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공장. 해당 사진은 기사와 관련이 없습니다.
조창현
그런 아들을 보는데 27년 전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아들보다 5살 많은 나이로 지금 직장에 처음 들어왔을 때입니다. 하던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출퇴근을 반복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직업훈련원에 들어갈 것을 권하셨습니다. 그곳을 나오면 바로 취직이 된다고요.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 말씀을 따랐습니다. 뭘 하는 곳인지도 모른 채 허허벌판 바닷가 시골 촌구석에 있는 공장으로 갔습니다.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이었지요.
짐을 싸 들고 처음으로 공장 정문을 지나 후문 근처에 있는 자취 집에 온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3월 말이었는데 차가운 바닷바람이 매섭게 불었습니다. 축구장 몇 개는 들어갈 것 같은 드넓은 공장 터에 공장이 다 들어서지 않아 더 서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서울 마포에서 태어나고 자라 홍대, 신촌, 이대 등 네온사인에 뒤덮여 친구들과 어울리던 혈기왕성한 청년이던 저에게 그 모습은 공허 그 자체였습니다. 과연 이런 곳에 있는 공장에 다녀야 하나 갈등했습니다.
입사하고서도 한동안은 얼른 그만둬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작업장에 들어갈 때마다 완전무장을 한 내 모습이 나 같지 않아서 너무 어색했습니다. 머리에 안전모를 쓰고서 얼굴에는 보안경, 마스크, 귀를 모두 감싼 귀마개까지 착용한 채 손에는 목장갑을 끼고 가죽장갑까지 겹쳐 꼈습니다. 손목에는 토시를, 발목에는 발토시에 안전화를 신고 마지막으로 앞치마로 작업복 위 온몸을 감싸야만 일을 하러 갈 수 있었습니다.
이 정도 무장을 한다는 건 그만큼 힘든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날카롭고 커다란 철판들을 옮겨 놓고 그라인더로 갈고, 망치로 두들겼습니다. 그라인더 질을 할 때마다 날카로운 굉음이 고막을 찌르는 한편 쇳가루가 사방으로 날렸습니다. 일하는 내내 귀는 멍하고 팔다리가 쑤셔왔습니다. 일도 힘든데 주야간 맞교대로 바뀌는 근무형태는 더 미칠 것 같았습니다. 야간조일 때면 비몽사몽 일하다가 졸기 일쑤였습니다.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 없어 졸다가 관리자에게 걸려 한소리 들을 때면 대들다가 싸운 날도 부지기수입니다.
휴식 시간에 몰려오는 잠을 쫓을 겸 잠시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울 때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바다 건너 가스 기지와 선박에서 비춰오는 불빛만이 일렁이었습니다. 그 불빛에 제 청춘을 저당 잡힌 것 같아 처량하기만 했습니다.
일을 마치고도 그 마음은 계속됐습니다. 작업을 끝내고 탈의실에 와서 안전모, 보안경, 마스크들을 벗고 거울을 보면 가관이었지요. 안전보호구가 가릴 수 없는 눈 주변뿐 아니라 마스크 안에 있던 코 주변도 땀과 함께 시커먼 분진이 범벅되어 있었습니다. 코를 풀면 콧속에서 쇳가루가 가득 나왔고요. 멋 부리기 좋아하는 20대 청년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지요. 매일같이 "그만두겠다"는 말이 입안에 맴돌았지만 정작 내뱉지 못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관리자들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자동차 외관에 생긴 굴곡이나 찍힘을 수정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만큼 속도보다 완전한 품질이 우선되는 일이었지요. 그런데 회사에선 하루 종일 서서 일해도 채울까 말까 한 생산 목표치를 달성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혹시라도 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관리자는 조회시간마다 "누군 뭐가 문제다, 또 누구는 어떻다"라며 목소리 높여 꾸짖었습니다. 나이나 근속도 별로 차이 나지 않는 현장관리자가 '야' '너' 부르면서 강압적으로 굴 때면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잘못된 건 고쳐놓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절 사로잡았지요.
그러던 중에 노동조합을 알게 됐고, 입사 1년만인 1991년엔 7일간의 총파업에도 참여했습니다. 그 뒤로 노조 구성원으로서 현장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싸워나갔지요. 고압적인 관리자들의 태도를 바꾸는 것부터 분진과 소음 등 열악한 근무환경을 바꾸는 것까지 해야 할 일들이 차고 넘쳤습니다.
하나하나 해결할 때마다 동료들은 열렬한 지지를 보냈고 그 힘으로 또 다른 일들에 도전하면서 마음속에 있던 공장을 때려치우겠다는 생각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사이 어느새 27년차 노동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이제 혈혈단신이던 내 곁엔 정말 좋아하는 현장과 지역의 동료들이 함께하고 있지요.
아들아, 너의 삶이 지금 당장 결정되는 건 아니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