이 유일합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에서도 올바른 역사청산과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이명박·박근혜의 보수정권 집권 이후에는 역사의 시계를 노골적으로 거꾸로 되돌리는 본격적인 시도들이 재등장했습니다.
그럼에도 역사왜곡 정권과 한통속인 보수 언론재벌 <중앙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주관하는 미당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주고받는 우리나라의 문학계에서 작가들의 정의는 죽었습니다. 추악한 불의가 명예가 되고, 용서할 수 없는 부도덕이 권위가 되고, 긍정할 수 없는 가치가 권력이 되는 문학이 진정한 문학인 것인지요?
정말로 한국의 문학인들에게 의분은 사라진 것일까요? 기회주의와 현실주의, 치욕을 모르는 반역의 무덤에서 작가들조차 덩달아 함께 짖어대는 요란한 승냥이떼들인가요? 시대의 가치와 살아있는 역사의 정신을 담보해야할 작가들이 가장 먼저 뜨거운 피를 잃었습니다. 뜨거운 피를 잃었다는 것은 분노하는 심장이 없다는 게 아니고 치욕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치욕을 모르는 작가는 작가들이 아니고 치욕을 모르는 문학은 문학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망치는 치명적인 해악입니다.
2001년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와 민족문제연구소 등 29개 단체들은 서정주 시인의 친일·친독재 행위를 강력히 비판하며 미당문학상 제정 반대 입장을 밝혔습니다. 아울러 민족운동단체와 진보예술단체들 역시 중앙일보의 '미당문학상' 제정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당시 이들 단체들은 "시인들의 정부(政府)가 아닌 '반역'과 '독재'의 정부(情夫)였던 '미당문학상' 제정을 반대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친일의 후예들이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이어 서정주를 통해 또 한 번 자신을 민족사의 정통으로 위장하려 하고 있다"면서 서정주 시인의 생존 행적이 ▲ 조선인을 전쟁터에 내몬 '대동아성전'의 선전대원 ▲ 전두환 독재자의 생일에 축시를 바친 권력의 시녀였다고 규탄했습니다.
아울러 "거대언론이 친일을 합리화하는 문학상을 제정하려는 현실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중앙일보>에 항의했습니다. 특히 서정주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두둔하는 주장에 대해 "정의를 벗어난 펜은 총보다 무서운 흉기가 되어 민족과 이웃을 겨누게 된다"면서 "인간의 삶을 떠난 문학적 업적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문학만이 역사적 평가에서 예외일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문인들에게 요구한 바로는 '친일문학상이 될 미당문학상을 거부하는 시인이 나서길 간절히 기대한다' '문학상 심사와 수상거부는 물론 친일작가문학상 반대운동 동참을 촉구한다'고 했습니다.
찾아볼 수 없는 문학인들의 '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