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복룡, 임란 초기 공신인가 의병 학살범인가?

조선 시대 현청이 있었던 읍터 마을에 남아 있는 경북 예천 용궁향교

등록 2016.11.23 14:23수정 2016.11.23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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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용궁향교 누각 세심루에서 바라본 명륜당 건물과 동재 및 서재의 모습. 사진으로 보아도 용궁향교가 상당히 웅장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용궁향교는 임진왜란 때 불탔는데, 종전 이후 순차적으로 복원되었다.

용궁향교 누각 세심루에서 바라본 명륜당 건물과 동재 및 서재의 모습. 사진으로 보아도 용궁향교가 상당히 웅장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용궁향교는 임진왜란 때 불탔는데, 종전 이후 순차적으로 복원되었다. ⓒ 정만진


<선조실록> 1592년(선조 25) 5월 15일자를 보면 비변사가 '용궁현감 우복룡은 여러 고을이 무너질 때 홀로 자기 고을을 지켰을 뿐 아니라 나가서 싸우기까지 하였으니 그 공로가 적지 않습니다. 특별히 벼슬의 등급을 올려주어 다른 사람들을 권장하소서' 하니 선조가 따랐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기사를 조금 더 자세하게 보여주는 <선조수정실록> 1592년 8월 1일자는 '왜란 초기에 수령들이 모두 도망하여 흩어졌으나 우복룡은 홀로 관할 지역을 떠나지 않고 군사 1천여 명을 모집하였다가 적을 만나 패하여 흩어졌다. 그러나 다시 수백 명을 모아 밤에 예천의 적군 부대를 습격하여 적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면서 우복룡을 '안동 부사로 삼으니,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는 내용을 보여준다.


모두들 도망갈 때 홀로 싸운 우복룡

위의 두 기사는, 우복룡이 일개 현감에서 안동부사라는 상당한 고위직으로 벼락출세를 한 것은 전쟁 초기에 공을 세웠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모두 도망갈 때 혼자 싸웠고, 일정한 공로까지 이루었으니 다른 관리들의 모범으로 삼을 만했다는 것이다.

용궁에서 전투가 벌어진 때는 1592년 6월 15일이었다. 이일이 이끈 조선 관군 중앙군이 상주 북천에서 대패 끝에 거의 대부분 전사하고 마는 4월 24일보다 약 50일 뒤였다. 용궁 전투 전날인 6월 14일, 평양을 버리고 중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정한 선조는 세자 광해군에게 나라를 다스릴 권력을 넘겨준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분조(分朝, 조정을 나눔)의 탄생이었다. 그런 상황에, 우복룡의 용감한 전투 소식이 임금의 귀에 들어갔으니......! 

a  용궁향교 대성전 건물이 내삼문 긴 기와 담장 너머에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 그런데 용궁향교는 용궁면 면소재지에 있지 않고 향석리에 저 혼자 서 있다. 이는 지금의 면소재지와 조선 시대의 읍지가 달랐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조선 시대의 용궁현 현청은 향석리에 있었다.

용궁향교 대성전 건물이 내삼문 긴 기와 담장 너머에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 그런데 용궁향교는 용궁면 면소재지에 있지 않고 향석리에 저 혼자 서 있다. 이는 지금의 면소재지와 조선 시대의 읍지가 달랐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조선 시대의 용궁현 현청은 향석리에 있었다. ⓒ 정만진


우복룡은 임진왜란 발발 3년 전인 1589년(선조 22)부터 용궁현감으로 있었다. <선조실록> 1596년(선조 29) 3월 7일자는 우복룡이 '고을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다'라고 증언한다. 군사 1천 명을 모집하여 적과 싸우고, 패전 뒤에 또 다시 수백 명을 모집했다는 것은 그가 지역 사람들로부터 민심을 크게 얻고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한 고을의 수령으로 오랫동안 있으면서 좋은 정치를 했으니 백성들이 그에게 신뢰를 보낸 것은 당연한 일일 터이다.

용궁으로 진격해 온 일본군은 길천광가(吉川廣家, 깃카와 히로이에)의 약 3천 군사였다. 길천광가는 한양 점령 이후 경상도 통치를 맡은 모리휘원(毛利輝元, 모리 데루모토) 휘하의 부장이었는데, 모리휘원의 본대 2만 대군은 (경북 김천) 개령에 주둔 중이었다. 적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우복룡은 군사들을 소집했다.


a  용궁향교 누각 세심루의 열린 창으로 외삼문이 보이는 모습.

용궁향교 누각 세심루의 열린 창으로 외삼문이 보이는 모습. ⓒ 정만진


우복룡은 1592년 초부터 병사들을 모아 치안 유지에 힘써 왔으며, 용궁현과 예천군의 향병을 지휘하고, 상주에 주둔하고 있던 적군과 서로 대치하면서 군사를 훈련하여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이형석 <임진전란사>). 우복룡은 매복전을 주된 전술로 채택했다. 적에 견줘 군대의 규모가 적고 전투 능력도 모자라지만, 병사들이 모두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다는 장점을 백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약 2천여(이형석 추정) 관군과 의병은 모두 다섯 개의 소부대로 나뉘어졌다. 중앙군은 우복룡이 직접 맡고, 전직 판관 조붕(趙鵬)이 선봉에 섰다. 좌우의 군사들은 산으로 들어가 숲속에 몸을 감췄다.


하지만 창, 활 등 전통 무기를 들고 있는 관군은 그런 대로 전쟁을 하러 가는 군사들다웠지만 도끼, 낫, 곤봉, 철퇴에 심지어 톱을 챙겨든 자도 있는 의병은 한눈에 보아도 오합지졸 그 자체였다.

그래도 기이한 것은 아무도 기가 죽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불과 50일 가량 전에 이곳에서 가까운 상주 북천 전투 때 아군 장졸들이 전멸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 군사들은 징을 두들기고, 꽹과리를 울리고, 피리를 불어댔다.

낫, 톱 등을 든 조선 농민군, 왜군들 얕잡아 보고 선제 공격

진격해오던 왜군들 눈에는 대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농민군들이 그저 우스꽝스럽게 비쳐졌다. 당연히 적들은 아군을 얕잡아 보았다. 그들은 단숨에 중앙을 노리고 공격해왔다.

아군도 적군도 함성 소리는 요란했지만, 복병군에 비해 조금 앞서 나갔던 우리 군사들이 문득 흠칫 밀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어느샌가 좌우로 복병이 기다리고 있는 골짜기까지 적들이 들어섰다.

사실 아군이 엉성한 차림새로 요란을 떤 것은 왜군들을 유인하려는 계책이었다. 좌우로 복병이 숨어 있는 곳에서 적과 맞붙어야 승산이 있는 것이다. 승세를 탔다고 믿은 적군이 포위망 안으로 들어섰을 때 우복룡 현감의 우렁찬 목소리가 찌렁찌렁 산과 들을 울렸다.

"쏴라! 모두 일어나 활을 쏴라!"

좌우에서 화살이 날고, 후퇴하던 아군 병사들도 도끼며 낫을 휘두르며 총반격에 나섰다. 갑자기 우박처럼 화살이 쏟아지자 적군은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게다가 적장의 마인(馬印, 대장의 깃발)이 쓰러지자 왜군들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심리적으로 적들은 패잔병이 되어버렸다. 적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래도 아군은 맹렬히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 아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고, 실제로 적들을 완전히 격멸할 힘도 없었다. 온통 피로 물든 낫, 도끼, 창, 톱 등을 치켜들며 만세를 부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뿐이었다.

삼형제 참전, 위로 두 형들 전사하다

a  이유, 이희, 이응은 임진왜란 당시 용궁 전투에 의병으로 참전한 3형제이다. 이 중 위의 이유, 이희는 전투 전후에 전사했고, 막내인 이응만 살아남았다. 이응의 아들 이덕창은 본래 과거 합격 후 젊은 나이에 상주판관을 역임했지만 관군이 흩어지자 그 역시 의병 활동을 했다. 전란이 끝나고, 벼슬에서도 은퇴한 이덕창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에 집을 지었다. 그 집이 바로 민속자료 71호인 별좌공종택으로, 예천군 호명면 송곡리 446번지에 있다. 사진은 예천군청 누리집의 것이다.

이유, 이희, 이응은 임진왜란 당시 용궁 전투에 의병으로 참전한 3형제이다. 이 중 위의 이유, 이희는 전투 전후에 전사했고, 막내인 이응만 살아남았다. 이응의 아들 이덕창은 본래 과거 합격 후 젊은 나이에 상주판관을 역임했지만 관군이 흩어지자 그 역시 의병 활동을 했다. 전란이 끝나고, 벼슬에서도 은퇴한 이덕창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에 집을 지었다. 그 집이 바로 민속자료 71호인 별좌공종택으로, 예천군 호명면 송곡리 446번지에 있다. 사진은 예천군청 누리집의 것이다. ⓒ 예천군청

당시 용궁 전투에서 생명을 던진 장졸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예천수성장(守城將) 이유이다. 예천군수가 달아나고 없어서 대신 수성장을 맡았던 이유는 치열한 싸움 과정에서 끝내 전사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동생 이희도 용궁 전투와 관련하여 목숨을 잃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용궁의 장졸들은 기쁜 소식을 행재소(行在所, 임금의 임시 거처)의 선조에게 알리려 했다. 그 전령의 임무를 이희가 맡았다. 하지만 이희는 (경기도 광주) 쌍령에서 왜군들을 만났다. 중과부적, 맞싸움이 성립되지를 않았다. 이희는 왜적들의 칼에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희의 동생 이응만은 용궁 전투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다. 이응의 아들 이덕창은 과거 급제 후 젊은 나이에 상주판관 등을 지냈는데, 임진왜란 당시 24세였다. 그는 관군이 흩어지고 난 뒤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다. 창의 활동의 공로로 뒷날 조정의 내자시정(內資寺正)에 올랐던 이덕창은 은퇴 후 호명면 송곡리 446번지, 선조들이 대를 지어 살아온 곳에 집을 지었다. 그 집의 이름은 별좌공종택, 민속자료 71호로 지정되어 문화재의 반열에 올랐다.

그런데 <징비록>은 우복룡을 아주 나쁜 인간으로 기술

조선왕조실록에는 용궁 전투 외에도 우복룡에 대한 호평이 여러 군데 나온다. <선조실록> 1592년 8월 24일자에는 선조가 '안동부사로 적합한 인물이 있는가?' 묻자 윤두수가 '우복룡이 적임자입니다' 하고 대답하고, 다시 선조가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하는 문답이 실려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우복룡에 대한 찬사

<선조실록> 1594년(선조 27) 9월 14일 : 경상도 관찰사 홍이상이 선조에게 '청송·안동 등 가운데의 요해처에 품계가 높으면서도 용감하고 지혜로워 대중을 통솔할 수 있는 수령을 미리 선택하여 조방장(助防將)으로 명하여 배치해 두었다가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경주(당시 경상감영 소재지)를 후원하고, 사정을 보아 나아가고 물러간다면 경상도가 안정할 것입니다' 하는 요지의 보고를 올렸다.

비변사는 홍이상의 장계에 '안동은 토지가 넓고 인민이 많아서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처럼 어지러운 때에 수습할 수 없으니, 가벼이 수령을 바꾸었다가 후임자가 전임자만 못하면 오히려 백성들에게 어려움을 끼칠 뿐만 아니라 나라에도 도움이 못됩니다. 안동 부사 우복룡은 군졸을 훈련시키는 임무를 잘 감당하니 다른 사람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의견을 덧붙여서 선조에게 제출한다.

<선조실록> 1596년(선조 29) 3월 7일 : 비변사가 선조에게 '정인홍·우복룡은 모두 고을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고 또 전쟁의 공로도 많아 한 도의 인민들이 또한 자못 그들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는 내용이 나온다. 같은 날 비변사는 '감사를 시킬 만한 인물로 강찬, 한준겸, 신경진, 이용순, 정인홍, 우복룡이 있습니다. 인재가 부족한 때를 당하여 발탁해서 쓰면 타당할 것 같습니다'라고 건의한다.

<선조실록> 1600년(선조 33) 2월 25일 : 이항복이 우복룡을 선조 앞에서 극구 칭찬하는 내용을 보여준다. 이항복은 "홍주목사 우복룡은 백성을 부리고 백성을 구휼하는 일을 이치에 맞게 해서 일이 있을 경우 백성들이 기꺼이 달려오며 공무에 지성을 다하여 어려움을 피하지 않습니다. (중략) 복룡은 공무를 집행하는 데에 힘쓰고 백성 구휼도 잘하였으니, 이것은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수령은 각별히 포장하여 다른 사람들을 권면시키소서" 하고 말한다. 선조는 정3품이던 우복룡을 종2품 가선대부로 올려준다.

<인조실록> 1644년(인조 22) 12월 3일 : 우복룡에 대한 찬사는 인조 대에도 이어진다. 인조가 "예로부터 백성을 잘 다스린 수령은 품계를 뛰어넘어 발탁하는 조치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마다 기뻐하여 고무되었는데, 지금은 백성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묻자 이식이 "선조 때에는 서인원과 우복룡을 모두 잘 다스린 공으로 뛰어넘어 발탁되었는데, 지금은 잘 다스리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선조실록> 1596년 11월 17일자에는 우의정 겸 도체찰사(右議政兼都體察使) 이원익이 경상도와 전라도로 내려가려 할 때 선조와 나눈 긴 대화가 실려 있다.

"우복룡은 장수는 아니지만 군사가 있는 곳의 수령을 시키면 필시 물러나지 않고 한 지역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군사를 거느리는 일을 잘 하는가?"

"몸으로 직접 행동하니 물러나 달아나는 장수보다 낫습니다."

"반드시 병법을 공부한 것이 있어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용렬한 사람이 아니니, 군사를 거느리는 모든 일을 감당하지 못할 걱정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날 기사에는, 우복룡과는 무관하지만, 안타까운 사실도 한 가지 들어 있다. 선조가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으니, 일이 어떻게 될 수 있겠는가. 원균은 끝내 이순신의 부하가 되려 하지 않고 매우 미워한다'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더 이상 언급이 없어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임금이 우의정에게 그렇게 답답함을 토로하는 것을 보면 실록을 읽은 현대의 독자도 마음이 답답해진다.

그런데 우리는 우복룡을 따라다니는 괴담을 읽을 때에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슴이 답답해진다. 우복룡에 대해 거듭 좋은 증언을 싣고 있는 실록도 이때는 거의 무의미하다. 류성룡의 <징비록> 때문이다. 류성룡은 믿을 수도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기록을 자신의 책에 남겼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나아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내용이기 때문이고, 믿지 않을 수도 없다는 것은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 터무니없는 증언을 할까 싶은 반신반의 때문이다. (오른쪽 박스 안에 인용해둔 사례들에서 확인되듯이) 우복룡에 대한 많은 찬사를 싣고 있는 정사(正史) 실록이 도무지 <징비록>을 이겨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징비록>에 나오는 우복룡 괴담의 요지는 그가 의병 200여 명을 죽인 뒤 왜적 200여 명을 죽였다고 허위 보고하여 출세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징비록>에 실려 있는 우복룡 괴담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용궁현감 우복룡이 고을 군대를 거느리고 가던 중 (경북) 영천 길가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때 (경북 경산) 하양 군사 수백 명이 그 앞을 지나게 되었다. 군사들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우복룡이 괘씸히 여겨 "너희들은 반란군이로구나!" 하고 꾸짖었다. 

하양 군사들은 (군대의 이동을 명령한) 병사의 공문을 내보였다. 하지만 우복룡은 자기 군사를 시켜 그들을 포위한 다음 모두 쳐 죽여 시체가 들에 가득했다. 그러나 경상도 순찰사는 김수는 우복룡이 큰 공을 세웠다고 임금에게 보고했다. 우복룡은 (정3품 이상) 통정대부에 오르고, 정희적을 대신하여 안동 부사가 되었다.

그 뒤 하양 군사들의 가족인 고아, 과부들은 (조정에서 내려온) 사신을 만나기만 하면 말머리를 가로막고 울면서 원통한 사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우복룡은 이미 이름이 높던 터라 아무도 그들을 위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우복룡이 이미 이름이 높아졌기 때문에 아무도 억울하게 죽은 수백 명 군사의 유가족을 위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안동부사인 우복룡의 눈치를 보느라고 '당시 국정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갔던 재상 류성룡(김호종 논문 <임진왜란기 문경 지방의 항왜 활동과 당교 전투>)' 등등의 고관대작들이 아무도 그를 탄핵하지 못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복룡이 어마어마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도 아니었다. <선조실록> 1596년(선조 26) 3월 7일자를 보면, 비변사가 관찰사를 할 만한 인물로 여러 명을 거론하면서 우복룡의 이름도 말하자 선조가 "우복룡은 내가 원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비변사는 다시 의논해 보라" 하고 대답한다. 선조의 반응은, 우복룡이 임금의 특별한 비호를 받고 있던 인물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 우복룡을, 그런 그가 의병 200명을 죽인 뒤 왜병 200명을 참살했다고 허위 보고를 했다면, 왜 아무도 그 잘못을 지적하지 못했다는 것일까? 그런 이치에서, 아무래도 <징비록>의 기술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떠도는 이야기를 듣고 류성룡이 그냥 옮겨 적은 듯 여겨진다.

<선조실록> vs. <광해군일기>, 진짜 우복룡의 모습은? 

그런데도 <광해군일기> 1612년(광해 4) 2월 12일자에는 사간원이 '성천부사 우복룡은 전일 용궁현감으로 있으면서 임진년 변란 때에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여 죄악이 가득 차고 원망이 쌓였는데 형벌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관작을 보존하고 있어서 남방 사람들이 통탄해 하지 않는 이가 없고 심지어 전기를 지어 그 죄악을 드러내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다시 목민관으로 삼을 수 없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고 건의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가 하면, 경북 경산시 하양읍에는 우복룡에게 죽은 억울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하양 의군 위령비'도 세워져 있다. 도대체 진실은 어느 쪽일까? 우복룡은 임진왜란 초기 경북 북부 지역 전투의 영웅일까, 아니면 의병을 200명이나 죽인 뒤 왜적을 참살했다고 허위 보고하여 높은 자리를 차지한 희대의 학살범일까? 쉽게 판단할 수도 없는 이 일, 정말 궁금하다.

a  용궁향교 전경

용궁향교 전경 ⓒ 정만진


용궁면은 예천읍과 문경시의 중간쯤에 있다. 우복룡이 관군과 의병들을 지휘하여 왜군들과 전투를 벌인 곳도 예천과 문경 중간 지점인 용궁현이었다. 두 곳을 잇는 길가에 있던 용궁향교도 그래서 불에 탔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10호인 용궁향교의 주소는 예천군 용궁면 향석리 266번지이다. 물론 용궁향교가 향석리에 남아 있는 것은 이 마을이 조선 시대 당시 용궁현의 소재지였기 때문이다.

용궁향교는 1398년(조선 태조 7) 현 위치에서 동쪽으로 100미터 떨어진 곳에 처음 세워졌다. 하지만 불과 2년만인 1400년(정종 2) 불이 나는 바람에 몽땅 타버렸다. 그 후 100년 이상이나 지난 1512년(중종 7)에 이르러 어렵게 지금 자리에 복원되었는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당해 또 다시 전소되어 버렸던 것이다.

전란이 끝난 1603년(선조 36) 대성전과 명륜당을 복원하고, 1636년(인조 14) 세심루를 새로 지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이고,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a  용궁향교 대성전

용궁향교 대성전 ⓒ 정만진


용궁향교에서 2.5km 가량 떨어진 무이리 423-1번지에는 1701년(숙종 36)에 건립된 무이서당(武夷書堂)이 있다. 유형문화재 231호인 무이서당 바로 앞으로는 자동차 한 대가 통행할 수 있는 좁은 도로가 나 있다. 지금은 차량들이 서당 뒤쪽으로 난 넓은 새길 용개로로 질주하지만, 본래는 무이서당 앞의 이 길이 용궁현에서 들판으로 오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 용궁면 소재지'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무이서당은 여주이씨 시조 이인덕(李仁德)의 20세손 이지섬(李之暹)과 이식(李湜)이 후손들에게 면학의 터전을 마련해주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가운데 2칸은 마루이고, 좌우 2칸은 방으로 꾸여져 있다. 서당 뒤에는 이곳 무이마을 입향조로서 승사랑을 역임하고 한성부 우윤에 증직된 이윤수(李潤壽)를 봉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 있다.

서당 앞으로 난 좁은 차도를 따라 100m만 가면 넓은 들판이 불쑥, 복병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들판 저 먼 끝이 용궁면 면소재지이다. 거리낄 것이라고는 없는 광야의 바람이 장쾌하게 불어와 얼굴을 시원하게 때린다. 바람에는, 임진왜란 당시 낫과 도끼 등을 든 채 이 길을 달렸을 용궁 군사들의 함성 소리가 묻어 있는 듯하다.

a  무이서당 앞으로 난 좁은 도로를 불과 100여 미터만 따라가면 고개인 듯 아닌 듯 여겨지는 짧고 얕은 고개를 넘게 되고, 불쑥 넓은 들판이 나타난다. 들판 끝에 지금의 용궁면 면소재지가 아득하게 보인다. 그러자 그곳 면소재지에 조선 시대의 용궁현 현청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현청은 현재 용궁향교가 있는 향석리에 있었다.

무이서당 앞으로 난 좁은 도로를 불과 100여 미터만 따라가면 고개인 듯 아닌 듯 여겨지는 짧고 얕은 고개를 넘게 되고, 불쑥 넓은 들판이 나타난다. 들판 끝에 지금의 용궁면 면소재지가 아득하게 보인다. 그러자 그곳 면소재지에 조선 시대의 용궁현 현청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현청은 현재 용궁향교가 있는 향석리에 있었다. ⓒ 정만진


#우복룡 #용궁향교 #무이서당 #별좌공종택 #이덕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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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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