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12일, 대한민국이 호모 저스티스였다

[팟캐스트 철학사이다] 김만권의 <호모 저스티스>

등록 2016.11.15 11:29수정 2016.11.15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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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여연대 팟캐스트 철학사이다 바로이책 <호모 저스티스>
참여연대 팟캐스트 철학사이다 바로이책 <호모 저스티스>참여연대

2016년 11월 12일, 대한민국의 시민들이 기적같은 일을 일구어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맞서 100만이 넘는 시민들이 서울에서 그리고 전국 곳곳에서 촛불을 들고 일어났다. 전통적인 정치학이 '광장의 정치'를 두려워 했던 이유는 그 광장에 담겨 있는 함의가 '광란의 정치'(politics of madness)였기 때문이다. 규범 없는 군중들의 반란. 그것이 통치학의 입장에선 바라본 '광장'에 대한 두려움의 근원이다.

그러나 2016년 11월 12일의 대한민국에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밝힌 촛불은 '박근혜하야'라는 기치 아래 기존의 정치권이 보여주지 못했던 '평화', '질서', '단합'이라는 새로운 규범의 불빛을 청와대를 향해 밤하늘 높이 쏘아 올리고 있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불의와 명확하게 단절하고 정의로운 시대로 가고자 하는 의지를 명백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11월 항쟁이 바로 직전, 11월 초 필자는 조금 어색한 경험을 했다. 필자가 진행하는 <철학사이다-바로 이 책>에서 필자가 쓴 신간 『호모 저스티스-불의의 시대에 필요한 정의의 계보학』을 녹음했던 것이다. 돌아보면 『호모 저스티스』는 2008년 촛불 이후 필자가 시작했던 연속적인 프로젝트를 마무리 하는 책이다. 2008년 촛불집회를 정당화하기 위해 쓴 『참여의 희망-광장에서 민주주의를 만나다』를 출간한 이후 필자는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를 우리말로 옮겼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날 『정치가 떠난 자리』를 통해 민주주의를 만드는 시민게릴라 프로젝트를 제안했고, 민주주의의 주체가 엘리트가 아닌 평범한 우리들임을 밝히기 위해 『인민』을 우리말로 옮겼다.

이에 더하여 현재 우리사회의 문제가 '불의'가 힘으로 자신을 정의로 포장하는 데 있음을 밝히기 위한 프로젝트가 『호모 저스티스』이다. 『호모 저스티스』의 문제 의식은 "정의로운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던 우리는, 강한 것을 정의로운 것으로 만들어왔다"는 『팡세』의 한 문장에 담겨 있다. 『호모 저스티스』는 이 문장에서 시작해, 강한 것에 맞서 정의로운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해 왔던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의는 그 시작부터 힘과 권력에 맞선 자들이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도덕적 정의'가 이만큼 우리 인류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선가 비집고 나오는 침묵하지 않는 '송곳'같은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었다. 정의를 정치의 핵심 주제로 만드는 사람들. 필자는 그 송곳 같은 사람들을 '호모 저스티스'라고 불렀다.

2016년의 11월 12일. 대한민국의 100만 시민들이 침묵하지 않는 송곳이 되어 거리로 나왔다. 어쩔 수 없이 거리에 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TV앞, 컴퓨터 앞, 핸드폰을 들고 같은 마음이 되어 거리에 나온 동료시민들을 응원했다. 그러나 그 송곳은 그 어떤 폭력도 원하지 않았다. 아니 그 송곳은 더 없는 평화를 갈망했다. 그리고 가장 정의로운 '평화'라는 수단으로 무너진 정의를 세우길 바랐다.

거리 위에서 필자가 읽어낸 100만 호모 저스티스들의 마음은, 그리고 그들을 응원했던 온 나라의 시민들의 마음은 단순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정리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들의 가슴에서 터져 나온 소리는 정의로운 국가로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박근혜 하야는 바로 그 정의로운 국가의 출발에 불과하다. 2016년 11월 12일은 그랬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지독한 경쟁, 차별, 혐오, 불평등을 넘어 새로운 시작을 원하는 시민들의 마음이 촛불이 되어 거리를 채우고 밤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그날 대한민국 모든 시민들이 '호모 저스티스'가 되어 어둠을 이기는 정의의 불빛을 이 땅에, 저 하늘에 채우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철학사이다 바로 이 책>에서 들을 수 있다.


* 팟빵에서 듣기 : https://goo.gl/h5J2gm
* 아이튠즈로 듣기 : https://goo.gl/II6lKS

김만권 :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의가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다는 전제를 두고 효용, 권리, 미덕이 벌이는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철학적 싸움이다. 그런데 처음 『호모 저스티스』를 구상할 무렵, 그런 철학적 논쟁에 대한 이야기가 50만 권이나 나갔다고 해서 너무 놀라웠다. '이 책은 철학적 논쟁인데 어떻게 50만 권이나 나갈 수 있지?'라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더 나가서 내가 의아했던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정의의 문제가 '정의가 잘 작동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전제 아래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정의 대 불의의 싸움에 가깝다. 정의가 작동하고 있는데, 그 정의의 내용 중에 '무엇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냐'라는 논쟁을 우리가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책을 읽고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갔다.
특히 그 책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지식인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의 반응이 '우리나라에는 정의가 없다'라는 것이었다. 더불어 '정의가 없으니 어떻게 하지'라기 반응보다는 대부분 냉소적이고 조소적인 반응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정의'가 '마땅히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정의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시자에서 '정의'는 '마땅히 해야 할 도리'가 아니었다. 어떤 도덕적 함의도 없이 단지 '정의'란 상황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럼 '무엇이 상황에 맞는 것이냐?' 했을 때, 맨 처음에는 '힘 있는 자에게 힘없는 자에게 굴복하는 것'이 상황에 맞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정의'는 힘 있는 자들이 잡고 시작했던 것이었다.
나중에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이 나오면서 도덕이라는 것을 처음 체계적으로 내세우면서 힘을 가진 자들에게 '힘으로 정의를 이야기해서는 안된다'고 했던 것이다. 결국 아테네는 그 말을 참지 못했고 소크라테스를 죽여버렸다.
실제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이라는 요소들이 '정의'에 들어오는 것은 '정의'의 역사로 보면 뒷부분이다. '정의'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실 '정의'는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로부터 도덕과 철학을 쥔 자들이 열심히 맞서 싸워서 '정의'의 일부분을 가져왔던 역사이다.


정세윤 : '힘과 도덕', '힘과 정의' 사이의 긴장 관계를 설명해 주셨는데, 책을 못 읽으시는 분들을 위해 부제 '불의의 시대에 필요한 정의의 계보학', 계보학적 관점에서 둘 사이의 긴장 관계를 조금 더 설명해 주신다면?

김만권 :
정의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있다. 하나는 '힘'에 기반을 둔, 하나는 '도덕'에 기반을 둔 시선이다. 힘에 기반을 둔 시선은 절대적으로 관계의 불평등성을 전제로 할 때 나오는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당시 아테네인들이 가지고 있던 정의관을 '신도 인간도 지배할 수 있는 곳에 가서 지배하는 것이 정의다'라고 묘사한다. 아테네인들이 멜로스를 정벌하러 가서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도덕적으로 나한테 뭔가를 설득하려 하지 마라, 도덕적으로 정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너와 나의 관계가 평등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정의'는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신도 인간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지배하고 네가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있으면 네가 나한테 그렇게 할 것이다' 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나머지 하나, 도덕적 정의는 관계의 평등성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다. 이 도덕적 정의가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은 각 구성원 간의 평등성을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이다. 그래서 정의에서 힘과 도덕의 대결 보려면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시대를 보아야 한다. 고대 아테네 때 민주정이 있었고, 민주정은 인류 역사상 가장 특이한 정체였다. 민주정만이 유일하게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모든 구성원의 평등성을 전제로 한다. 인류가 만든 정체 중 유일하게 구성원의 평등성을 전제로 하는 것은 민주주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도덕적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환경이다. 그래서 민주정이 있거나 시작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이 책을 썼다.

김만권 :
최순실 사태는 이 책에 등장하는 글라우콘의 주장으로 잘 설명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와 논쟁을 벌였던 인물 중 글라우콘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글라우콘은 '권력은 보이지 않는 힘이 행사하게 되면 철저하게 정의를 무시한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기게스의 반지'의 예를 드는데, 반지를 아래로 돌리면 모습이 보이지 않고, 위로 돌리면 모습이 보이는 반지를 하나 얻었던 양치기 목동이 어떻게 자신이 모시던 주인을 죽이고 참주가 되어가는가의 이야기이다.

정세윤 : 우리가 쉽게 알고 있는 '반지의 제왕'의 '절대 반지' 이야기 아닌가?

김만권 : 실제 '반지의 제왕'의 모티브가 되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 절대 반지를 얻으면 어떻게 되어 가느냐에 대한 이야기인데, 실제 최순실 사태도 마찬가지다. 박근혜는 최순실을 보이지 않게 만든 일종의 절대반지였다.

김만권 :
사실 이 책이 기획되고 본격적으로 이 책이 구도를 잡게 된 계기는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이렇게 말하면 저도 Shaman fortune-teller가 될 수도 있는데. (웃음) 저는 솔직히 말하면 명백하게 불의가 자행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면 불의가 자행되는 상황에서 송곳처럼 살아가는 호모 저스티스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더 나아가서 그 호모 저스티스들이 안전하게 있을 곳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사실 제도 이야기를 하는 부분도 그 이유이다.
우리가 이렇게 불의가 자행되고 반복되어온 역사라면 이제는 정말 반성하고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을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정의의 문제를 인간에게 맡겨놓으니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을 야만이라고 불렀다. 인간이 인간에게 기대지 않고 인간이 제도에 기대는 것을 문명이라고 불렀다.
여러분한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뭐냐면, 정말 이제는 더는 반복적으로 당하지 말고 더는 불의가 자행될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들고, 우리도 정의의 문제를 이야기 할 때 좀 고급스럽게 '이런 일 해도 옳고 저 일을 해도 옳은데 우리 어떤 일을 하지?' 이런 질문을 해야 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정의의 문제는 뭐냐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산을 물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게 맞는다고 말하고 이걸 믿는 사람들(이익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이 있다는 것이다.

정세윤 : 위록지마(謂鹿之馬)….

김만권 :
정말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시스템화를 잘 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나가서 드리고 싶은 메시지는, 정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때로는 비용으로 교환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세월호 사태 때 너무 가슴으로 충격을 많이 받았다. 사회의 반응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세월호 가족들이 악마가 되고, 자식들을 죽여서 죽은 자식들 몸값 장사하는 사람들이 되고, 자식 잃은 부모를 향해 그런 말을 내뱉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 사회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을까?'라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정말 우리가 그런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돈이 얼마가 들어간다, 뭐가 얼마가 들어간다'가 아니라 정말 우리에게 삶의, 목숨의 소중함, 인간 의 인간 자체의 존중성, 그런 것들을 목표로 하고 그런 것을 보호하는 시스템이 있어야 되고 그런 것에 대한 존중감이 확고하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다.
여러분이 '이것이 국가냐'라고 물었을 때 저는 여러분의 가슴속에 그게 다 있었다고 생각한다. '시스템이 여러분을 존중하지 않는다. 여러분을 하찮은 것으로 본다.'라는. 공적 현실에서 작동하는 정의와 여러분이 믿는 정의의 사이의 간격이 넓어지면 여러분은 그 사이에서 니힐(nihil)이 된다. 니힐은 Nothing이라는 뜻이다. 즉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니체가 말했던 니힐리즘(nihilism)은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정세윤 : 개, 돼지도 아닌 존재가 된다는?

김만권 :
요즘 어떻게 보면 그것만도 못한 존재이다. 정말 우리를 그렇게 보고 있다. 이제 여러분들이 확실히 여러분들의 존재감을 심어주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정말, 계속, 공적 현실에서 자기를 '정의'라고 포장하는 세력들은 여러분들을 계속 우습게 보고 마음대로 조작하려 들 거다.
이 시기, 이렇게 말하고 싶다. 박근혜 정부의 사퇴에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야'가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부당한 일을 우리 손으로 해결하고 우리 손으로 끌어내렸다는 이 경험이 엄청나게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이 경험은 우리의 경험이 될 뿐만 아니라 엘리트들에게도 소중한 경험이다. 엘리트들이 '이런 일을 했을 때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라는 그런 공포심과 두려움 정도는 갖게 만들어 줘야 한다.
플라톤은 '정의를 실현하면서 법을 깨지 않겠다는, 그리고 질서를 깨지 않겠다는 두려움 정도는 있어야만 한다.'라고 이야기했다. 그 두려움이 정의를 지키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 두려움을 정치 엘리트에게 이번 경험을 반드시 통해 심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의의 시대에 필요한 정의의 계보학'을 썼고, 《호모 저스티스》를 쓴 작가로서, 물론 아무런 권위는 없지만, 작가로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 이 순간은 정의를 실천해야 하는 순간이고, 그 정의는 대통령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이라는 점이다. 여러분 혹시 대통령이 자리에서 내려오면 권력 공백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들 계시는데, 결정을 못 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는 게 권력 공백이다. 빨리 내려올수록 권력 공백 기간이 짧아진다. 빨리 끌어내리고 빈 권력의 공간을 새로운 권력으로 채워 놓음으로써 여러분이 진짜 걱정하는 권력 공백 기간을 줄이도록 우리 스스로 빨리 끌어내리는 게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황주부 :
보통 책을 읽을 때 에필로그는 잘 안 읽는데, 뭐, 뒤에 후일담을 썼겠지. 그런데 이 책의 에필로그는 저한테는 충격적이었고, 에필로그 첫 부분에 그런 얘기가 나온다. 읽어보면….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정의의 자세.'로 시작하는데, "차별과 혐오가 싹트는 자리는 언제나 불평등이 만연한 곳이다. 민주사회에서 불평등이 만연할 수 있는 이유는 제도가 그 불평등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허용하기 때문이다. 제도적 불평등이 만연한 곳에서는 정의 역시 강한 자의 편에 서게 된다. 정의가 강자의 편일 때 차별, 자기 모멸, 타자 혐오는 일상이 된다." 라고 하는 구절로 시작이 되는데, 이러면 우리는 맞아, 하면서 무릎을 쳤는데, 무릎을 친 다음에 어디로 갈지를 모른다. 그러면 어쩌라고. 거기에 대한 선생님의, 그 다음 《벌레사회》라는 본인의 책에 대한 예고편이 있는데, 그 부분이 정말 궁금했다.

우리가 예를 들어 지금 격정적으로 일어났는데, 많은 국민이 이들이 언제까지 여기 있을까 궁금해한다. 이 시간이 지나고 어느 시간까지 이럴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우리가 거리에서, 찜질방에서, 각자의 모이는 자리에서 언제까지 이 이야기를 할까. 저는 이 이야기의 끝이 박근혜 하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까지. 사실 제도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분노를 표출하고 거기서 뭔가 하나의 반짝이는 결과를 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마무리를 우리가 함께하는 것. 그래서 모두에게 의미로 각인시키는 것 자체가 제도화이자 끝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우리의 민주화, 우리의 행동들이 그냥 어떤 정권의 퇴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어떻게 의미화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날이 우리가 끝나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날이라고 생각한다.

김만권 :
그래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픈 것은, 개헌 이야기가 나오는데, 개헌은 급속하게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하야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정권교체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그것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 정말 저는 헌법이라는 것을 새롭게 쓰는 일이 국민적 과정이 되어 전 국가의 하나의 이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회에 있는 국회의원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다룰 수 있는 전 국민적인 기구를 새롭게 세팅해서 정말 거기서 사회 전반적인 모든 관련된 사람들이 참여하고 각각의 사안에 대해 미디어나 모든 적절한 매체들이 참여해서 모든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국민적인 논의를 통해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엘리트들끼리 다 쓰고 나와서 "자 이렇게 우리 바꿨는데 승인할 겁니까, 말 겁니까?" 이것 말고 이번에는 진짜 바뀌는 내용 하나하나가 다 공적인 토론과정에서 논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 과정을 위해서라도 지금 정권 빨리 끌어내리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그 제도의 기초가 되는 개헌의 과정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세윤 :
참여연대는 연말 12월에 의인상을 시상하고 있다. 그해 공익제보자 중에서 의인상을 수여하는 활동을 오랫동안 해오고 있는데, 2~3년 전에 상을 받으신 분의 수상소감을 본 적이 있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가족도 사실은 왜 그때 그 결정을 했는지에 대해서 의심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원망하고 하는 경험을 하면서, 나의 행동이 올바른 것이었나, 정당한 것이었나, 가족도 인정하지 않는 그 행동이 올바른 것이었나에 대해서 계속 자문하게 됐는데, 그래도 이제 공적으로 신뢰받는 참여연대라는 시민단체가 본인에게 상을 수여한 것에 대해서 작게나마 그 행동이 올바른 것이었음을 인정받는 하나의 계기가 되어서 감사하다는 수상소감을 말씀하셨다.

김만권 :
그래서 공적 과정이 중요해다. 제가 「그리스 비극」 마지막 강의할 때도 언급했는데, 울분에 찬 사람들이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것이 공적 과정이다. 그 속에서 자기 행위를 인정받는 것들…(셋 다 울음)

정세윤 :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 책에는 나오지만, 사실은 송곳 같은 사람이 되는 것만이 꼭 호모 저스티스, 정의를 실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부당한 명령에 침묵하고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것도 하나의 정의로운 행동이 될 수 있다.

김만권 :
소크라테스는 "정의란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일을 하지 않은 것, 나쁜 일에 가담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쁜 일에 가담하지 않는 것도 충분히 정의로운 일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너무 좋은 일 많이 하려고 하는 것도 부정의다"라고도 말한다.
때로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기에 가담한 사람들 이해할 수 있다."라는 분들 계신다. 이대 교수님 중에서도 정유라 다 봐주고 하신 분들 계시는데, '먹고 살려니까 그랬겠지'라는 댓글도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학점 안 주고 그런다고 해서 학교 잘리지 않는다. 내가 봤을 때는 그것은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을 교부한 교수님도 계시지 않았나.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면 "내가 그 일을 가담하지 않겠다, 내가 상관하지 않겠다"고 빠져나왔는데도 억압받는 상황이다. 여러분들, 위에서 부당한 뭔가가 내려왔는데 그걸 내가 이행하는 사람이 되면, 그 순간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참여하지 않겠다. 나는 빠져나오겠다"라고 최소한 말할 수는 있어야 한다. 그런 거부가 정말 일반적인 상식이 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억압이 내려올 수 없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도 더더욱 제도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참여연대 #철학사이다 #바로 이 책 #호모 저스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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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는 정부, 특정 정치세력, 기업에 정치적 재정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합니다. 2004년부터 유엔경제사회이사회(ECOSOC) 특별협의지위를 부여받아 유엔의 공식적인 시민사회 파트너로 활동하는 비영리민간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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