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두 번의 뽀뽀가 『수면중』인 아들에게 내가 하는 『아빠짓』의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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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바쁘고 힘들 때 태어난 아들. 내 아들은 예뻤다. 자기 자식이 안 예쁜 아빠가 어디 있겠느냐만, 그래도 내 아들은 예뻤다. 30대 초반의 바쁜 나날 속에서 내가 아들을 대하는 시간은 하루에 1시간 이내였다. 휴일도 2시간을 넘기진 않았다.
대부분 자는 모습을 봤다. 자고 있는 아들에게 뽀뽀하고 출근하고, 퇴근해서 자고 있는 아들에게 뽀뽀했다. 하루 두 번의 뽀뽀가 '수면중'인 아들에게 내가 하는 '아빠짓'의 대부분이었다. 미안한 마음은 없었다. 돈 벌기 바쁘다는 핑계로 모든 걸 스스로 용서했다.
둘째 딸이 태어나기 전까지 내 아들은 내 변명이었다. 회사에서 느끼는 수치와 모멸감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아들은 건강하게 잘 자랐다. 투니버스 채널로 '도라에몽'을 즐겨봤다. 초등학교에 갔다. 체육을 싫어했다. 등산을 데리고 다녔다.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위해 '가주는' 수준이었다.
집에서 혼자 놀거나 아니면 네 살 밑의 동생을 울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크는 건데. 그때는 그걸 몰랐다. 내가 아들을 혼낸 기억의 대부분은 동생의 울음 때문이었다. 그렇게 크는 건데. 혼낸 기억 때문에 아직도 괴롭다. 미안해 아들.
아들은 새로운 걸 좋아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어느 날. "아빠, 세상에 곤충 다음으로 개체수가 많은 건 조개구요. 조개의 98%는 먹을 수 있대요"라는 놀라운 얘기를 했다. 아니? 이 말의 진위 여부를 떠나 퍼센트를 알고 있다니.
'정글에서 살아남기' 같은 책을 즐겨 읽고 나에게 얘기해 주었다. 어려운 단어를 기억해서 내게 얘기해 주는 아들이 예쁘고 신기했다. 행복했다. 어떤 때는 바둑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바둑학원에 보냈다. 조금 다니다 그만 두었다.
그렇게 많은 학원(교습소)에 다녔다. 미술, 피아노, 만들기 등등. 태권도를 '1년이나' 다녔다. 친구 따라 다녔다. 그러다 어느 날 마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마술학원에 보냈다. 이번엔 오래 다녔다. 개인교습도 받았다. 그러더니 모든 가족 앞에서 마술 공연을 했다.
학교 학예회에도 출연했다. 인기였다. 이건 귀여운 수준이 아니었다. 대단했다. 그때는 내 아들이 커서 마술사가 될 거라 생각했다. 아무튼 그때 내 아들은 남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가며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공부를 못했다. 안 했다. 멍하니 있었다. 학교에 흥미가 없었다. 내게 얘기도 안 했다.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냥 사춘기인 줄 알았다. 그때 내 아들은 자신에 대해 알기 시작하고 있었단다.
나는 전혀 몰랐다. 정말 그냥 사춘기인 줄 알았다. 멍한 아들을 더 심하게 혼냈다. 난 나쁜 아빠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중에 알았다. 게이인 자신을 발견하고 얼마나 혼란했는지. 너무 미안하다. 그 시기를 버텨준 아들에게 감사한다.
중학교 3학년 어느 날,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기술을 배우겠다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겨우 설득해서 인문계 고등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대학엔 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자고, 기술학원에서 공부하고, 밤새 기술학원 숙제하고 게임하고, 학교에 가서 자는 생활을 반복했다.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 아들의 책상에 앉아 눈물을 숨겼다. 가기 싫다는 학교에 보내지 말걸.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아빠였다. 그렇게 밝고 남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던 아들이 절대로 주목받기 싫어하고 있었는데...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정규직'으로 취업을 했다. 그리고 독립을 했다. 혼자 사는 게 자신의 '오래된 로망'이라며. 자취방을 잡아주고 이사를 하고 온 날, 집이 텅 비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나 '퇴직금'이 발생하는 시점에 퇴직했다. 군대에 가겠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 꽉 찼다.
어둠이 걷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