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빨간 가방 안에 든 엘비스
비룡소
여자 애는 반짝이는 새빨간 가죽 가방을 열더니 요정들 코앞에 바짝 들이민다. 엉엉 울면서 그녀가 보여준 것은 숨을 거둔 새였다. 핸드백에 쏙 들어갈 만큼 작은 노란 새.
"헉! 끌고 다니던 게 새 시체였어.""어떡해. 진짜 죽은 거야?"예상치 못한 반전에 다연이와 정균이는 깜짝 놀라 눈이 둥그레졌다. 우리 반 아이들의 시선은 가방 속 엘비스에게 몰렸다. 실물 사진이 아니고 그림인데도 죽은 생물의 신체를 꼼꼼히 살폈다. 벌어진 부리, 굽은 발톱, 조그맣게 뜬 눈, 뻣뻣하게 선 깃털. 생의 기운이 가득한 어린이에게 죽음은 생소하고 신기한 현상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새의 죽음 앞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다음 장을 넘기니 요정들이 슬퍼하고 있었다. "안됐다. 정말 안됐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정말 슬프다." "불쌍한 엘비스..." "멍멍" 왠지 모르지만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엘비스를 묻어 주자."누군가의 제안에 따라 요정들은 장례식을 할 때처럼 움직였다. 일렬로 줄을 서서 행진하고, 촛불도 들고, 꽃도 들고, 하얀 띠를 묶은 화환도 들고, 향도 피웠다. 독일의 장례식 모습이었다. 아이들에게 장례식에 다녀온 적이 있냐고 묻자 대여섯이 손들었다. 스물세 명 인원에 비하면 적은 수였다. 아직 주변인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드물고, 부모님이 일부러 장례식에 데려가지 않는 탓이 컸다.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 저는 하얀 국화 들고 갔어요.""절 두 번 하고 향 피웠어요."할아버지 장례식이 떠올랐는지 다연이는 눈가가 촉촉해졌다. 친구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손가락으로 광대뼈 위를 훔치지 않고, 숨을 최대한 참았다. 그 감정을 존중해주고 싶어 애써 다연이를 외면하는데 벌써 윤지랑 영춘이 볼에는 투명하고 짠 액체가 떨어져 있었다.
"헤어지는 거예요. 그래요, 그런 거예요..."요정과 여자애는 함께 모여 앉아 아몬드가 박힌 과자를 먹고, 코코아를 마시며 엘비스를 떠올린다. 새의 동료이자 주인이었던 꼬마의 훌쩍이는 음성을 따라 뾰로롱 뾰로롱 엘비스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그러고는 서로 말도 없이 꼭 끌어안아 준다.
"정말 좋았어요."여자애는 '한 엘비스가 또 다른 엘비스를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며 빙그레 웃는다. 처음으로 보는 꼬마의 편안한 얼굴. 지금껏 긴장해 꽉 조였던 마음이 스르르 풀어졌다. 엘비스의 무덤엔 하얀 꽃과 화환 양초가 놓였다.

▲ 상처받은 아이를 위로하는 따뜻한 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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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도 참 힘들었겠다."승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승희는 키우던 개가 죽었을 때 화가 났다고 했다. 그냥 미웠단다. 사랑하는 개가 죽어서 밉다는 말에 아이들 절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희에게 공감하는 애들은 애완동물을 떠나보낸 아픔이 있었다. 왜 미웠냐고 물으니 잘 모르겠다는 고갯짓을 보였다. 가슴이 저리고, 슬프면서도 화가 났다고 했다.
어째서 슬픔이 분노가 되는 걸까? 죽음을 처음 대면한 아이는 상실감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알지 못한다. 자신이 아끼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상황은 아이에게 엄청난 충격인 것이다.
엘비스를 잃은 여자애는 "이럴 수 있는 거야??!"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마음이 괴로워 소리치는 여자아이에게 돌아오는 건 별 희한한 애 다 보겠다는 차가운 시선과 무시였다. 책 속 인물들도 그랬고, 책 밖 독자들도 처음엔 그렇다.
사연을 자세히 들어보지 않으면, 관심 있게 물어봐주지 않으면 여자애는 끝까지 이상한 소리 떠벌거리는 애가 되고 만다. 세상 사람들 다 들으라고 외쳐봐도 아무 반응이 없으니 소녀는 같은 행동을 반복할 수밖에.
무관심은 슬픔을 더 키운다. 비탄에 잠긴 소녀를 위로한 건 따뜻한 관심과 격려였다. 요정들이 여자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꼭 안아주고 나서야 엘비스를 웃으며 하늘나라로 보낼 수 있게 된다.
엘비스를 묻어주고 떠나는 여자애의 손에는 더 이상 빨간 가방이 없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슬픔과 함께 가방도 고이 묻힌 것이다. 죽음은 피해갈 수 없지만 슬픔은 덜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럴 수 있는 거야??!
페터 쉐소우 글.그림, 한미희 옮김,
비룡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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